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제주인 삶속에 투영된 일곱가지 돌문화 *-

paxlee 2011. 12. 20. 21:35

 

                      제주인 삶속에 투영된 일곱가지 돌문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 제주도는 올 때마다 이국적인 인상을 줍니다. 가운데 큼지

막하게 솟은 한라산과 땅 덩어리에 무덤처럼 들쑥날쑥 솟은 오름들은 정말로 제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희한한 광경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오름들은 수가 무려 삼백육십

여개로 세계에서는 가장 기록적인 숫자라고 합니다.

 

                                  

 

이들 기생화산들은 신생대 3기말에서 4기초 한반도가 화산활동을 일으킬 때 한라산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3∼5만년이라는 숫자를 가늠하기란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사방에서 하늘을 향해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광경을 말입니다. 지천으로 널린 저 시커먼 돌들이 바로 그때의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굳어져 버려 생겨난 물건이란 걸 생각해보니 수만년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에 갑자기 아득해져옵니다.

 

저나 선생님이나 한점 먼지로도 존재하지 않았을 시간이 아닙니까. 이 돌이 제주사람들 생활 속에 아주 특이하게 이용된 걸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밭담’이니 ‘산담’이니 하는 돌로 만들어진 각종 경계선이 그 하나입니다. 산담이란 무덤 울타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아마 이승과 저승의 경계쯤 되겠지요. 콘크리트 일색인 육지와는 달리 가는 곳마다 만나는 이들 돌담은 독특한 풍색을 자아냅니다.

 

돌탑을 쌓고 꼭대기에 동자석을 세워 마을을 지키게 했던 ‘거욱대’와 소금을 만들던 ‘돌소금밭’,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안전하게 집으로 인도하기 위해 세웠던 ‘도대(표준어로 등대를 뜻하는 제주도 말입니다)’ 등은 보지는 않았지만 말만으로도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돌 하면 대표적인 것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돌하르방’입니다. 돌이 이용된 건 생활속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고려시대 몽고때부터 외침을 받아온 제주사람들은 이 흔한 돌을 이용해 방위시설을 만들었는데 ‘연대(煙臺)’ ‘봉수대’니 하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해안가 고지대에 세운 연대는 연안에 적이 나타나면 연기를 피워올려 오름에 세워놓은 ‘봉수대’로 연락해 제주도 전체가 적과 맞서 싸울 태세에 들어가도록 했다는 겁니다. 봉수대의 수는 무려 24개, 연대는 38개가 제주도에 있었다고 합니다.

온평리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환해장성도 방어유적의 하나고요. 콘크리트 보도블록에 어쩌다 굴러 다니는 돌이 화풀이의 대상으로 걷어차이기 십상인 도시와는 달리 이곳의 돌은 꽤나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것을 듣고 나니 저 구멍 숭숭 뚫리고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현무암 덩어리가 새삼 눈물겹도록 정겹게 느껴집니다. 이번 기회에 생활 속에 깃든 독특한 돌문화의 흔적들을 찾아볼 작정입니다. 제주의 돌문화를 집약해 놓은 안내책자가 아직 출간된 적이 없는지라 찾아다니는 여정이 쉽지 않으리라 걱정도 되지만 다행히 봄볕 부서지는 제주 들판은 하냥 헤매고 다녀도 좋을 정도로 유혹적이거든요.

 

과학적이고 인간적인 돌담 미학

 

10만분의 1 제주도 지도를 펼쳐놓고 가야할 곳을 표시해놓고 보니 대부분 해안 가까이 분포해 있는 걸 발견합니다. 한라산 자락에서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해안 가까이에서 솟아나왔으니 삶터도 그곳이겠지요. 저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땅을 동서로 나눴습니다. 한라산이 제주땅의 중심인만큼 제주에서는 언제나 한라산이 기준입니다. 서쪽을 먼저 둘러볼 작정인 저는 제주시내에 숙소를 정하고 있던지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슬러오르기로 계획을 잡았지요.

 

서부산업도로를 타고 한라산 산록을 넘어 한달음에 도착한 곳은 추사적거지(秋史謫居地)가 있는 대정읍 안성리였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니 긴 성벽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대정읍성입니다. 조선시대 3주현(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성의 하나로 제주 서남쪽을 관할하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지요. 첫방문지 치고 안성리에는 볼거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추사적거지는 물론이고 군데군데 남아있는 성벽과 골목 어귀에 서 있는 하르방만도 모두 12기나 되니까요.

