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백수의 일상 - 179. <일그러진 자화상>

paxlee 2021. 5. 19. 10:46

일그러진 자화상

 

 

하늘만이 빠끔히 보이는 충청도 어느 두메산골

20세기가 강력히 원하여 떡두꺼비로 탄생하여

개복숭아, 아그배 따 먹고 다람쥐 쫓으며

바람개비, 굴렁쇠 굴리던 어리벙이 소년이

한 여인의 남편으로, 한 아들, 딸의 아버지로

이 고개 저 고개를 넘어서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 한 갑자(60년)를 돌아온

인생을 찬미(讚美)할 나이

꽃처럼 아름다워 화갑(華甲)이란다

 

나에게도 ‘젊음’과 ‘청춘’, 그 좋은 것이 있어서

뒤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려 왔는데

총기가 가득한 눈으로 천리를 보았는데

세심하고 빠른 동작으로 일 했는데

손 발엔 땀이 흥건했는데

오줌으로 고향집 담장 넘기기 시합도 했는데

먹는 재미로 산다며 왕성한 소화력으로 양푼으로 밥을 먹기도 했는데

설탕 크림 들어간 다방 커피만 마셨는데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성욕은 철철 넘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남성 갱년기인지 뭣인지가 찾아와

좋았던 ‘젊음’과 ‘청춘’이란 놈은 날개가 달렸는지 날아가 버리고

올라갈 때 못 본 그 많은 것들, 천천히 걷다보니 내려오면서 보게 되고

노안에다 안구 건조로 돋보기의 친구가 되고

깜빡깜빡 건망증에다 동작은 느려지고

손 발의 땀은 말라 건조해지고

전립선 비대증으로 소변줄기는 약해지고

소화력은 떨어져 소식(小食)을 하고

쓰디 쓴 블랙커피도 마시고

검은 머리엔 흰서리가 내리고

눈썹은 호랑이 눈썹으로 변하고

일심동체였던 아내는 일심2체로 연인에서 친구가 되고

 

노래방에서는 ‘가지마오’, ‘그대여 변치마오’를 열창했는데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허무하게 흘러간 봄밤의 꿈에서 깨어나 보니

‘가는 세월’, ‘청춘을 돌려다오’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고

‘인생은 60부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다 개뿔 같은 이야기’라는 TV속 조영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고장 난 벽시계를 보면서 가는 세월도 고장 나기를 기다린다고 전해라.

 

- 『시인은 말한다』 시인 박민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