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paxlee 2007. 9. 1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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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등불 사마천 사기(史記)

 

   

문학과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중국 문화의 원류를 담았다. 
 

사마천 (司馬遷, Sima Qian ) - 사마가 성, 이 이름, 자는 자장(子長)이다.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

 

 

사기(史記) 편찬자 사마천(司馬遷)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司馬)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 이어 사마천 역시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지냈다. 천문을 관측하고 역법(달력) 개정하며 황제의 측근에서 각종 기록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이에 따라 [사기] 본래 제목은 태사령 벼슬을 사람이 저술한 ,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오늘날처럼 [사기]라는 제목으로 불린 것은 삼국 시대 이후부터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 역시 역사를 서술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천은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젊은 시절에는 한나라의 전역을 여행하면서 각지의 문물과 역사를 익혔다. 사마천은 자신의 나이 36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의 업무에 전념하면서 대략 기원전 10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집필에 착수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역사에 깊은 관심을 키웠다.

 

[사기] 집필 경위와 사마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는 '태사공자서' 부분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소자 비록 모자라오나 아버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고 예전부터 듣고 것을 남김없이 서술하여, 조금도 빠진 부분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기원전 99년에 장군 이광리(李廣利) 부하로서 흉노 정벌에 나섰던 이릉(李陵)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이릉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5천명의 보병 부대를 이끌고 출정했다가 8만이나 되는 흉노의 기마 부대에 포위되었다. 이릉은 심한 부상을 당해 쓰러져 흉노에게 사로잡혔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사로잡힌 이릉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다. 결국 무제의 노여움을 궁형(宮刑), 그러니까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을 받았다.

 

죽음보다도 잔인한 형벌에 처해진 사마천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열심히 [사기] 집필에 몰두했다. [사기] 집필하여 후세에 길이 남기겠다는 마음 하나로 치욕을 견디었던 것이다. 그가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 그런 심정이 드러나 있다. '마치 쓰레기더미에 갇힌 같은 지금의 처지를 참고 견디는 것은, 저의 문장이 후세에 전하여지지 않을까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원전 91 55 [사기] 완성했다.

 

 

궁형을 당하기 전의 모습과 궁형을 당한 후의 모습.
수염이 없어지고 얼굴이 중성으로 바뀌어져 있다.

 

[사기]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 불린다. 기전체에서 ()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황제로부터 한나라의 무제에 이르는 역대 왕조의 제왕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기와 이외의 부분도 있다. 세가(世家) 황제를 떠받드는 여러 제후국의 역사이며, () 연표이고, () 경제, 법률 분야의 제도를 기록한 부분이다.

 

기는 본기(本紀), 전은 열전(列傳)으로 부르기도 한다. 본기 12, 10, 8, 세가 30, 열전 70권으로 이루어져 모두 130권이다. 이러한 [사기] 구성은 이후 중국 역사 서술의 표준이 되었다. [한서]에서 [청사고](淸史稿) 이르는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 원형을 창조했던 것이다. [사기]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는 것은, 역사를 서술하는 사마천의 자세 때문이기도 것이다.

 

[사기] 열전 부분에서 우리는 의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자객들의 기록인 '자객열전'(刺客列傳), 일종의 코미디언 일대기라고도 있는 '골계열전'(滑稽列傳), 유명한 점쟁이들의 일대기인 '구책열전'(龜策列傳) 등도 있다. 하찮은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받던 그런 사람들의 일대기까지 빠짐없이 기록한 사마천의 자세는, 치우침 없이 사회와 역사의 모든 측면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기겠다는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보여준다.

 


사마천이 기록한 다양한 사회상은 인류문화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천승(千乘) 왕이나 만가(萬家) 제후 그리고 백실(百室) () 조차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는 판에 하물며 일반 서민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떠서 이렇게까지 말한다.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처자식들은 밥벌이를 못할 지경에 처했다. 게다가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술자리를 마련할 돈도 없고 기본적인 의식주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분들에게는 이상 말이 없다.'

 

무척 냉정해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그가 사회의 실상이나 인간의 본성을 무척 현실주의적으로 바라보았음을 보여 준다. 사마천은 역사를 도덕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기] 이후에 나온 중국의 어느 역사서보다도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넘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읽고 느끼고 생각한 역사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자신의 삶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기] 열전의 부분은 '백이전'이다. 은주 혁명에 반대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백이(伯夷) 고사에 대한 사마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는 반드시 착한 사람 편이라는 말이 있지만, 백이 같은 인물은 그처럼 불행해야 했을까?

 

공자의 제자 가장 뛰어났던 안회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이와 반대로 도척 같은 이는 무수한 살인과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하늘의 도의 섭리는 올바른 것일까? 혹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사마천이 사기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라 하지만, 사마천은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도를 찾아보기 힘들지 않느냐는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한 자신의 처지 역시 그런 이의의 근거가 됨은 물론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가 자신들의 운명을 원망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 완성했으므로 원망할 것이 없었다고 답했다. 공자는 인간의 행복과 도덕을 일치시키지만 역사가인 사마천은 행복과 도덕의 모순을 절감했다.

 

사마천이 제기한 의문은 유교적 모럴이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고 있다. 도덕, 당위의 세계와 현실, 사실의 세계 사이에는 넘기 힘든 간격이 있다는 . 사마천은 그런 간격을 메워 초월적인 존재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던 시대를 살았다. 실로 여러 세기가 흐른 불교의 전래 이후에야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런 의문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해답을 모색할 있게 되었다.

 

 

 출처 / http://www.kungree.com/cht/cht4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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