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서울산악조 구조대장 김남일씨 *-

paxlee 2007. 6. 28. 21:35

 

               서울산악조난구조대장 김남일씨

 

           “산에서 받은 혜택, 봉사를 통해 갚고 싶다.” 

 

▲ 소속
서울산악조난구조대 대장
서울시산악연맹 대회협력 이사
한국등산학교 강사

 

김남일씨(金南一·42·디자인메카 대표)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산에 다닌다. 무엇보다 봉사를 통해 얻는 보람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기 때문이다. 그는 90년부터 한국등산학교 강사로 등산 기술과 정신을 전파하는 데 힘써왔다. 16년간 그가 참여한 교육과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산악인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서울산악조난구조대(서울시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 활동은 그가 산을 통해 얻은 은혜를 갚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는 90년 구조대에 가입한 이후 총무와 부대장을 거쳐 2000년 가을부터 제6대 대장으로 구조대를 이끌어오고 있다. 그 사이 인명구조는 물론, 사고예방을 위한 확보물 교체, 사고가 많은 암릉등반 가이드북 배포 등 안전사고 예방활동에도 앞장서왔다. “좋은 선후배도 많이 만났고, 고산도 여럿 올랐습니다. 다 산 덕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보답을 산을 통해 하려는 거죠. 등산학교 강사도 그렇고, 구조대 활동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겁니다.”

 

교육 통해 등산의 진정한 의미 깨달아

 

그는 제대 직후인 86년 한국등산학교에 들어갔다. 남대문의 등산장비점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코브라스포츠를 운영하던 박규동씨의 권유로 뭐 하는 곳인 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정규반에 들어갔다. 주말에 1박2일씩 8주간 이어지는 교육과정이었다. 이전까지 산은 오로지 놀이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8주간의 교육은 산이 모험과 도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졸업과 함께 26기 동기들끼리 이륙회라는 산악회를 만든 이후 더욱 깊이 산에 빠져들었다. 선인봉에서 인수봉으로, 인수봉에서 부산 앞바다의 해벽에 이르기까지 등반 영역을 점점 넓히고, 일단 바위에 붙으면 땅을 밟지 않는 연장등반을 인수봉에서 사흘 내리 하는 등 강도도 높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량이 향상되자 자연스레 한국등산학교 강사들의 눈에 띄게 됐고, 마침 젊은 강사 충원을 필요로 하던 90년부터 등산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게 됐다.

 

“장봉완, 홍옥선 같은 선배들은 등산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산악인이자 사부였습니다. 그런 선배들이 들어오라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구조대에서도 들어오라지 뭡니까? 마침 하얀 산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질 무렵이었으니 그런 고마운 손길이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 2000년 아비가민 C3. 서울산악조난구조대가 2개봉 연속등정을 이룩한
원정이었음에도 무쿠트파르밧 동봉 2등의 확인으론 서운했던 등반이었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로 인해 일본 문부성 부설 등산연수원에서 교육도 받았다. 정작 원했던 하얀 산을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90년 결혼한 아내 신연수씨 역시 유한공대 산악부 출신으로 한동안 산에 흠뻑 빠져 지내기는 했지만, 주말이나 휴일이면 산에 가서 살다시피 하는 남편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짧으면 한 달에서 두 달까지 빠져야 하는 해외원정을 직장 상사가 허락해줄 리 만무였다. 그래서 94년 매킨리(6,904m) 원정 기회도, 96년 가셔브룸1봉(8,068m) 원정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 6년 선인봉 남측오버행 자유등반.

 

그 때마다 씁쓸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한 히말라야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95년 말 자신의 사업체를 차렸다. 배와 비행기를 이용한 짐 수송을 대행해주는 메카항공해운이 그것이었다. 회사는 잘 되는 듯 싶더니 97년 말 불어닥친 IMF의 여파로 휘청거린 뒤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고산에 대한 꿈은 이루어나갔다. 우리나라처럼 1948년 정부를 수립한 인도는 이를 기념하는 합동등반을 서울시산악연맹에 제의해왔다.

