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서울의 다방…명동의 '가무' · 청계천 '명보다실'서 찾은 추억

paxlee 2014. 10. 3. 23:01

 

서울의 다방…명동의 '가무' · 청계천 '명보다실'서 찾은 추억

 

커피 한 잔에 무려 300원… 70년대 明洞 다방의 콧대를 '별다방'은 알기나 할까?

 


	15일 오후 서울 명동에 있는 ‘가무’를 찾았다. 42년째 한 자리에서 커피가 끓고 있다. 멋 좀 아는 당대 ‘귀한 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 한다.
15일 오후 서울 명동에 있는 ‘가무’를 찾았다. 42년째 한 자리에서 커피가 끓고 있다. 멋 좀 아는 당대 ‘귀한 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 한다.

 

방(房), 입이 둥글어진다. 따뜻한 입김이 발음을 감싼다. 씨방이나 유방처럼 방 하나 품었을 뿐인데 체온이 아늑한 단어가 있다. 어디선가 무럭무럭 시간을 잉태하고 있을 것만 같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낯선 가을, 어느 방이든 들어가 씨앗처럼 의자에 푹 잠기고 싶을 때,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열었고, 시인 이상이 사랑했으며, 숱한 예술과 멋의 첨단이 떠들고 작당을 벌이던 자리. 다국적기업의 무수한 카페 거리를 지나 당도했다. 다방이다.

다방, 서울을 견디다

다방, 커피숍 혹은 다실. 참, 먼 이름이다. 스타벅스나 커피빈보다 한참이 멀다. 멀어도, 아직 서울 한복판에서 호명되는 이름이 있다. 불혹(不惑)의 나이는 기본으로 넘겼다. 근대 한국의 다방 전성기를 열어젖힌 명동. 명동의 시인 박인환이 '세월이 가면'에서 예언했듯,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 명동 CGV 뒤편 인파를 헤치고 '가무'를 찾는다. 계단을 올라 2층 문을 여니, 고동빛 원목 탁자와 가죽 소파가 고급 응접실의 느낌을 풍긴다. 내부 계단을 타고 4층까지 오른다. 천장의 커다란 샹들리에가 비현실적인 빛을 뿜는다. 창가에 앉는다. 중국대사관을 넘어온 초가을의 바람이 살갗에 닿는다.

1972년, 원래 이름은 '까뮈'였다. 프랑스 소설가 이름에서 따왔지만, "외래어 상호를 시정하라"는 유신 정권의 명령에 획을 몇 개 떨궜다. 그래서 '가무'가 됐다. 2007년 실내 리모델링 전까지도 천장엔 벌집 패턴의 금도금 모자이크가 덮여 있었을 정도로 화려했다. 주 손님은 명동 주변의 고위 공무원, 대기업 임원, 부잣집 사모님들이었다. 이날 점심 무렵에도 2층 구석 자리에 롯데그룹 부회장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직도 '귀한 분'들이 종종 찾는다. 옛 낭만을 찾아서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1970년대 메뉴판. 커피값이 당시 돈으로 300~350원인데, 밥값보다 비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1970년대 메뉴판. 커피값이 당시 돈으로 300~350원인데, 밥값보다 비쌌다.

 

제일 유명한 비엔나커피를 주문한다. 원두커피 위에 큰 밥숟가락으로 생크림을 두 번 떠 얹고 그 위에 계핏가루를 뿌렸다. 지금 6000원 하는 이 커피는 1970년대 당시 300원, 지금으로 치면 2만원 정도 하는 '한국에서 최고로 비싼 커피'였다. 자장면 한 그릇이 130원쯤 하던 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이곳 목제 메뉴판이 당시 커피값을 증언한다. 차를 시키면 조각 케이크가 따라나온다. 32년째 이곳을 운영 중인 한 직원(52)이 "1980년대 세무조사 나온 공무원이 '커피가 뭐 이리 비싸냐'고 해 핫케이크를 공짜로 주게 된 게 시작"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연령대가 다채롭다. 직원이 "예전에 나팔바지 입고 명동을 누비던 여자들이 지금은 딸을 데리고 온다"며 커피 잔을 주방 내부 엘리베이터에 넣는다. 커피가 위층으로 올라간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진다.

명동에서 청계천 쪽으로 걷는다. 청계천 일대는 그 자체가 압축성장과 한국 현대사의 상징. 다방이면 무릇 낡고 뭔가 어설프고 쓸쓸한 정서가 있어야 할 것 같을 때, 마담과 성냥갑과 돋보기 안경으로 들여다보는 예전의 활자체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을 때, 서울 청계천 통일상가 C동 2층 1문 계단을 오른다. '다'자가 뜯어져 나간 '명보다실' 간판이 반긴다. 1973년쯤 문 연,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다. 최소 30년은 묵은 자동식 전화기와 어딘가 낙엽을 연상시키는 색깔의 소파처럼, 9개 테이블에 띄엄띄엄 반백의 다객(茶客)이 앉아 있다. 마담이 자리를 옮겨다니며 실없는 농담을 건넨다.

1996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촬영지답게, 일부러 건물 맞은편 전태일(1948~1970) 동상이 서 있는 버들다리를 거쳐 다방을 찾는 이가 많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산화한 그의 젊음을 따라오는 길이다. 올해 쉰여섯 살의 미스 리가 "계속 버티고 있어줘서 고맙다는 얘길 듣곤 한다"고 한다. 쌍화차 한 잔을 시킨다. 쓴데, 손님들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


- 글=정상혁 조선일보 기자 사진=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 2014.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