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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일상 - 616. <반가사유상에 몰입이 잘 되는 이유>

paxlee 2022. 7. 29. 00:16

반가사유상에 몰입이 잘 되는 이유

 

국립중앙박물관에 상설 전시 중인 '반가사유상' 두 점. 조성관 작가 제공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완상하려는 사람들이다. 평일 오전에도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인 중에는 반가사유상 사진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쓰는 사람이 여러 명 된다.  

'사유의 방'을 설계한 사람은 건축가 최욱이다. 최욱이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관객이 무대에 선 배우를 속눈썹 떨림까지 볼 수 있는 거리가 소극장 규모인 24m인 것을 고려해 공간을 디자인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 올려다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높이를 설정했다."

나는 일부러 손님이 가장 없을 것 같은 시간대인 평일 오전을 택했다. 그런데도 '사유의 방'을 찾는 관람객이 앞뒤를 이었다. 금발의 외국 여성도 반가사유상 두 점의 표정과 뒷모습과 옆모습을 천천히 관찰하고 있었다.  

모든 전시물은 관람객과의 소통을 목표로 한다. 왜 관람객은 반가사유상에 감동하는가. 일단 작품의 예술성이 뛰어나야 한다. 다음은 예술성을 돋보이게 배치 전시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눈높이다.

'고개를 들지 않고 올려다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높이.'

성인의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거리를 좁혀 예술품을 전시했을 때 교감의 밀도가 높아진다. 반가사유상 두 점을 보고 나면 입꼬리에 걸린 신비로운 미소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까닭이다.

유럽에는 천장화로 유명한 건축물이 여러 개 있다. 대부분이 궁전, 성당, 극장, 미술관이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로, 빈 부르크극장은 클림트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파리 가르니에오페라극장은 샤갈의 '꿈의 꽃다발'로.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들 천장화를 완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림이 건축물 천장에 붙어 있어서다. 고개를 뒤로 90도 꺾고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선 채로 이들 작품을 1분 이상 감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목덜미가 아파서다. 그렇다고 대리석 바닥에 누워서 볼 수도 없고. 예술작품과 교감하려면 편안한 눈높이에서 소음이 없는 가운데 작품에 몰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천장화는 몰입이 힘들다.

어른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과 대화를 나누려면 일단 어른이 무릎을 꿇고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어른이 선 채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어린이가 고개를 들어 치켜보는 자세로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한두 마디 형식적인 대화는 주고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커뮤니케이션의 1단계는 소통하려는 대상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에서 시작한다. 눈높이를 맞추면 소통의 절반은 성공한 것과 같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미식 축구(American football). 미국인과 정서적 장벽을 느끼게 하는 것 중 하나다. 미국에서 시작된 메이저리그(MLB)와 미국프로농구(NBA)는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프로풋볼(NFL)은 여전히 대중과 좁힐 수 없는 거리감 같은 게 존재한다.

미국에서 야구 영화 못지않게 자주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풋볼 영화다. 풋볼과 관련된 속담도 여러 개다. 대표적인 게 '먼데이 모닝 쿼터백'(Monday morning Quarterback). 풋볼 경기는 월요일에는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 쿼터백? 상황이 종료된 다음 뒷북을 치는 것을 의미한다.

미식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 내가 두 번 본 영화가 있다. 샌드라 불럭이 주연한 2009년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다. 이 영화는 미식축구 선수 '마이클 오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의 한 장면. 투오이가 오어에게 '래프트 태클'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 분)의 포지션은 '레프트 태클'이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레프트 태클'. 이 포지션의 역할은 한마디로 쿼터백을 상대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방어하는 일이다. 쿼터백이 시간 여유를 갖고 리시버에게 공을 던지려면 레프트 태클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쿼터백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장하지 않으면 결코 경기를 가져올 수 없다. 193㎝라는 거구의 마이클 오어에게 주어진 포지션이 '레프트 태클'이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라는 홍보 문구에 끌려서다. 그런데, 예상외로 영화의 잔상(殘像)이 오래갔다. 결국 얼마 전 이 영화를 넷플릭스에서 다시 찾아 봤다. 거의 12년 만이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에는 관점이 분명했다.

