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시즌에 7천미터급 지방원정대 대거 출현 포항 향로산악회가 캉충체(7,678m)봉에 도전장을 낸 것을 비롯, 충남대산악회가 랑탕리룽 (7,234m), 서울산악회가 강가푸르나-안나푸르나 3봉 종주, 한국산악회 대구지부에서 참랑 (7,319m), 한국중공업산악회에서 팡(7,647m)봉을 목표로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이들 5개 원정 대 중에서 강가-안나 3봉 종주에 도전한 서울산악회를 제외하면 모두가 지방원정대였다. 지방팀 들의 히말라야 진출은 84년 이후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왔는데 86년에 와서는 서울의 원정 대 수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
캉충체에 초행자 3명 등정 포항 향로산악회 캉충체원정대
포항 향로산악회는 83년에 인도히말라야의 눈(7,135m)봉 을 등정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9명의 대원으로 원정대를 꾸렸다. 참가자는 이동연대장(29)을 비롯하여 문민식(28), 도재율(29), 김영범(29), 김춘배(28), 권오석(27), 박태규 (27), 심재영(27), 권필화대원(여·23) 등 20대의 초행자로 만 구성되었다.
3킬로미터 떨어진 위성봉으로 티베트 쪽으로 캉슝빙하, 남 서쪽으로는 바룬빙하를 사이에 두고 있다. 54년 마칼루를 정찰차 온 프랑스대에 의해 마카루 라를 거쳐 남릉으로 초 등정되었다. 산 이름은 작은 빙하란 뜻의 ‘캉슝’과 봉우리 라는 뜻의 ‘체’의 합성어이다.
북서릉으로 등반을 개시, 이로부터 17일간 세 개의 캠프를 전진시켜 3캠프(7,080m)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10월 6일 1차 정상등정을 노렸으나 악천후로 7,400미터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10월 9일 재차 정상공격에 나선 이동연, 박태규, 심재영대원이 오후 1시 45분 한평 남짓 한 조그마한 정상에 올랐다. 전원 초행자로 구성된 원정대가 이룬 최대 성과였다. |
랑탕리룽 남서릉 초등에 5명 등정 충남대산악회 랑탕리룽원정대
(7,234m) 원정대는 10월 10일 윤건중대 장(33)과 윤계중(30), 송석희(28), 신창 진(25), 전언식대원(22) 등 5명이 한꺼 번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등 정자 외에 홍봉식 단장, 차용석(31) ,박 홍범대원(30) 등 전부 8명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6천미터의 제 3캠프에서부터 알파인스타일로 등반, 6,800미터 지점에서 한 번의 비박을 하고 7천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치고 다음날 10시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영국의 틸만 일행이 이 산을 최초로 답사한 이후 59년부터 78년까지 일본대가 6차례나 공략한 끝에 78년 10월 24일 리룽빙하를 통과해 동릉으로 초등정하는 데 성공한 산이다. 그후 한국팀 이 도전한 86년까지 일본대가 80, 81년에 두 차례, 그리고 82년에 이태리팀이 등정을 추가해 모두 4번의 등정이 이루어졌고 82년 가을시즌부터 85년까지는 프랑스, 미국, 캐나다 등 3개국 5개 팀에게 계속적인 패배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앞의 팀들이 등정한 곳은 남릉과 남동릉 이었고 한국대가 입산허가를 받은 남서릉으로는 등정한 팀이 없었다.
대팀은 9월 18일 베이스캠프(4,280m)를 건설하고 곧바로 등반에 들어갔다. 20일 4,850미터에 전진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남서릉을 향해 출발 23일 1캠프(5,100m), 27일 2캠프(5,500m), 10월 1일 3캠프(6,100m) 설치를 마쳤다. 여기서 5명의 대원과 1명의 셀파가 3일분의 식량을 지참하고 정상공격에 나서 2일 만에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전 등반과정을 비디오 카메 라로 생생히 기록하는 치밀함도 보여주었다. |
쿰부히말의 ‘큰 새’ 참랑도 등정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참랑원정대
프를 출발한 세 대원은 하룻밤을 비박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날개치는 큰 새’라는 뜻을 가진 참랑(Chamlang)은 쿰부히말라야에 위치한 산으로 62년에 일본대에 의해 초등된 이후 78년까 지 입산이 금지되다가 78년에야 해금되었다. 그후 81년과 84년 영국 합동대가 도전했으나 각각 중앙봉과 동봉에 도달하는 데 그쳤다. 그러니까 한국대의 등정은 62년 초등 이후 두 번째 등정 이었다. |
안나푸르나 3개 봉 도전한 두 팀 역부족 패퇴
3봉에 도전했던 서울산악회팀은 뜻하지 않는 폭설로 이렇다 할 등반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중 도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대원은 김정대장(33)을 비롯해서 한상원(29), 한익희(32), 원장연 (30), 김학주(28), 조중호(26) 등 6명으로 이루어졌었다.또한 안나푸르나 산군에서는 가장 등 반이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는 팡(Fang)봉에 도전하여 주목을 받은 창원 한국중공업산악회팀 도 루트의 어려움과 계속되는 악천후로 초반에 간단히 물러섰다. 한때 핑거봉이라고도 불렸던 팡봉은 영어로 어금니를 뜻한다. 이 산은 안나푸르나 주봉에서 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돌출되어 있는데 접근이 어려워 80년에야 오스트리아팀에 의해 남쪽루트로 초등정되었다. 김종덕대장(35)을 비롯해서 최영대, 김성모, 윤대원, 김원득, 신현욱대원 등 6명으로 구성된 한국대는 이 산을 동벽으로 등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5,450미터에서 맥없이 물러서고 말 았다. 이로써 5개의 원정대가 활약했던 86년 가을시즌은 3개 봉 등정성과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
계속되는 에베레스트 동계원정과 좌절 그 열기가 식지 않고 86년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통상루트인 남동릉과 어렵기로 유명한 남서 벽에 각각 한국대가 출사표를 던졌다. 86년 겨울에 히말라야를 찾은 4개의 한국대 중에는 8천 미터급 원정대가 3개 팀이나 되었다. 두 팀은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그리고 한 팀은 다울라기리 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결과는 세 팀 모두가 정상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 |
에베레스트 남동릉팀 사우스콜에서 단념 원(32)을 비롯하여 바인타브락과 알프스 3대 북벽을 등정한 바 있는 유한규(30), 그리고 허종행 (24·동국대), 한숙(21·이대법정대), 남기탁(43·부산산악인), 이상만(23·서유여행사)대원 등 전 부 7명으로 구성되었다. 오대장은 84년 겨울에 이미 고배를 마셔본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소수 정예로 대원을 편성해 속전속결로 등반을 끝낸다는 전략을 세웠다. 셀파는 에베레스트를 세 번 등정한 순다레를 비롯해 6명을 고용했다.
