등산의 다양한 문화

-* 우리는 산친구 [2] *-

paxlee 2010. 2. 11. 21:36

 

                    [우리는 산친구] 곽명옥·최오순·김순주씨
 
세계 최고봉 높이만큼 山友(산우)의 두터운  情(정)

“이제 아줌마들이다 보니 빙벽에선 폼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한겨울에 만경대 리지를 어떻게 가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바위 해본 게 오래됐단 말이에요.”

1월 14일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각에 우이동에서 만난 곽명옥(郭明玉·49·을지재단 검수팀장)·최오순(崔五順·43·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교무)·김순주(金順珠·40) 등 에베레스트의 여인들은 뜻밖에도 몸을 사렸다. 춥기는 추운 날이었다. 기상대 관측 이래 서울 지역 최대라는 폭설이 북한산 곳곳에 그대로 붙어 있는 오늘 오르기로 한 만경대 암릉은 보석처럼 반짝이면서도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좋긴 좋네요. 와~, 그러고 보니 저는 에베레스트 훈련 때 이후 처음이네요.”

1993년 5월 10일 선배인 최오순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바 있는 김순주는 포항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북한산 기슭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도 두 선배보다 표정이 더 환했다. 세 사람은 1991년 12월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첫 모임에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40명이 넘는 여성 산악인이 훈련대에 참가했다.
▲ 1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죠? 에베레스트 원정 때는 정말 날렸다니까요.” 곽명옥, 김순주, 최오순씨(오른쪽에서부터)가 만경대 암릉 피아노 바위 직전 테라스에서 “파이팅!”을 외치며 활짝 웃고 있다. 2 “언니, 잡숴봐요. 순주가 밤새 다듬어온 거래요.” 최오순씨가 언니 명옥씨 입에 과메기를 넣어주고 있다. 3 “오랜만에 바위 타니까 정말 좋아요. 즐거워요.” 용암봉 초입부. 4 “그땐 30kg 무게의 배낭을 메고도 주마링 해서 인수봉 꼭대기까지도 가볍게 올랐는데 이젠 빈 몸으로도 버겁네요.”주마링 등반 중인 김순주씨. 5 “북한산이 이렇게 아름다운 산인 줄 정말 몰랐어요. 18년 전에 오로지 훈련 차 찾은 산이었거든요.” 용암문에서 도선사로 내려서는 세 여성 산악인. 6 “그때 불암산에서 출발해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을 거쳐 북한산 능선을 타고 저 대남문까지 갔었죠?” 등반을 끝낸 뒤 에베레스트의 세 여인은 대남문 일원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되짚었다.

1987년 전국암벽대회 여성부서 우승한 바위꾼 곽명옥

“정말 가슴이 뛰었어요. 명옥 언니는 이름난 바위꾼에 1989년 안나푸르나 원정에도 참가한 산악인이었어요. 지현옥 언니 또한 매킨리(6,194m) 등정에 안나푸르나(8,091m)와 캉첸중가(8,586m)를 등반했고, 모교 후배들을 이끌고 무즈타그아타(7,546m)라는 봉에도 올랐고요. 최고참인 남난희 언니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하고 1989년 당시까지만 해도 ‘금녀의 벽’으로 불리던 토왕빙폭을 등반하는가 하면 그에 앞서 혼자 백두대간을 종주한 다음 펴낸 <하얀 능선에 서면>이란 책으로 유명한 여성 산악인이었고요. 그런 선배들을 만났으니 가슴이 얼마나 벅찼겠어요.”