양모(養母)인 '리 앤 투오이'(샌드라 블록 분)는 모든 걸 갖춘 백인 상류층 여성이다. 그런 투오이는 어떻게 결손 가정의 문제아 흑인 청년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을까. 다른 백인 여성 같았으면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성장한 흑인에게 기대할 게 뭐가 있냐며 고개를 돌렸을 텐데. 또한 투오이는 어떻게 마이클 오어의 무의식에 잠겨 있는 '보호 본능'을 포착해 그걸 미식축구 포지션과 연결시킬 수 있었나.

두 번째 보니 그게 보였다. 백인 여성 투오이는 흑인 오어의 입장에서,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진 흑인 청년의 눈높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자 하나둘씩 그 원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어의 돌발적인 분노 표출은 무의식에 자리잡은 트라우마가 원인이었다. 가정폭력에 고통받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것이 무의식화되어 행동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오어는 주변 사람들의 반복되는 배신에 상처를 받아 마음의 문까지 닫아 버렸다. 투오이가 자신은 어떤 경우든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을 심어주자 오어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연다. 투오이는 의붓아들 오어를 '레프트 태클'로 키우기 위해 성심을 다한다. 양모의 사랑으로 오어는 절망의 수렁에서 나와 희망의 계단에 선다. 결국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오어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를 거쳐 NFL에 데뷔해 성공적인 프로생활을 한다.
  
헤세의 고향에서 만난 헤세 동상

서울 사직공원 운동장에 동상 두 기(基)가 있다. 회사를 다닐 때 점심을 먹고 여러 번 사직공원을 산책한 적이 있다. 한번은 이 동상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금방 감상을 포기했다. 조형물의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기단이 너무 높아 동상을 보려면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동상과의 교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일까. 동상 뒷면의 인물 소개글을 찬찬히 읽었지만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1877~1962)의 고향은 독일 남부 소도시 칼브(Calw). 헤세는 열여덟 살까지 고향에서 살다가 작가가 되기 위해 칼브를 떠났다. 이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스위스에서 눈을 감았다.

칼브는 헤세의 도시다. 어디서나 헤세가 발길에 채인다. 헤세 생가, 헤세 광장, 헤세 분수, 헤세 정원, 헤세 박물관 하는 식이다. 심지어는 식당 접시에도 헤세의 얼굴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칼브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도 그중 하나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한스가 자주 찾는 다리가 니콜라우스 다리다.

 

니콜라우스다리의 헤르멘 헤세 동상. 조성관 작가 제공

 


그 니콜라우스 다리에는 헤세의 동상이 있다. 헤세 탄생 125주년을 기념해 2002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보아온 동상과는 다르다. 등신상(等身像)이다. 보행자 전용 다리에 아무런 받침도 없이 도로 바닥에 세워놓았다. 마치 정장을 잘 차려입은 노신사 헤세가 다리 위를 걷다가 뒤를 돌아다 보며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다. 왼손에는 중산모가 들려있고, 오른손을 바지호주머니에 넣고 있다.

칼브를 찾는 여행자들의 99퍼센트는 헤세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 니콜라우스 다리다. 헤세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다. 이 등신상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헤세 옆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헤세의 허리에 손을 두르기도 하고 어깨에 손을 얹기도 한다. 헤세와 키를 대보기도 한다.

'헤세가 키가 컸구나. 185㎝ 정도 될까'

여행객들은 등신상을 쓰다듬고 작가의 주름진 얼굴을 코앞에서 대하면서 신기해 한다. 웃음꽃이 터진다. '데미안'의 세계적인 작가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다.

높은 기단 위의 동상은 마치 성을 둘러싼 해자(垓字)처럼 사람 앞에 방어막을 친다. 그 높이만큼 거리감이 생기고 교감의 밀도는 떨어진다. 등신상은 거리감을 없애고 친근감을 높인다. 눈높이가 맞아서다.

반가사유상이 딱 그렇다.

 

-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조성관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