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507.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paxlee 2022. 6. 11. 08:34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괴테의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에 묻어둔 향기로 충만한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열 살 무렵 서울의 달동네에서 만난 어느 부인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진주가 고향이라는 그이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그이는 드물게 명랑하고 우아하며 맑은 기품이 있었다. 내가 그 집을 드나든 건 그이가 ‘노란 개나리꽃을 오래 들여다보면 머리가 어지러워요’라고 재잘대는 어린애를 귀여워하며 간식을 내주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것은 얼굴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말소리에 기분 좋은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그이는 이사를 갔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나의 끌림은 아름다움과 마주한 경이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그 부인은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그리움 속에서 부인을 떠올리곤 했다. 모든 얼굴은 시간의 빛과 그늘을 받으며 변한다. 시인이라면 “얼굴들은 세월을 직조한다”(아도니스)라고 쓸 것이다. 열다섯 살 때 무심코 시를 끼적인 것은 세상의 비애를 알아버린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는 무의식의 기도 속에서 시를 썼을지도 모른다.

 

© 제공: 세계일보장석주 시인

 

아름다움은 내 존재 바깥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내 안의 결핍인 한에서 아름다움은 또렷했다. 그 결핍은 아름다움을 찾는 동기이자 동력이었다. 하얀 접시, 무심한 저녁, 천진무구한 새끼 고양이, 파초 잎을 실로폰처럼 두드리는 7월의 빗소리, 새싹들, 옛 절의 단청,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 옛날 목가구, 바흐의 ‘파르티타’,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 마이클 케나의 사진, 오랜 우정, 장필립 투생의 단편들, 피나 바우슈의 무용 등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데, 대개는 비율과 비례가 맞고 조화로우며, 넘치거나 되바라지지 않고 흠이 없고, 맑은 소리를 내며, 결이 고른 순수함 그 자체다.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종종 슬퍼진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슬픈 빛을 머금고, 덧없고 쓸모가 없는 탓이다.

 

정말 아름다운 것, 근접한 대상, 빼어난 절경을 詩로 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아름다운 것을 시로 썼을 때 나는 성공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한 줌 식어버린 재와 같은 언어 무더기만 남았다. 아름다움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대상의 아름다움은 숨어 있거나 멀어질 때 나타난다. “미는 은신처다.”(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45쪽) 시는 은유라는 외투 속에 제 몸통을 숨기는 전략을 쓴다. 시에서 미는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시만이 아니라 예술 일반은 은폐 전략을 통해 미의 깊이를 실현한다. “은폐, 지연, 방향 전환은 미의 시공간적인 전략이기도 하다.”(한병철, 앞의 책, 46쪽) 여기 미(美)가 있다면 저기에 추(醜)가 있다. 미와 추는 균형을 이룬다. 미는 추의 역상이다. 미는 감각을 충만으로 이끄는 형식이다. 반면 괴이하고 불쾌감을 일으키는 추는 내면에 균열을 내고 고요를 깨트린다. 미가 빛이고 감각의 충만이라면 추는 빛의 소멸이고 아름다움의 무덤이다. 미와 추는 다른 있음의 영역을 빚는다.

 

우리가 추를 멀리하고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타고난 본성이다. 우리는 모든 장소와 모든 찰나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그것은 기쁨을 계시하는 순간, 홀연한 존재 내면의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경험으로 주어진다. 아름다움은 평온한 조화, 숭고함과 광휘의 찰나로 지나간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에 머물 수 없다. 이 불가능성은 영원하다. 시와 음악, 회화 같은 예술은 차라리 그 불가능성을 붙잡으려는 시도가 아닐까?

 

예술가들이 하염없는 존재인 것은 예술이라는 불가능성을 사유재산으로 귀속시키려는 헛된 시도 때문이 아닐까? 오래전 로마의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았을 때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만났을 때, 그 순간은 덧없음조차 느낄 수 없이 짧았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어쩌면 소유의 불가능성 속에서 덧없이 빛나는 게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장석주의 인문정원] 세계일보 : 2022, 0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