도선사 일주문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는 사이 최오순은 2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또렷이 기억해내며 당시의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렸고, 곽명옥과 김순주는 자신의 기억에 맞을 때는 장단을 맞춰 주다가도 아니다 싶을 때는 “말도 안 된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1년에 한두 번씩 갖는 모임에서 에베레스트 때 촬영한 슬라이드를 상영해요. 장면마다 해석이 달라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탓도 있지만 각자 위치가 달랐기 때문에 입장도 달랐던 거죠. 명옥 언니는 대장과 부대장에 이어 ‘넘버3’라 매사에 힘이 있었지만 오순 언니는 12번, 저는 막내인 14번이었거든요. 대장과 한 텐트를 썼으니 다른 대원에 비해 스트레스를 더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래도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아~ 그리워라, 오~ 옛날이여어~.”

도선사 뒤 계곡은 눈이 전혀 녹지 않은 상태였다. 산길을 따라 10분쯤 걷다가 바위지대를 만나자 곽명옥은 “저 상궁바위는 인수봉 등반 마치고 하산할 때마다 들르던 훈련바위였다”며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강추위 덕분에 열흘 전 내린 눈이 전혀 녹지 않은 계곡길을 따라 용암문에 올라서자 한낮의 햇살을 받은 노적봉은 유난히도 반짝이고, 멀리 대남문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도 기운이 넘쳤다. 등산로를 벗어나 산성 길을 따라 능선마루에 올라서자 오른쪽으로 병풍암이 형성된 용암봉이 바라보였다.

“1981년에 북한산장에 있는데 난리가 났어요. 학생들이 다 죽게 생겼다면서요. 저희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급히 용암봉에 올랐어요. 학생 네댓 명이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지 뭐예요. 저체온 증상이었어요. 따귀를 후려갈겨도 정신을 못 차렸으니까요. 그래서 한 명 한 명 업어서 내렸어요.”

곽명옥씨는 영화 ‘마운틴’을 보고 전문 등반에 매력을 느끼던 터에 1980년 백운대 정상에서 인수봉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을 보곤 곧바로 암벽등반에 입문했다.

“전문등반을 잘한다는 한넝쿨산악회였어요. 그런데 겨울이라고 바위를 안 하지 뭐예요. 그래서 선배들을 졸랐더니 아직 춥고 눈이 많은 2월에 숨은벽으로 데려갔어요. 손이 엄청 시렸어요. 내 손인지 남의 손이지 모르고 올랐으니까요. 제가 너무 독하게 바위 하니까 남자 동기들이 다 떨어져 나가더군요.”

곽명옥은 1986년 북한산 코끼리크랙에서 열린 전국암벽등반대회에서 2위를 하고, 이듬해 내연산에서 열린 전국암벽등반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86년부터 여러 해 동안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가 1989년 막강한 남자 대원들이 주축인 대한산악연맹 안나푸르나원정대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뛰어난 등반 기량 때문이었다.

“처음 참가한 제5회 대회 때는 연희(서울시산악연맹 교육기술위원장) 언니한테 우승을 뺏겼어요. 저는 인수파인데 선인파한테 지니까 너무나 화가 났어요. 그래서 한 해 동안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죠. 솔직히 말하자면 두 대회 다 여성부는 대여섯 명밖에 참가하지 않았어요, 호호.”

곽명옥에 비해 최오순과 김순주는 에베레스트 원정 직전까지 새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김순주는 에베레스트 훈련 도중 대학을 졸업한 앳된 산아가씨였고, 최오순 역시 서열이 12번째이다 보니 늘 궂은일과 뒤치다꺼리 담당이었다. 특히 카메라는 지금도 이가 갈릴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다.

“캠코더 담당이었어요. 정상 올라갈 때도 제 몫이었고요. 촬영하느라 워낙 애를 먹은 까닭에 원정을 다녀온 뒤 카메라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훈련할 때 바위 잘하는 명옥 언니 보면 정말 부러웠어요. 오늘 만경대 리지는 언니가 앞장서는 거 맞죠?”

