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709. <향기에는 독이 있다>

paxlee 2022. 8. 20. 08:12

'독(毒)의 꽃, 그 향기가 내품는 독(毒)과 약(藥)'

 

“삶이란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최수철의「독의 꽃」<에필로그> 520p)

 


조명구는 “모든 살아있는 것은 독의 꽃”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과 주변의 삶에서 힘겹게 뽑아낸 독으로 정성껏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책장을 채워 갔다. 독이 묻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한 송이 꽃이 환하게 피어났다. 이제 그의 몸에는 한 방울의 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책이 되었고 꽃으로 화했다.

“내 이야기는, 한 방울의 물과도 같은 한 인간의 생명, 독일 수도 있고 약일 수도 있는 그 물방울 하나의 생성에서 사멸에 이르는 작은 역사에 대한 거야”(독의 꽃 <에필로그> 520~521p)

인간은 누구나 독인(毒人)이다. ‘명로’는 허명의 독인이요, ‘운선’은 자책의 독인인데 이들은 ‘몽구’라는 독인을 낳았다. ‘수호’는 모험의 독인인데, 결벽의 독인인 ‘소화’를 희롱하고, 무모의 독인인 ‘광수’를 독살했다. 자학의 독인인 ‘자경’은 무독자가 되어 방관의 독인인 몽구를 치료코자 했다. 해독의 돌 ‘드라코니트’를 이마에 박고 사는 몽구는 주변의 독을 모두 흡수함으로써 자신의 역사를 완성했다.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번뇌인 삼독(三毒)은 탐욕과 분노와 우매를 가리킨다. 이중에 권력, 허명, 재물, 색욕, 식욕 등 탐욕만 하더라도 끝이 없을 것이다. 나이 들어 퇴직하고 나니, 갖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욕심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갔으나, 식욕만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남아있다. 다른 독과는 달리 먹는 것 좀 밝힌다고 해서, 노욕을 부린다니 추해 보인다고 까지는 않으니 더욱 그런 것 같다. 식욕과 더불어 점점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우매가 독이 되어, 나를 서서히 추한 독인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이 세상에 독 아닌 것이 없으니, 독은 우리 모두의 일용할 양식이야. 독은 어둠이고 병이고 악이야, 독은 태초에도 있었어.”(독의 꽃 <프롤로그> 27p)

가정, 학교, 직장, 사회, 국가 등 우리 주변에도 독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어떤 가치든 일이든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화하고, 숫자화하고, 서열화하고, 게임화하고, 승패를 가린다. 포퓰리즘과 무책임, 거짓말과 속이기, 각종 폭력과 겁주기, 상호 비난과 욕하기, 흉악 범죄와 무질서, 오만방자와 무례함 등이 난무한다. 언제 생겼는지, 바뀌었는지, 내용은커녕 무엇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령, 제도, 규정들이 독이 되어 우리들을 감염시킨다.

‘과유불급(過猶不及)’도 독이 될 수 있다. 사랑이 지나치면 배신과 증오를 낳을 수 있고, 정의가 도를 넘어 폭력으로 화하기도 한다. 착한 것은 좋지만 자칫 굴종으로 비쳐지기도 하고, 과공이 비례가 되기도 한다. 병적인 관심은 스토킹을 부르고, 지나친 연대감이 패거리로 변할 수 있다.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독의 꽃 <도취와 환멸> 198~199p)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말씀이 있다. 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먹는 것을 조절하고 분노를 삭이며 우매함을 깨우칠 기력과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신영복 선생 말처럼 아집이나 편견에서 벗어나는 일부터 시작하여 내 가족과 친지, 친구들과 지인 등 가까운 사람들부터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식탐을 아예 없앨 수는 없어도 적당히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기대감을 줄이면 분노도 작아질 것이요,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책이라도 읽다보면 어리석음도 줄어들 것이리라.

10년 전쯤 늦겨울에 모 언론사 논설위원들과 우포늪을 찾은 일이 있었다. 이중 한 사람이 마른 풀들을 보며 ”둑방에 불을 놓아 해초와 해충을 잡을 때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우리들을 안내하던 귀농인은 ”글쎄요, 해초와 해충이 어디 따로 있나요. 사람들이 그 가치와 용도를 잘 몰라서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지며 우리 일행 중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따르면, 사람마다 그 체질에 따라 약재도 생리와 병리, 진단, 약물 처방이 다르다고 한다. 이를테면 어떤 이에게는 약이 독이 될 수도 있고 독이 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작가로서 내가 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바로 이 일기를 쓴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런 치욕스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 자체로 이 글은 내게 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부끄러운 글을 통해 살아남는다. 이 글은 나를 치유하는 약이다.”(독의 꽃 <도취와 환멸> 143p)

독을 약으로 바꾼 위대한 인물들을 기억한다. <고백록>를 쓴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을 쓴 장 자크 루소, <고백록>을 쓴 톨스토이가 그들이다. 이들의 아픔과 고통, 번민과 후회, 수치와 모욕이 오롯이 배인 삶은 그들의 책에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들은 후에 독이 되어 자신들에게 되돌아가 썩은 살을 도려내고 나쁜 피를 걸러내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 꽃이야말로 치유의 약이 될지 또 다른 독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바로 독자(讀者)인 우리 자신이 될 테니까. “소가 마신 물은 젖이 되고, 뱀이 먹은 물은 독이 된다”는 오랜 속담이 지금껏 전해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출처 : 한우리경제 (http://www.hanuribiz.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