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775. <어제의 기회가 오늘의 리스크가 된 세상>

paxlee 2022. 9. 4. 05:37

어제의 기회가 오늘의 리스크가 된 세상

 

지정학적 변화로 요동치는 경영 환경
새로운 리더십과 상상력이 필요한 때

김용석 산업1부장

 

프랑스 자동차 브랜드 르노는 한국에서 연구개발(R&D)센터와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 자동차 업계는 르노코리아가 추구할 목표 중 하나로 미국 시장 공략을 꼽는다.

소형차를 선호하는 유럽과 달리 대형차가 잘 팔리는 미국에서 판매할 차를 한국에서 개발, 생산해 수출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미국 밖에서 생산한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은 르노의 셈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국내 공장에서 미국 수출용 전기차 생산을 기대했던 한국 제너럴모터스(GM)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전기차를 미국 내에서 만들 것”이라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선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던 국내 자동차 공장의 기회를 하루아침에 리스크로 뒤바꿔 버렸다. 때마침 GM 본사 실판 아민 해외사업부문 사장의 한국 방문 계획이 취소되면서 또다시 한국GM 철수설이 꿈틀거릴 조짐도 나온다.

 

중국 제조업이 흥하고 경제가 성장할수록 한국 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이 잘된다는 공식에도 이제는 많은 의문부호가 달리게 됐다. 66년 만에 최악이라는 무역 적자, 반도체마저 26개월 만에 수출 감소세로 돌아섰다는 정부 발표가 이를 증명한다. 중국에 수출하지는 못하는데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은 끊을 수 없는 양국 관계는 이제 돈을 벌 기회가 아니라 ‘차이나 리스크’로 통한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가공의 이야기를 신뢰함에 따라 만들어지는 힘이야말로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특질이라고 분석했다. 하라리는 종교와 함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가공의 이야기로 경제를 꼽았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정학적 상황은 한국과 미국, 중국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이 첨단 제조 기술력을 바탕으로 중국에 생산기지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글로벌 경영을 하다가 이제 생산기지를 베트남으로 옮겨 활로를 찾는다는 게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는데 이런 흐름 전체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단순히 자동차 몇만 대를 미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중국 반도체 공장에 제대로 설비 투자하기 어렵게 됐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 기업과 산업의 매력과 경쟁력을 설명하는 스토리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변화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아시아를 연구하는 한 인문학자를 만났다. 그는 인플레 감축법 사태에 대해 “미국은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한국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책을 고려하는 데 있어 한국은 자국의 이익은 물론 중국, 일본, 인도 등에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다(인문 분야에선 지식인들이 불교문화에 관심을 갖는 태국 등에 비해서도 순위가 밀린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의 뒤늦은 문제 제기에 “뜻밖이다”라는 미국의 반응은 사태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나. 국내 대표기업 삼성조차도 ‘뉴 삼성’ 비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데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변화에 흔들리지 않을 R&D, 제조 경쟁력은 물론 변화에 주도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새로운 상상력과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다.

 

[오늘과 내일/김용석] 김용석 산업1부장. 동아일보 / 2022-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