“한때 날리던 바위꾼”이라며 곽명옥을 극찬하는 최오순은 산행 전 “저길 어떻게 올라가냐”며 엄살을 부리면서도 흰 눈 덮인 북한산을 바라보는 표정은 환했다. 최오순은 새내기 산꾼 시절부터 힘 하면 알아주는 여성 산악인이었다. 고창군 무장면 영선종합고 산악부 시절 선운산 도솔암에서 바위를 타다 스님한테 혼난 기억도 가지고 있는 최오순은 고교 졸업 직후 입사한 삼성전자 수원사업소 사내산악회에 입회한 다음 정승권등산학교를 통해 전문등반을 배웠고, 경기도산악연맹 산악구조대에서 활동하면서 고산등반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덕에 에베레스트 훈련이 한창 무르익을 때인 1992년 여름 천산산맥 최고봉 포베다(7,439m)를 등반하고, 칸텡그리(7,010m)를 등정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에베레스트 등반 통해 의젓한 산꾼으로 변신한 최오순·김순주


직장을 그만둔 것은 에베레스트 때문이었다. 최오순은 1992년 1월 첫 훈련 후 18명의 훈련대원에 선발되자 곧이어 실시한 훈련등반에 참가하려고 평생직장이나 다름없는 삼성전자를 그만두었다. 당시 회사 규정상 휴가를 3일까지 신청할 수 있었고, 제2차 훈련등반은 그보다 하루 더 긴 3박4일이었다. 하지만 1차 훈련에서 선발된 18명 중 10명을 추려낸다는 2차 훈련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2차 훈련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둔 덕분에 그 해 봄 전지훈련차 나선 임자체(6,119m)-로부제(6,183m) 등반에 참가할 수 있었고, 같은 해 여름 돌비알산악회의 천산산맥 원정에도 동행할 수 있었다.

“넉 달간 합숙훈련할 때 새벽 5시에 일어나면 도봉동 합숙소에서 도봉산을 오르내리면서 몸을 풀고 각자 근무처로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새벽녘까지 회의를 했어요. 7시30분을 넘어서 들어오면 저녁밥을 주지 않을 만큼 규율이 엄했어요. 휴가라곤 막판에 1박2일이 전부였고요. 주말이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불암산에서 출발해 수락산과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거쳐 구기동으로 내려서기까지 당일 종주한 게 몇 번인지 헤아릴 수가 없어요. 중간에 인수봉에서 무거운 짐을 메고 주마링 연습을 한 적도 부지기수였고요. 저와 명옥 언니가 20kg쯤 멨다면 순주는 25kg 아니 30kg은 멨을 거예요. 힘이 좋은 데다 대원 14명 중 막내였거든요.”

김순주는 에베레스트 1차 훈련 당시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구가톨릭대 산악부 시절 이미 항우장사급 남자 못지않은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말 산행은 물론이고 방학 때는 20일치 식량과 장비를 짊어지고 산을 탔고,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해 또다시 배낭을 싸 들고 설악의 암릉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대학 2학년 때 바위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등산학교에 이어 암벽반까지 나오는 등 열혈 여성 산꾼이었다.

“순주는 정말 날아다녔어요. 선파워였어요. 3차 공격 때 사우스콜에 가장 먼저 올라선 뒤 세 차례나 내려와 그 다음에 올라온 현옥 언니, 그 뒤를 이어 저, 그리고 막판에 올라온 정건의 배낭까지 모두 받아주었으니까요.”

함께 정상에 오른 최오순은 “당시 에베레스트 정상 가는 길이 너무도 쉬웠지만 그래도 김순주의 체력은 정말 대단했다”며 혀를 찼다. 뛰어난 체력을 지닌 김순주는 1993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 세 차례의 정상공격조에 모두 참가했고, 그 바람에 해발 8,000m 높이의 사우스콜에 세 번이나 올라섰다.