 

저는 맨 먼저 제주말로 ‘올레’라 부르는 ‘골목’이 도대체 어떤 모양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적거지 건물 뒤쪽으로 들어서면 비뚤비뚤하게 쌓아올린 돌담이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듯 S자로 굽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매우 성의없이 쌓은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는 대문이 없는 제주도 가옥 구조상 사생활을 보호해주도록 구불구불한 돌담이 안채나 뒷간 같은 은밀한 부분을 가리도록 만든 것이라 합니다. 현무암으로 쌓아올린 돌담은 정확히 맞물리지 않아 군데군데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데다 높이는 작은 키에 속하는 제게도 가슴께까지 올 뿐입니다.

 

이 역시 이유가 있더군요. 낮은 키는 사시사철 몰아치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최대 높이고 구멍이 생기도록 쌓은 것은 바람의 통로를 내주어 폭풍이 불어도 끄떡없이 해준다는 것입니다. 또 큰돌과 작은 돌이 층층이 엇갈려 쌓여 있는데 이는 큰돌이 작은돌을 눌러 잘 맞물리도록 한 것이랍니다. 결국 낮은 높이로 집안을 가려주기 위해 비뚤거리게 설계한 것이 아닌가요. 과학적이고 인간적인 설계에 놀랄 따름입니다. 올레를 한바퀴 돈후 하르방 구경을 잠시 미루고 추사적거지로 들어섰습니다.

 

김정희선생이 9년간 기거했다는 목거리(별채)의 서재는 한평쯤이나 될까요. 그 작은 방에서 고독과 벗하며 독자적인 추사체를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담장 아래에는 수선화가 노랗게 피어 있고요. 김정희선생이 무척 좋아하셨다는 꽃 말입니다. 비를 뿌릴 듯 습한 바람이 불어와 저는 서둘러 마을의 돌하르방 순례에 나섰습니다. 돌하르방을 찾아다니다보니 자연스레 마을을 한바퀴 돌게 됩니다. 이곳의 돌하르방들은 하나같이 장난기 있는 미소 띤 얼굴인지라 바라보는 저도 어느새 슬그머니 웃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성문밖마다 이 돌하르방을 세웠다는데 그 모양과 특징도 모두 다릅니다. 평균 키가 제주목의 하르방이 181센티미터, 정의현 것이 141센티미터, 대정현 것이 136센티미터이라 하니 저는 제일 작은 하르방을 본 셈입니다.

얼굴표정은 제주목의 것은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선지 근엄한데 기념품 가게에서 만나는 돌하르방들이 이를 표본으로 삼은 것이라 합니다. 반면에 정의현은 덤덤하거나 무뚝뚝한 소박한 표정이라 하고 이곳 대정의 것은 아이처럼 귀엽고 살가운 표정입니다.

 

현존하는 돌하르방은 대정현의 것이 12기 그리고 제주목 21기와 정의현의 것이 12 등 총 45기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돌하르방은 본디 몽고지배를 받던 13∼14세기경으로 추정하는데 이 돌하르방이야말로 제주의 질곡의 역사를 두눈 뜨고 말없이 지켜본 산증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을 액운 막는 수호탑 ‘거욱대’

 

이곳 안성리 추사적거지에서는 산방산이 아주 가깝습니다. 최근 나온 신경숙씨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서 읽은 산방굴이 인상깊었던지라 가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반나절을 벌써 써버렸지 뭡니까. 다음 행선지인 인성리의 ‘거욱대’로 곧장 갈 수밖에요. 돌을 원통형으로 쌓고 그 위에 얼굴 모양이 조각된 석상을 세워놓은 탑이 ‘거욱대’였습니다. 거욱대는 풍수지리상 기가 허해 액운이 들어올 법한 곳에 세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민간신앙의 장치인데 민속학자들은 ‘방사탑’으로도 부릅니다.

 

인성리의 거욱대는 본래는 4기였다는데 지금은 밭 한가운데 동서로 2기만 남아 있습니다. 이중 하나는 원형 그대로고 다른 하나는 새로 쌓아 반듯한데 낡고 초라한 옛것에 비하면 아무래도 자연스런 맛은 떨어집니다. 그후로는 이런 탑을 만날 때마다 그것이 거욱대란 걸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답니다.