가 고소순응을 위해 사우스 콜(8,000m)까지 진출했다. 12일에는 유대원과 순다레 셀파가 사우 스 콜까지 도달하고 하산했다. 그리고 17일부터 정상등정을 위한 본격등반에 들어갔으나 때마 침 폭설이 내려 등반이 지연되었다. 12월 22일 허대원과 순다레 셀파는 다시 사우스 콜에 올라 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동계의 강풍은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 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생 끝에 밤 10시가 넘어서 2캠프(6,400m)로 내려왔다. 그동안 이들과 연락이 두절되자 실종된 것으로 판단, 2캠프를 철수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것으로 남동릉팀의 등반은 간단히 막을 내렸다. |
남서벽팀 8,300미터 지점까지 진출 서벽 하단부에서 고배를 마신 바 있는 박영배대장(38)이 조직한 이 원정대는 남순철(35), 진설 희(28), 엄홍길(26), 김상일대원(24) 등 전부 5명의 소수인원으로 꾸려졌다. 남서벽을 등반하 기에는 아무래도 적은 수였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이들은 10명의 셀파를 고용했다. 12월 18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극심한 일기변화와 강풍에 시달리면서 25일에야 남서벽이 시작되는 2캠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등반은 수월치 않아 해를 넘긴 87년 1월 20일에야 7,500 미터 지점의 급경사면에 1동의 박스텐트를 설치했다.
그곳은 과거 원정대들이 4캠프를 설치한 곳으로 한국대에 의해 최초로 1개의 캠프가 단축된 것이다. 이어서 27일에는 약 8천미터 지점에 또 하나의 박스텐트를 가설하면서 네 번째 캠프가 완료되었다. 이제 걸리를 통과하여 록 밴드에 한 개의 캠프만 더 설치하면 곧바로 정상공격을 단행할 수 있게 되었다.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한 원정대는 다음날부터 남서벽 등반의 최대 관건 인 걸리(Gully)에 고정로프를 설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3일 뒤인 1월 30일 드디어 엄 홍길대원과 두 셀파가 낙석이 심한 걸리를 통과하여 록 밴드 8,300미터지점까지 고정로프를 연 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상공격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정로프가 끊기면서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셀파들은 의욕을 상실하고 등반을 거부했 다. 몇몇 셀파는 등반의사를 밝혔으나 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원정대로서는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했다. 남서벽대는 겨울시즌 허가기간을 전부 소모하면서 지구전을 펼쳤으나 8,300미터 록밴드까지 진출하는 성과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정상 140미터 남기고 후퇴한 다울라기리 원정대 1캠프(5,600m) 설치에 이어 북동릉에 2캠프(6,400m), 3캠프(7,000m)를 올렸다. 그리고 12월 24일에는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중간에 4캠프(7,400m)를 설치했다. 이어서 다음날 정상호대원 과 셀파 1명이 공격에 나섰지만 정상을 불과 140여 미터 남긴 8,025미터 지점에서 심한 바람으 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미 손과 발이 얼어오고 있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정상을 불과 140 미터 남겨두고 통한의 후퇴를 하게 되었다. 84년 푸타히운출리 등정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는 조정술대장(41)을 비롯 정상호(32), 윤대효(31), 양학술(26), 김진관대원(26) 등 5명의 정예대 원이 참가한 이 원정대는 지방에서 시도한 최초의 8천미터급 원정이었기에 주목을 받았었다. |
로부제 서봉에서 동계초등정 개가 넘긴 87년 1월 1일에 출국해서 15일에 4,8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이어서 동릉 으로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1캠프(5,300m)와 2캠프(5,800m)를 전진시킨 후 31일 박재홍, 최 상현, 심상일대원과 셀파 2명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희봉대장(32)의 지휘아래 윤석영(34), 박재홍(33), 최상현(32), 심상일(21), 김일권대원(39) 등 6명으로 이루어진 이 원정대는 이 산 의 제2등과 동시에 동계초등정이란 기록을 남겼다. |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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