“도봉산팀에서 합숙훈련할 때 거의 매일 루트에 대해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에베레스트를 가기도 전에 이미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남동릉 루트가 머릿속에 정확하게 들어 있었죠. 그래서인지 쉬웠어요. 정상 공격하는 날에는 산소 마스크를 입에 무니까 컨디션이 너무 좋아지는 거예요. 다른 원정대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는데 모두 추월했어요. 가장 험하다는 힐러리 스텝도 짧은 바윗길이다 싶었고요. 한참 올라가다 가만히 서 있는 셰르파를 보고 ‘쟤가 왜 저기 서 있지?’ 궁금했는데 다가서니까 꼭 껴안는 거예요. 성공했다면서요. 거기가 정상이었어요. 그땐 정말 무서운 게 없었던 것 같아요.”

하산 길에 김순주는 곤욕을 치렀다. 눈보라에 짙은 안개가 끼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글을 벗었던 게 화근이었다.

“사우스콜 캠프에 정말 힘들게 내려섰어요. 셰르파가 캠프를 하나 더 내려서자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하산하다 보니 체력이 많이 고갈돼 있었고, 눈이 너무 아파서 셰르파가 더 내려가는 게 낫다고 몇 차례나 얘기했지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 이튿날 날이 밝자 현옥 언니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순 언니한테 하산 길에 들어선 외국 클라미어와 동행하라며 등정 필름을 전해주었어요. ‘너만은 꼭 살아 내려가 우리의 등정 사실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 우리가 여기도 지나가긴 갔어요?”

용암봉 암릉은 온통 눈에 덮여 있었다. 딱 한 사람 발자국이 찍혀 있었으나 클라이밍 다운해야 하는 크랙을 앞두고 족적이 끊겼다. 김순주는 오른쪽 눈 일부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며칠 전 아들 둘 데리고 빙벽 등반에 나섰다가 깨진 얼음에 맞으면서 실핏줄이 터진 흔적이었다.



한 해 간격으로 5대륙 최고봉 완등에 성공

“요즘 들어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잘하도록 신경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산이 조금 시들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북한산에 오니까 산 밑에서부터 가슴이 설레네요. 꼭 에베레스트 훈련 등반에 참가하는 기분이에요. 이러다 다시 산에 빠져드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김순주는 에베레스트 등반 후 한동안 고산등반을 멀리했다. 1년 반이란 긴 시간 동안 에베레스트 등반에 몰입하느라 사회생활을 너무 등한시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얀 산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1995년 초오유-시샤팡마도 원정 갈 기회가 있었는데, 대학 은사이자 산악부 지도교수였던 고 강명구 교수님이 산도 좋지만 사회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 때문에 포기했어요. 하지만 스물 아홉 나이가 되니까 서른 되기 전에 세상을 실컷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그녀가 찾고 싶은 세상은 도시도 평원도 아닌 산이었다. 1997년 그녀는 경북연맹 원정대원으로서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정상에 올랐다. 그리곤 그 해 가을 초모랑마(8,848m) 원정에도 동참했다. 하지만 세계 최고봉 초모랑마에서는 그녀를 끔찍이 아껴주던 선배가 눈사태로 목숨을 잃는 사고를 겪어야 했다. 그 일로 마음이 허전해 있을 때 후배가 아프리카로 데려다 달라 부탁했다. 그러자고 했다. 그리곤 50일간의 긴 여행 동안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도 오르고, 케냐와 탄자니아 곳곳을 둘러본 다음 인도를 거쳐 귀국했다.