점심을 먹는 사이 비가 한차례 지나갑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자구내 포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중반쯤이었습니다. 포구의 전경은 숨이 막혀버릴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억새로 가득 덮인 차귀도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고 자구내 북쪽의 당산에서 남쪽의 수월봉까지 해안 절벽은 켜켜이 주름진 단구지형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자구내의 전경은 수월봉에 올라 보면 훨씬 좋다고들 이곳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즘 자구내 포구에는 유명한 낚시터인 차귀도까지 강태공을 실어나를 배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구내 경치를 얘기하느라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저는 ‘도대’를 보러 갔던 것이지요. 도대는 등대입니다. 고기잡이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어부를 위해 포구의 위치를 알려주느라 지어미가 등불을 꼭대기에 올려놓던 등대입니다.

 

마을사람들이 함께 사용한 이 도대는 거욱대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문화를 대표하는 돌문화의 하나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구내의 도대는 시멘트로 군데군데 발라놓아 제 원형을 갖고 있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구내에서 9킬로미터 가량 달려간 두모리 바닷가에서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도대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사각면체의 도대는 꼭대기에 등불을 얹어놓을 수 있는 등꽂이가 튀어나와 있고 또 꼭대기에 키가 닿을 수 있도록 계단이 서너칸 달려있는 두모리의 도대야말로 원형이라 합니다. 그 도대 앞에 서니 등불을 내걸고 지아비를 기다리며 밤바다를 지켜보는 여인의 모습이 자연 상상이 됩니다.

 

소금 귀해 바닷물에 배추 절이고

 

시간이 늦어 애월리 연대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지나가야 했습니다. 다음날은 제주 동쪽을 가기로 돼있었기에 구엄리 돌소금밭만은 꼭 둘러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소금밭은 애월읍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제주시쪽으로 5분여를 가다 도로변에서 ‘구엄리 염전’이라 쓴 안내 표지석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이긴 하지만 염전을 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 예로부터 ‘소금 독이 가득하면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다니 믿기지 않으시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소금을 육지에서 사와야 했으니까요. 겨울 김장을 하려면 배추를 바닷물에 하룻밤을 담가뒀다가 이튿날 건져내어 등짐으로 나르는 일을 연례행사처럼 했다니까요. 구엄리 염전은 1945년경 자취를 감췄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소금을 만드는 일을 생업의 하나로 했다고 합니다. 이 일대 펼쳐진 해안가의 평평한 바위위에 밭처럼 구획을 나누고 이곳에 바다물을 퍼다부어 햇볕에 졸여 소금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다행히 제주의 여름 햇빛은 육지와는 달리 바늘이 살갗을 찌르는 듯 강렬하다는군요. 하지만 재현해 놓은 소금밭을 보노라니 이렇게 해서 소금을 얼마나 얻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은 비슷한 것 같지만 생소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아마 여행의 묘미는 이런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님! 이제 내일은 실속 있는 돌문화 답사의 마무리를 위해 다음날 저는 동쪽으로 떠나려 합니다. 이생진시인의 ‘그리운 성산포’가 기다리는 성산읍으로요. 성산 일출봉을 보고돌아오면서 하도리 바닷가에서 잠시 차를 멈췄습니다. ‘원’이라는 ‘돌그물’이 바닷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안에 돌턱을 둘러놓아 밀물에 밀려들어온 물고기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해 자연스레 잡히도록 만든 말 그대로 돌그물입니다. 어떤 날은 많고 어떤 날은 적었겠지요.

 

또 폭풍이라도 오는 날이면 허탕이었겠지요. 그래서 건져올리는 물고기이니 어부의 마음도 죄책감이 적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욕심 내지 않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어부의 소박한 심성을 생각하니 제 기분까지 좋아집니다. 그 흐뭇한 마음으로 저의 마지막 답사지인 ‘김녕미륵당’으로 향했습니다. 구좌읍 동김녕리와 동복리 사이 해안가에 있는 김녕미륵당엔 특이하게도 어머니가 아이를 업은 모양의 바위가 돌담 속에 모셔져 있습니다. 

 

윤동지라는 어부가 꿈속의 계시로 이 돌을 바다에서 건져올려 모셨다는 미륵입니다. 아마도 윤동지란 어부도 돌그물을 건져올리는 어부의 심성 같은 사람이었겠지요. 자연에 순응하는 소박한 지혜를 이 제주에서 맘껏 느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요.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저도 선생님을 뵈올 수 있을 것 같군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 글 <이정숙 기자> / 사람과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