 

아직 등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무쿠트파르밧 동봉(7,130m)을 대상 산으로 내놓겠다는 인도산악연맹의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98년 부대장으로 무쿠트파르밧 원정에 참가했다. 그 원정에서 구조대팀은 한국의 인도 히말라야 진출사상 최초의 초등봉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듬해 ‘등정 사실에 대한 의문이 있다’는 엉뚱한 얘기가 전해왔다. 99년 같은 루트를 등반한 인도 NIM(Nehru Institute Mountaineering)팀의 등정의혹 제기였다.

 

“98년 여름 현지에 도착했더니 합동등반하겠다는 인도 대원들이 장비에 일당까지 요구하지 뭡니까? 그 동안 인도측은 외국 원정대와 그런 식으로 합동등반을 해왔던 거죠. 그런 관례를 전혀 몰랐던 저희로서는 정말 황당했죠. 그래서 우리 대원끼리 등반에 나서 후배 대원 두 명이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들이 정상에 올랐을 때는 워낙 화이트아웃이 심해 사위가 불분명한 상황이었죠. 앞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서너 시간 거리다 하여 다른 봉이려니 했죠. 이듬해 등정시비 건에 대해서도 한동안 합동등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해 인도측이 시비를 거는 것이려니 했습니다.”

 


▲ 2000년 무쿠트파르밧 동봉 전위봉에 오른 김남일씨와 대원들.

    건너편 봉이 아비가민이다.

 

서울산악조난구조대는 2000년 무쿠트파르밧 재도전에 나선다. 찜찜한 부분을 깨끗하게 해결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구조대 부대장이었던 김남일씨는 관례에 따라 원정대장을 맡았다. 그리곤 2차 공격조로서 정상에 올라섰다. “구조대는 짝수연도에 해외원정을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에도 원정이 계획돼 있었는데, 당연히 새로운 산으로 가려고 했었죠. 그렇지만 적어도 서울산악조난구조대가 등정의혹에 휘둘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재등반을 강행했던 겁니다.

 

1차 등정 대원들을 통해 인도측 주장이 맞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맥이 쫙 빠지더군요. 그런데도 2차 공격조에 합류해 98년 오른 봉우리에 올라서는 순간 그 너머로 보이는 게 없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결국 또 다른 봉이 빤히 보이더군요. 기어가도 30분 거리였죠. 98년 등정자들이 그 봉을 보고 서너 시간 거리였다고 한 거죠. 정말 캄캄하더군요.” 김남일 대장은 무쿠트파르밧 동봉 정상에서 내려서다 C3에서 머물렀다.

 

같은 능선으로 연결된 아비가민(7,355m) 정상 공격에 나선 대원들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홀로 거기서 기다렸다. 북서릉~남서벽 루트 초등반이었기에 등반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공격조는 텐트와 취사구까지 지닌 채 한 발 한 발 확인해가면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렵게 2개봉 연속 등정에 성공했는데도, 무쿠트파르밧 동봉 등정이 결국 제2등으로 결론남에 따라 특히 대장인 그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2002년에는 브리구판스(6,772m)를 등반했다. 바로 옆에 솟은 인도 히말라야의 난벽 탈라이사가르(6,904m) 북벽을 등반하는 게 낫다 싶었을 만큼 어려웠던 봉이다. 하루면 가능하리라 예상했던 마지막 캠프 위의 150m 길이 쿨와르를 뚫는 데 나흘이나 걸리고, 3개 봉으로 이루어진 정상부는 어느 봉이 주봉인지 관측되지 않아 세 봉 모두 올라서면서 정상을 확인해야 했다. 김남일 대장은 1차 등정시도 때 C3 상단을 등반하던 후배 대원이 낙석사고를 당하면서 하산해야 했지만, 3차 공격대원들은 한국 초등의 목표를 달성해냈다.

