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515. <매를 먼저 맞아야 하는 이유>

paxlee 2022. 6. 15. 05:45

[CEO 심리학] 매를 먼저 맞아야 하는 이유

 

살다 보면 나에게 주어진 피해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혹은 내가 상대방에게 입힐 피해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을 먹고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하지만, 어떤 시점에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을뿐더러 마땅한 조언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근거는 전무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시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그 피해가 일어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한 시점은 결정적이다.

UCLA 심리학자 유진 카루소 교수는 한 연구에서 같은 피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와 미래 어느 시점에 일어나는 것이냐에 따라 분노와 용서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핵심은 같은 상대방의 의도적 정책이나 제도의 시행으로 인해 일어나는 피해의 내용은 같더라도 그 피해가 과거에 일어난 것일 때보다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될 때 그 피해와 상대방의 고의성을 더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 연구에서는 아마존닷컴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고객에게 새로운 고객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한 그룹은 아마존이 이 정책을 한 달 전에 시도했었다고 들었다. 다른 한쪽 그룹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후에 이 정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물론, 두 그룹 모두 이 정책은 문제가 있고 불합리한 것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이 정책의 잘못된 정도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미래에 시행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더 강하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며 이에 대해 더 많은 반감과 분노를 표출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는 변할 수 없다. 하지만 미래는 변할 수 있다. 그러니 분노와 반감의 표출로 변화를 만들어 내겠다는 심리적 압박을 스스로와 타인에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공방의 결과를 설명한다. 상대방의 과거 잘못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해 본들 소기의 효과를 별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특히 상대방으로부터는 나에게 존재하는 미래 잘못과 관련된 가능성에 집중된 역공을 받는 경우 오히려 손해 보는 장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미래의 잘못에 허락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문제는 이 잘못이 말 그대로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시행해야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피해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송 비용 상승, 종량제 시행, 세금 인상 등과 같이 말이다. 카루소 교수의 연구가 절묘한 건 그 해답을 상당 부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과 같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나 미래가 아닌 1년과 같이 상대적으로 훨씬 가시적인 시점으로 설정하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반감과 분노의 양에 차이가 사라졌다. 더욱 중요한 점은 내용적으로는 동일한 피해나 잘못이라 하더라도 한 달 전 과거에 대한 판단과 1년 후 미래에 대한 판단에서 오히려 1년 후 피해에 대한 반감이 더 적었고 그 피해가 불가결한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응답도 더 높게 나왔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사항에 대해 허락받기 어려우니 최대한 은폐해서 일이 다 일어난 다음에야 밝히고 양해를 구하자'라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세다. 그것보다는 '일어날 피해라면 최대한 일찍 알리고 용서를 구하자'는 생각이 더 나은 것이다. 그래서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은 맞는 사람 입장에서만 맞는 말이 아니다. 때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할 때도 맞는 말이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매일경제 :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