최오순도 가만히 지내지 않았다.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온 뒤 복직한 최오순은 이듬해 여름 또다시 사표를 내고 돌비알산악회 원정대의 매킨리 원정에 참가했다. 오순은 그 원정에서 기대했던 남벽 등반에 참가하지도 못한 채 캠프 철수를 위해 C1에 올라섰다가 낙석에 맞아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만 당한 채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머문 앵커리지에서 만난 선배의 도움으로 다시 등반에 나서 매킨리 정상에 올라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최오순은 이듬해 1995년 인도의 차우캄바2봉 원정에도 나서는 등 끊임없이 고산등반에 몰입하는 듯했으나 1996년 12월 중순 역시 산꾼인 가의용(43·경기도산악연맹 산악구조대)씨와 결혼한 뒤 경제적인 안정을 갖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고 1999년 태어난 첫 딸 지원을 키우느라 한동안 산을 멀리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김순주 역시 매킨리와 초모랑마를 함께 등반했던 선배 하찬수(41·계명대 OB)씨와 결혼한 이후로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 역할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은 원초적 본능이 움직이고 온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결심은 막내 김순주가 먼저 했다. 그리곤 최오순에 이어 늘 맏언니 같이 포근한 곽명옥에게도 전화했다.

“언니들, 산에 한번 가지 않을래요?”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지현옥 대장 5주기 추모식 때 나온 얘기였다. 최오순과 김순주 두 사람은 버스편이 끊어지는 줄 모르고 계획을 세웠다. 남편들도 흔쾌히 즐겁게 등반하고 오라 했고, 김순주는 부모님께서 아이들 봐주시겠다며 딸의 해외 산행에 적극 협조해주셨다.

“저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친 뒤 먹고사는 일에만 충실했어요. 인사동에 맥주집도 차려보았고요. 지금 근무하는 을지병원에서 휴가를 내어 미국에 있을 적에 순주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그땐 그냥 알았다 했는데 귀국해서 보니까 벌써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 안 가겠다고 할 수가 없었어요. 비행기표 석 장 외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출국했어요. 아무튼 저는 중간 산장에 도착했을 때 머리가 너무 아파 고생만 하다 내려왔어요.”

엘브루즈 원정에 나설 때는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온 지 11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에베레스트의 인연은 여전히 세 사람을 끈끈이 묶어 주고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비행기표만 끊어갔고, 모스크바에서 만나 도움을 받으려 했던 한국인이 자리를 비워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오순 언니는 등반을 마친 뒤 아줌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이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어요. 아무튼 명옥 언니로선 힘든 등반이었어요. 동네 뒷산도 다니지 않을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고소 때문에도 애를 많이 먹었고요. 공항에서 소주 몇 병 산 것 외에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요. 가이드가 말이 안 통하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다른 걱정이 뭐가 있었겠어요. 각자 경비를 냈고 모자라면 언니가 내면 되는 걸 말이에요(웃음). 정상에 오를 때까지 너무나 즐거웠어요. 등반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사실 에베레스트 원정 때는 너무 많이 시달렸거든요. 애초에 여자 대원들끼리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는데 수시로 남자들이 껴드는 바람에 갈등이 많았어요.”

엘브루즈에 오르자 은근히 5대륙 최고봉 등정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마침 김순주는 아콩카구아(6,959m)만 남겨놓고 있던 터라 내친 김에 그 해 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오순은 출국을 열흘쯤 남겨놓고 추돌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언니가 퇴원한 후 괜찮다고 해서 대구 집에서 짐 싸 들고 나와 서울의 명옥 언니 집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새벽 공항으로 가려는데 전화가 왔어요. 어지러워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말이에요. 달팽이관이 흔들리는 바람에 평형감각을 잃었던 거였어요. 그래서 2년 뒤인 2006년에 아콩카구아를 등반하게 된 거예요. 참, 그때 베이스캠프에서 만났잖아요.”

2006년 12월 말 아콩카구아 베이스캠프에서 만난 최오순과 김순주는 함께 원정온 선배들에 앞서 정상에 올라선 뒤 베이스캠프에 내려와 있었다.

“제1캠프에 짐을 올려놓았는데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불던지 다 날아갔을 것 같아 확인차 캠프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멀쩡하지 뭐예요. 그래서 하룻밤 자고 둘이서 밀어붙였고, 정상에서 사진 한 장씩 찍곤 그 날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어요. 에베레스트에서 등정한 날 가장 많이 내려오는 게 좋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어요. 그게 몸에 좋거든요.”