 

구조활동과 더불어 정통 알피니즘 추구

 

김남일 대장은 2003년 서울시연맹-티벳등산협회 에베레스트 합동대의 등반대장을 맡았고, 2004년에는 티벳의 미등봉 로부제쿵 동봉(7,094m) 원정에 참가하는 등 히말라야를 향한 꿈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김 대장이 해외원정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은 후배 대원들이 더욱 열심히 구조활동에 매달리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당연히 봉사정신이 투철한 산악인들이  더욱 열심히 노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중 가장 큰게 해외원정입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구조대원으로서 그의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는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는 한국 산악계에서 정통 알피니스트가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럴 만한 것이 한때 한국 최고의 고산등반가로 일컬어졌던 장봉완(서울시산악연맹 부회장), 김창선씨(성균관대 OB) 외에도 14개봉 완등자인 엄홍길, 토틀클라이머이자 개인등산학교 교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정승권씨 등 국내 대표급 산악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서울시연맹 구조대 출신이다.

 

게다가 83년 북한산과 도봉산에 경찰산악구조대가 상주하기 전까지는 이 일원의 조난자 구조는 거의가 서울시연맹 구조대가 도맡아 정통파 산악인을 대변하는 모임으로 뭇 산악인들의 신임을 받기에 이르렀다. 구조에는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생명인 만큼 지금도 서울시연맹 구조대엔 70~80년대식 규율이 퍼렇게 살아 있다. “올해로 34년 역사의 구조대입니다. 구조대는 구조활동을 통해 좀더 어려운 루트를 등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동계와 하계 때는 해외원정을 대비해 1주일씩 산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 2004년 티벳 로부제캉 BC에서 구조대 자문위원들과 함께. 맨 왼쪽은 김남일씨의 아내 신연수씨   - - ->

 

그렇지만 신입 대원은 한동안 적응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위계질서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힘듭니다. 선배의 말은 곧 지상 명령과 같으니까요. 개인주의와 등반의 경기화가 가속화되면서 정통 알피니즘은 많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구조대만큼이라도 정통 알피니즘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김남일 대장은 83년 창립한 경찰산악구조대나 119구조대가 사고자 구조나 후송에 주력하고 있으므로 서울산악조난구조대는 사고예방활동에 신경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 근교 암벽 루트 상의 노후된 확보물 교체, 낙석 제거, 낙석방지철책 설치 등 사고예방 활동에 힘써왔고, 지난 가을에는 몇 년 새 급격히 늘어난 암릉 사고를 막기 위해 대한산악연맹이 제작한 암릉등반 가이드북을 대원들과 함께 암릉 기점까지 찾아가 배포하기도 했다. “확보물 교체작업 때 처음에는 너희들이 뭔데 길을 막느냐며 화를 내는 클라이머들이 있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도를 알고 오히려 고마워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암릉등반은 무엇보다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줄도 묶지 않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추락하면 거의 죽음인데 말이죠. 헬밋은 꼭 써야 합니다. 한동안은 일반 산악회도 그렇고 저희 구조대원들까지도 고참들은 안 쓰고 등반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김 대장은 재작년부터 금강산 산악활동에도 열중하고 있다. 분단 이후 남한 산악인 최초의 구룡폭·비봉폭 빙벽등반을 2004년 1월 초 성사시키는가 하면, 지난해 가을에는 암벽루트 개척에 이어 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암벽등반 기술교육까지 했다.

 

“구룡폭·비봉폭 빙벽등반은 원로산악인 고 김정태 선생이 일제 때인 1935년 2월 첫 시도한 이래 금강산에서 60여 년만에 이루어진 본격 빙벽등반이었습니다. 지난해 9월 초에는 대원 20명이 참가, 금강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구룡폭포 우측벽인 구룡대에 아산길과 독립문길이라는 바윗길을 냈습니다. 재미교포 산악인이 등반한 적은 있지만, 한국 국적 산악인이 금강산 암벽을 등반하기는 해방 이후 저희가 처음이었습니다.”

 

김 대장이 금강산 빙벽등반을 떠올린 것은 2003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 만난 일본팀의 말을 들은 직후였다. 대원 중 한 명인 조총련계 재일교포가 “금강산에 등반가치가 높은 빙폭이 많다”고 귀뜸해줘 금강산 빙폭 초등만큼은 일본인들에게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현대아산측과 교섭을 벌여 빙벽등반을 이끌어낸 것이다.

