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거 북벽 스토리
아이거 스토리는 아이거 북벽 이야기다. 새삼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은 데는 까닭이 있다. 어느 기회에 ‘우엘리 스텍’이라는 스위스 청년이 아이거를 두 시간 얼마 만에 올라간 책을 보았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화제의 주인공은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인물인데, 실은 그것보다 아이거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싶었다. 나는 물론 아이거를 오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이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아이거 등반에 관한 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그 유명한 하인리히 하러의 <하얀 거미>를 비롯해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개인의 등반기이며, 30일 또는 43일 걸려 오른 이른바 디렛티시마의 기록물들과, 토니 히벨러가 정리한 등반사인 <아이거 반트> 등인데, 모두가 특색 있고 소중한 아이거 이야기 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거 스토리 중에서도 압권은 힌터슈토이서와 토니 쿠르츠의 등반사고다. 1936년 옛날이야기나 아이거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남을 기록적이면서 너무나도 충격적인 알피니스트들의 이야기다.
누구나 아이거에 오르는 사람으로 이때 일을 하나의 등반사고로 받아들이고 만다면, 그는 알피니스트로서 적어도 아이거에 붙을 자격이 없다고 나는 본다. 아이거는 산악인에게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산’이 아니다. 3790m의 고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산’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벽’이다. ‘마운틴 아이거(Mountain Eiger)’가 아니고 ‘아이거봔트(Eigerwand)’며, 독일어 ‘노르드봔트(Nordwand)’가 원명이다. 사람들은 ‘노스페이스(North Face)’라는 상표를 누구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노르드봔트’에서 온 영어 이름인 셈이다.
우리는 안나푸르나 남벽이며 로체 남벽을 알지만, 이때 ‘남벽’이 그 산들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북벽’하면 그것은 으레 오직 아이거를 말한다. 즉, 북벽이 아이거의 대명사라는 이야기다.
내가 산악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초반인데, 그 무렵 히말라야나 알프스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어쩌다 <등정 앞으로 300미터>라는 책과 만났다. 일본 클라이머 2인조가 아이거를 오르는 이야긴데, 그때 파트너가 추락사 하고, 그 현장에 멀리 뮌헨에서 토니 히벨러가 비행기로 날아왔다. 1965년 이야긴데 나도 이때 아이거를 처음 알았다.
1921년 그 옛날, 일본의 마키 유코가 아이거 동산릉인 미텔레기 능선을 초등하면서 일본에 서구 알피니즘이 도입됐고, 아이거 북벽은 1938년 하인리히 하러 일행이 비로소 초등하자, 46년에 리오넬 테레이와 라슈날이 재등했다. 그러자 50년대에 세계 산악계는 아이거 동계등반에 눈을 돌려, 61년에서 63년 사이에 알프스 3대 북벽이 완등된다. 토니 히벨러의 아이거 북벽을 선두로 발터 보나티의 마터호른 단독 초등, 그리고 그랑드조라스를 리카르도 카신 3인조가 초등했다.
기록은 경신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며 역사는 전진하기 마련이다. 찬란한 알프스 3대 북벽 동계초등의 화제가 얼마 안가서 기상천외의 발상 앞에 희석되었다. 아이거 북벽 디렛티시마 즉, 직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게 <30일의 아이거>와 <북벽의 43일>이라는 책이 있는데, 전자는 66년 독·영·미 합동대의, 후자는 70년 일본 클라이머 8명의 아이거 동계 직등 기록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알프스와 단절되어 살고 있었다.
<30일의 아이거> 서두에 이런 글이 나온다. 알피니스무스(독일 등산 잡지)가 전 세계 정예 산악인에게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산을 물었더니, 그 속에 아이거는 들어있지 않았고, K2, 마터호른, 피츠로이, 몽블랑, 그랑드조라스 등이었다. 그러면 아이거의 매력은 어디 있는가? 산은 모두 조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웅대, 수려, 고고함 등이 저마다의 생김새에서 온다. 이렇게 볼 때 아이거는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한마디로 암울한 인상이다.
지난 세기 50년대를 산 독일의 투이스 트렌커가 산악인의 10계명을 쓰며, 산악인은 기록을 추구하지 말고 영혼을 찾으라고 했는데, 그는 아이거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보고, 아이거에 오르려고 하는 것은 광기라고 말했다. 산은 고산일수록 등반에 커다란 변화가 있기 마련이지만, 아이거 북벽에서는 기상과 시간에 따라 유수, 낙석과 눈사태의 영향이 너무나도 크고 심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거만큼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도 없다. 물론 아이거 도전자가 이런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겠지만, 그러한 인간적 노력과 자신감은 대자연의 횡포 앞에 그다지 자랑거리가 못된다.
아이거 북벽에는 도전자들의 사투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져 있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죽음의 비박’이며 ‘힌터슈토이서 쿠베르강’ 등이 그것인데, 인간 드라마가 연출된 현장이 이렇게 고유명사로 남아있는 곳을 나는 아이거 외에 모른다. 그것은 ‘머메리 릿페’나 ‘힐러리 스텝’과도 다르다.
오늘날 아이거의 힌터슈토이서 쿠베르강은 고전적 등반 루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지만, 그 뒤 이 지점에서 등반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행한 일인데, 여기를 지나가는 수많은 클라이머의 대열이 1936년 7월 며칠 사이에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제대로 알고, 당시를 회상하며 묵념이라도 하는 자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아이거 북벽이야말로 비극과 영광이 그대로 기록된 곳이다. 그런 곳에 느닷없이 곡예사와 같은 놀음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로 여길 수밖에 없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의아하고 한편 마음이 우울해진다. 최근에 그 클라이머가 쓴 책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제목이 바로
메스너가 ‘등산은 병인가’라고 했지만, 이제 알피니즘은 병들고 있다. 그리고 그 병은 약이 없고 ‘광기’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단독 등정을 성취하고 돌아온 헤르만 불을 최종캠프에서 맞은 한스가 등정 여부를 묻지 않고 살아 돌아와 기쁘다며 친구를 껴안았다. 아이거에서 일행 셋이 모두 죽고 혼자 3일 동안 자일에 매달려 악전고투 하다, 그제야 접근한 구조대와 피켈하나 사이에 숨을 거둔 토니 쿠르츠의 마지막 말, “이제 끝이다(Ich kann nicht mehr)”가 들리는 것 같다.
아이거의 매력은 영광과 비극의 무대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아이거가 곡예사의 놀이터가 되는 날 그 1800m 직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아이거의 매력은 영광과 비극의 무대이다.
- 글 김영도 _ 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 / 사진 허긍열 알프스 통신원 / 월간 마운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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