김순주는 그 등반으로 5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최오순도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5대륙 최고봉 완등자가 되었다. 이후 세 사람은 고산 원정은 나서지 못하고 있지만 각자 산악활동을 하고 있다. 곽명옥은 대한산악연맹 재무이사로 대산련 행정의 중추를 이루고 있고, 대한산악연맹 교육기술위원인 최오순은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교무로 근무하면서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대한적십자사 응급처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요즘도 가족과 함께 비박산행을 하고 겨울이면 빙벽에도 매달리곤 하는 막내 김순주는 포항지역의 미술관에서 봉사하면서 지난해 가을 숲해설가 과정을 수료했다. 경북수목원에서 숲해설가로 활동하는 게 그녀의 작은 꿈이다.


“언니, 알죠? 계획 세우면 일사천리로 진행한다는 거”

만경대 암릉 산행은 용암봉 서쪽, 일명 ‘피아노’ 구간에서 막을 내렸다. 손으로 잡고 이동하는 바위턱에는 눈 한 점 없었지만 발로 밟아야 하는 사면은 눈이 두텁게 쌓여 오랫동안 바위를 찾지 않은 세 사람에게는 무리다 싶었다.

60m 자일로 두 차례 하강해 위문~용암문 산길로 내려섰다. 모처럼 북한산을 찾은 김순주는 용암문을 거쳐 곧장 도선사로 하산하자는 곽명옥의 말에 백운산장에서 과메기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 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너는 포항사람들 즐겨 마시는 소주 한 병은 가져 와야지 이게 뭐니? 과메기만 어떻게 먹으라고.”

김순주는 용암문을 빠져나가기 전 “참, 과메긴 먹고 가야지. 애아빠랑 과메기랑 파, 마늘, 고추를 밤새 다듬고 초고추장까지 만들어왔는데” 하며 배낭 안에서 비닐 봉지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언니 먼저, 아우 먼저 하며 고추장을 바른 과메기와 파·마늘을 김에 돌돌 말아 서로 입에 넣어주었다.

“언니? 엘브루즈 때 돈 많이 안 썼죠? 이번에 저희가 계획 세우면 한 번 제대로 써 봐요. 3년 뒤 여성 에베레스트 등정 20주년을 기념해 등반이든 트레킹이든 나가야 할 거 아니겠어요? 알죠, 저희 둘이 계획 세우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거.”

막내의 은근한 협박이었다. 그러자 언니 입에 넣어주려고 김에 싼 과메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있는 최오순은 빙그레 웃고, 곽명옥은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까짓것 해보지 뭐” 하며 후배들의 새로운 음모에 기꺼이 가담할 표정을 지었다. 

곽명옥

한넝쿨산악회
대한산악연맹 재무이사


1987년 제6회 전국암벽등반대회 여성부 1위
1989년 동계 안나푸르나 등반
1993년 에베레스트 등반
2004년 엘브루즈 등반


대한민국 체육포장(1994년)


김순주

대구가톨릭대학교 산악회
경북ECO가이드
경북숲해설가협회 숲해설가


1992년  로부제 등정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
1997년  매킨리 등정
            초모랑마 등반
            킬리만자로 등정
2004년 엘브루즈 등정
2006년 아콩카구아 등정
 
기린장(1994년)


최오순

경기도산악연맹 산악구조대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교무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전임 강사
대한산악연맹 교육기술위원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대한적십자사 응급처치 강사


1991년 일본 북알프스 원정
1992년 임자체(등정)-로부제 원정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
1994년 매킨리 등정
1995년 차우캄바2봉 원정
2004년 엘브루즈 등정
2006년 아콩카구아 등정
2007년 킬리만자로 등정


기린장(1994년)


-  글 / 한필석 차장 / 사진 허재성 기자 / '월간 산' 2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