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 법정 스님, 길상사에서 입적, 순천 송광사에서 다비식. *-

paxlee 2010. 3. 17. 22:37

 

  '무소유' 저자 법정 스님, 길상사에서 입적, 순천 송광사에서 다비식.

법정스님/조선일보 DB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법정 스님(78)이 3월 11일 오후 1시 52분쯤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 지병으로 치료를 받아온 법정(法頂)스님은 이날 낮 입원 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서 자신이 창건한 사찰인 성북동 길상사로 몸을 옮겼다. 입적을 앞두고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법정 스님은 지난 2007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 왔으며, 최근 병세가 위중해져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를 비롯해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997년에는 길상사를 창건해 2003년까지 회주를 맡았다. 법정스님은 이 곳에서 대중법문을 해왔다. '무소유'를 강조한 법정스님의 언행은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스님이 마지막 남긴 말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내가 이번 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하겠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고 했다고 길상사 신도모임 ‘맑고 향기롭게’ 측이 이날 밝혔다. 조계종 측은 법정 스님이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도 남겼다고 전했다. 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 또한 “내게 신문을 배달하던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법정스님의 장례의식은 13일 오전11시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행해졌다. 이날 신도모임은 간소한 장례를 치뤄달라고 한 법정 스님의 뜻을 전했다. 법정 스님이 바란 자신의 다비식 모습은 이렇다.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도 말라.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달라.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아쉬운듯 모자라게 살아야 행복"

 

“적게 보고 적게 듣고 필요한 말만 하면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불교계 원로인 법정(法頂) 스님은 서울 성북동 길상사(吉祥寺)에서 가진 봄 정기법회에서 “정보과잉의 시대는 삶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를 빼앗아간다”면서 “행복해 지려면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법정스님은 신도 1천여 명이 법당과 앞마당을 가득 채운 이날 법회에서 “나무마다 꽃과 새잎을 펼쳐내는 봄날 우리는 이렇게 마주 앉아 생애의 한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면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서로 눈길을 마주하고 인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직접적인 만남”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것은 정보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접속과 접촉은 비슷한 말인지 몰라도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차디찬 기계를 이용한 간접적 만남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진정한 정을 주고받기 어렵습니다. 휴대전화, 컴퓨터, 텔레비전 등 편리한 정보수단을 갖고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자리를 빼앗기 때문에 과다한 정보는 오히려 공해가 됩니다.”

법정스님은 “신속한 기계매체에 길들어 뭐든지 즉석에서 끝장을 보려다 보니 세상이 살벌해지고 자살자도 늘어난다”면서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참고 기다리는 미덕을 잃게 되면 자기 자신이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되며, 그럴 때 문명의 이기는 흉기가 된다”고 말했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고인 다음에 만나야 친구와의 살뜰한 우정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뷔페식당에서 한 가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다른 음식을 먹을 욕구가 생기지 않고 음식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도 없게 됩니다. 삶의 진짜 맛을 느끼려면 모자란 듯 자제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법정스님은 “생활도구에 종속돼 본질적 삶을 잃어버리면 내면을 가꾸는 것보다 외양에 치중하거나 남의 삶을 모방하게 된다”면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만의 얼굴을 바꾸려는 성형수술이야말로 남의 삶을 모방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어 “얼굴은 ’얼의 꼴’이어서 각자 인생의 이력서와 같아 아름다움의 표준형이 있을 수 없다”면서 “덕스럽게 살면 덕스런 얼굴이 되고 착하게 살면 착한 얼굴이 되는 법인데 사람들은 그런 본질적인 것을 잊고 산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한 것들은 마치 필름처럼 마음속에 저장됐다가 다음 행동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업(業)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집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적게 보고 적게 들으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이 찬란한 봄날 꽃처럼 활짝 열리십시오.” 강원도 산골에 혼자 살면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법정스님은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열리는 길상사 정기 법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설법하고 있다.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가 된 사연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린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예전 서울의 대표적 요정이었던 성북동 대원각. 현재는 승보종찰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조선일보DB
김영한씨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000여평(당시 시가 1000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명의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14일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창건 후 회주(법회를 이끄는 어른스님)를 맡아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들려줬다. 2003년 12월 회주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해왔다. 이어 생의 마지막 시간도 길상사에서 보냈다.
 
법정스님, 송광사 다비식 거행
 

'무소유' “스님, 불길 속에서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11일 입적(入寂)한 법정(法頂) 스님이 13일 오전 불꽃 속에서 금생(今生)의 인연을 마감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13일 오전 11시 40분쯤 전남 순천 송광사 경내 조계산 자락에서 엄수됐다. 스님의 유지대로 군더더기 없는 간소한 예식이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온 추모객 1만 5000여명은 조계산을 가득 메우며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전날 오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스님의 출가 본사(本寺)인 송광사로 옮겨진 법정 스님의 법구(法軀)는 이날 오전 10시 안치됐던 문수전을 나섰다. 송광사 경내에는 범종(梵鐘) 소리가 108번 은은히 울려 퍼졌다. 서울에서 옮겨온 모습 그대로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 가사를 덮은 채였다. 위패와 영정(影幀)사진을 앞세운 법정 스님의 법구는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다비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추모객들은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 다비식 역시 간소했다. 만장(輓章)도 없었고, 추모사, 조사(弔辭)도 일절 없었다. 다비장은 문수전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산중이었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히 숲을 이룬 가운데 다비장이 놓일 장소만 정리된 상태였다. 스님의 법구가 놓일 자리엔 장작더미가 놓여있었다.

 

오전 11시 10분쯤 스님의 법구가 다비장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던 추모객과 법구를 따라온 신자들의 “나무아미타불” 염송 소리는 더욱 커졌다. 다비장에 도착한 스님의 법구 위엔 참나무 장작이 겹겹이 쌓였다. 어른 키높이 정도로 장작이 쌓였을 때가 오전 11시 40분쯤. 흰 국화 몇 송이가 장작더미 위로 던져졌고, 이어 상좌 스님 등이 불을 붙였다. 다비장 주변 골짜기를 가득 메운 추모객들은 일제히 “스님, 불 들어 갑니다. 어서 나오세요”라고 외쳤다.

 

불꽃은 이내 장작더미를 삼켰다. 신도들의 “나무아미타불” 염송은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상좌 스님들도 눈물을 훔쳤다. 5분쯤 지나 불길이 활활 피어오르자 반야심경 염송을 마지막으로 공식 다비식은 끝났다. 법정 스님의 상좌인 덕현 스님(길상사 주지)는 추모객들에게 “스님은 가셨지만 불길 속에서 스님의 남기신 참뜻은 연꽃처럼 피어날 것으로 믿는다”며 대중들과 함께 “화중생연(火中生蓮)”이라고 외쳤다.

 

스님의 다비식은 12시 10분쯤 끝났지만 많은 추모객들은 계곡에 그대로 남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었다. 송광사는 14일 오전 10시쯤 불이 꺼진 후 스님의 유골을 수습할 예정이다. 다비준비위원회 대변인 진화 스님은 브리핑을 통해 “스님의 유골은 그대로 함에 담아 상좌 스님들께 전달할 예정이며 산골(散骨)할 장소는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글  /  이재호 기자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