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770.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paxlee 2022. 9. 3. 00:22

이병철 회장이 갑자기 불렀다 “남북관계는 이 숫자로 판가름날 거요!”

 

이상우(왼쪽)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고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신간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온 분들’(기파랑)을 낸 것을 계기로 정치학자이자 한림대 총장을 지낸 이상우(84)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을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돼 수 차례 입원하는 상황에서도 이 책은 꼭 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썼는데, 5년 전 자신의 자서전과 한국 현대사를 결합한 ‘살며 지켜온 대한민국 70년사’를 낸 뒤 현대사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이 분이 자꾸 “시간 좀 괜찮아요?”라고 제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옛 에피소드가 많아 자꾸 인터뷰 ‘본류’를 벗어나는 일이 생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을 만난 일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1976년 12월 7일 삼성본관 3층에 설치된 삼성그룹 종합전산실 가동식에서 이병철(가운데)

회장과 이건희(왼쪽에서 세 번째) 당시 이사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조선일보 DB

 

무슨 얘긴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더라는 겁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죠.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림대 총장 시절의 이상우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

 

젊은 이상우 이사장은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습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입니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습니다. 지금 삼성 총수가 된 그의 손자가 꼭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어쩌면 그토록 거인(巨人)이었던 기업가조차 후대에 이르러 포부의 반 밖에는 못 이룬 셈이니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지요. 삼성전자는 1983년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 정상의 기업이 됐지만, 제2민항은 끝내 삼성이 아닌 금호가 사업권을 가져갔고 삼성항공산업의 후신인 삼성테크원은 한화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니 말입니다.

 

정치학자 이상우 前 한림대 총장

 

이상우 이사장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던 냉전의 한가운데 시절인 1979년, 놀랍게도 민간인으로서 소련을 방문했을 때의 일도 회고했습니다. 세계정치학자대회에 참석해 발표를 해 달라는 미국 학자의 부탁을 받고 불쑥 문교부를 찾아가 “모스크바에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다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어쩐 일인지 정부에서 “12명으로 팀을 구성해 한번 갔다 와 보라”고 허가를 내 줬습니다. 팀원 중엔 훗날 국무총리가 되는 이홍구 서울대 교수도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소련 대사관이 있는 일본 도쿄로 가 비자를 받고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회의 일정 중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를 탐방하는 코스가 있었는데, 소련 주최측에선 “수교국 국민이 아닌 한국 학자들은 참석할 수 없다”고 했으나 다른 나라 학자들이 반발해서 가까스로 같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어붙은 감자 캐는 어린이들.

 

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약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소련이 집단 농장, 국영 농장에 농민들을 강제 편입시킨 데 이어 대량 공출로 곡물을 수탈하면서 굶주림이 심해졌다. 스탈린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1933년에는 굶어 죽는 이가 하루 평균 1만5000명 규모로 늘어날 정도였다. 사진은 1933년 도네츠크의 한 집단 농장에서 어린이들이 얼어붙은 감자를 캐는 장면이다.

 

키이우에서 소련 측의 안내를 받아 방문한 곳은 국영농장인 소포즈(Sovkhoz)였습니다. 엄청나게 넓은 농장은 대부분 황무지였습니다. 그런데 드문드문 서 있는 민가 주변만 조금씩 푸른 빛이 보였습니다. 일을 하나 하지 않으나 자기에게 별 이득이 없는 국영농장의 대부분 토지와는 달리 집 주변은 일부 자신이 소비해도 되는 텃밭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경작을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모스크바의 으리으리한 백화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백화점 매장에선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점원이 제지하더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진열이 흐트러지잖아요.”

 

모스크바의 굼(ГУМ) 백화점은 붉은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의 북동측,

즉 크레믈 바로 맞은편에 있다.

 

선물로 가져올 물건을 지목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물건을 수령해 보니 매장에 있던 것과는 달리 실이 한 움큼 빠진 물건이었습니다. 계산을 하러 갔더니 유럽식 주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사장은 그때 확신했다고 합니다.

 

‘소련 공산주의는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상우 이사장은 또 예전에 어느 전직 대통령이 취임하기 훨씬 전에 만났던 얘기를 해 줬습니다. 이 이사장은 이런 충언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무엇을 모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쓰는 일입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에게 제대로 물어볼 줄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서 예전 박정희 대통령의 이야기를 해 줬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 시절부터 친분을 유지했던 인물 중 한 명이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구상(1919~2004)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꼭 구상을 만났다고 합니다. 구상은 박 대통령과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그와 노선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구상 시인.

 

박 대통령이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옳다는 말만 하니, 그들에게선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을 구상이란 양반이 해 준다’는 것이었죠. ‘허물없는 직언(直言)을 솔직히 말해줄 수 있는 바깥 라인’을 약 10년 동안 소중하게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별세하기 얼마 전부터 더 이상 구상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상 시인은 이렇게 탄식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눈에 암운(暗雲)이 끼었구나!”

이상우 이사장이 이런 얘기를 해 줬지만, 그 전직 대통령은 끝내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상우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산물입니다.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만남과 배움이고, 결국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附記>

원래 쓴 기사의 구상 시인 부분을 보충설명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구상 시인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1952년 구상은 국방부가 발행하던 승리일보의 편집책임자였는데 피란지 대구에서 처음 박정희 대령(대통령의 오타가 아니라 실제 대령)을 만나 술친구가 됐다고 합니다. 1961년 5.16이 일어난 지 사흘 뒤인 5월 19일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마당에 놓인 어느 빈 호텔의 방. 그(박정희)도 나도 잠자코 술잔만을 거듭 비웠다. 마침내 그가 뚱딴지 같은 소리를 꺼냈다.

‘미국엘 좀 안 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 못해 양식당의 매너도 모르는 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 몫 져 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 두세요!’

 

얼핏 들으면 만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며칠 뒤 구상은 천주교가 경영하던 경향신문 도쿄 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났지만, 박정희가 5대 대통령이 되기 전 돌아와 경향신문사를 인수했다가 천주교와의 갈등으로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그를 만나 신문사 일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보자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 쓰는 것밖엔 없나 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별다른 조치를 취해 줄 것은 없다는 얘기였죠. 구상은 그때 박정희가 자신을 현실에 이끌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의 회고. 유석재 기자. / 2022.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