 

 
▲ 서울산악조난구조대 한라산 동계훈련 중 대원들에게 등반

    사항을 지시하는 김남일 대장.

 

김남일씨가 제6대 구조대장으로 추대된 것은 선배들로부터 기획력과 친화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재능은 곧 발휘됐다. 취임 직후 사회적으로 기반을 잡은 선배 산악인들로 구성된 구조대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재정적인 도움을 끌어냈다. 최근에는 서울시로부터 구조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끌어냈다. 취재 도중 그는 후배들에게서 여러 차례 전화를 받았다. 서울시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준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이 날 오후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에 관한 건 때문이었다.

 

 “지난해 로부제캉 등반 때는 완벽한 ‘따까리(설거지 담당 막내를 이르는 속어)’로 지냈습니다. 그 동안 도와준 선배들을 모시고 안나푸르나 푼힐과 에베레스트 BC를 거쳐 로브제캉 BC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트레킹을 했으니까요. 그 분들 도움이 아니면 사실 구조대가 원활하게 굴러가기 어렵습니다. 올해부터는 서울시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만약 해마다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구조대 발전을 위해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노후된 장비와 확보물 교체에도 쓰고, 아껴서 후배들 등반에 지원해줄 수 있다면 그만큼 한국 산악계도 발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후배들이 또 다른 후배를 키워낼 테니까요.” “남북 산악인이 손잡고 오를 날이 기다려집니다”

 

그는 마흔을 훌쩍 넘어섰었는데도 클라이머로서의 꿈도 크다. 올해는 후배들과 함께 인도히말라야의 난벽인 탈라이사가르 북벽과 조긴(6,850m) 원정에 나선다. 탈라이사가르는 우리나라 팀으로서는 열두번째 도전이다. 그 중 한 팀은 북서릉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렇지만 북벽은 아직도 완등해낸 팀이 없다. 98년 가을 기대를 모았던 고 신상만·최승철·김형진 팀마저도 ‘코리안 다이렉트’ 직등루트를 뚫고 거의 다 올랐지만 정상을 100m도 채 남겨놓지 않은 설원에서 추락사했다. 그 루트를 완성시킬 계획이다.

 

“그 동안 등반한 팀들에게서 북벽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98년 3인조 외에 다른 팀들이 돌파하지 못한 블랙타워를 넘어설 비책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저희 대원들은 고산등반 경험이 많습니다. 물론 등반력도 뛰어나고요. 조긴은 브리구판스 등반 때 이미 정찰한 봉입니다. 난이도가 높지 않아 탈라이사가르 북벽 등반을 앞두고 고소적응하기에 적당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 97년 레이니어 등반. 왼쪽서부터 김남일, 전서화, 이상록씨.

 

개인적으로 인도 히말라야의 미봉 난다데비 주봉을 등반하고 싶어한다. 인도 육군팀이 초등한 이후 아직까지 외국의 어느 팀에게도 등반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 봉우리다. 그와 더불어 에베레스트를 다시 찾고 싶어한다. 이미 구조대가 소속된 대한적십자사에 남북 산악인 에베레스트 등반계획서를 제출해 놓았다. “금강산 구급봉사대원들에게 등반기술을 가르친 것도 이들 중 몇 명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습니다. 남한과 북한 산악인들이 힘을 모아 세계 최고봉에 올라선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통일은 민초들 차원에서 서서히 무르익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메카해운항공에서 재미를 못 본 김남일씨는 99년 디자인메카라는 광고제작업체를 차렸다. 생소한 사업인지라 초반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곧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2000년 이후 아웃도어 레저용품의 호황이 그의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요즘 김남일씨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내와 아들 경래군(중 1년)이 미국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수시로 다녀가기는 하지만 기러기 아빠이다. 그런데도 산악활동과 사업으로 너무 바빠 외로워할 시간이 없다는 그다.

 

- 글 / '월간 산' [436호 2006.02.]  한필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