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벗긴 17년 전의 추렌히말 등정 의혹
중동고 산악부 졸업생들로 구성된 원정대는 도창호대장(36·77년 에베레스트원정대원)의 지휘아래 지훈구(32), 김은창(28), 신장섭(25), 이정근(25), 장인수(25), 조원철(24), 이상만(24), 천성구대원 등 9명으로 짜여졌다. 이들이 ‘시비의 산’ 추렌히말의 카페빙하 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것은 4월 6일, 그로부터 34일간의 전진끝에 다섯 번째 캠프(6,650m)를 설치한 것은 5월 10일. 등반로는 70년 당시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본래 같은 높이의 서봉과 중앙봉도 함께 등반하려 했으나 네팔관광성의 규정에 각기 입산료를 지불하게 되어 있어 동봉만을 택해 올랐다. 5월 11일 새벽 5시 40분, 17년 전보다 250미터가 높은 5캠프를 출발한 김은창대원과 셀파는 4시간 만에 예리한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동봉으로 이어지는 동릉의 첫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동봉까지는 불과 1킬로미터도 안 떨어져 보였다. 리지의 양쪽 벽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었고 전진할수록 능선은 더욱 칼날 같아져 어떤 자세로도 전진이 어려웠다.
11시 40분에 고도 7,200미터까지 전진했으나 그 속도로는 하루에 정상을 왕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보고를 받은 대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동릉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또하나의 캠프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장비와 식량은 이미 고갈되어 버렸다. 정상 부분의 동릉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다음해의 재도전을 다짐하며 카페빙하를 떠났다.
렌포강에서 등로주의 실현한 전남의대팀
이들은 1캠프까지 이르는 구간을 ‘토왕길’, 그리고 3캠프가 있는 능선까지의 구간을 ‘하늘길’로 명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상등정. 9월 27일 오전 6시 20분 이정훈, 김수현대원과 두 셀파가 3캠프를 떠났다. 이들은 7시경 정상 피라밋 아래를 통과하여 8시 15분 마침내 정상을 밟았다. |
허영호, 숙원의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 이룩 87년 한국산악계의 핫 이슈는 이해 겨울철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나왔다. 에베레스트와 캉첸중가, 그리고 고줌바캉 등 자이언트급 봉에 출사표를 던진 3개의 한국대가 전부 성공을 거둬 87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12월 22일에 있었던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동계등정은 84년 이후 한국산악계에 가장 크게 부각되었던 관심사를 한꺼번에 풀어준 쾌거였다. 즉 고상돈에 이은 제2의 에베레스트 등정과, 계속적으로 고배를 마시던 ‘겨울철’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준 것이다.
허대원은 그 다음날 단신으로 재차 정상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혼자서 남봉과 힐라리 스텝을 통과할 수는 없다고 판단, 또다시 후퇴의 길을 택했다. |
세계 3위봉 캉첸중가 동계등정과 의혹 캉첸중가는 55년 에반스대장이 이끈 영국대가 얄룽빙하를 경유하여 남서면으로 초등정한 이래 77년 인도대가 북동릉으로 두 번째 등정을 이루었고, 78년 봄에는 스페인대가 중앙봉을, 폴란드대가 남봉을 초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북면으로 영국과 일본이 새 루트를 뚫었으며 82년에는 메스너 일행이 최초로 무산소등정에 성공하는 등 87년까지 통산 21회의 등정이 이루어졌다. 부산의 대륙산악회가 이 원정을 추진할 85년 당시만 해도 이 봉은 동계 미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86년 겨울 폴란드의 쿠쿠츠카 일행이 먼저 등정해 버렸다.
그곳의 고도가 8,500미터. 이제 불과 80미터 밖에 안 남은 것이다. 이곳에서 이대원은 3시간 20분이나 걸려 혼자 등반한 끝에 캉첸중가 정상에 섰다. 86년 폴란드에 이어 이 산에 대한 두 번째 동계등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정철대원의 등정은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동계등정에 버금가는 성과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정상에서 카메라 작동 미숙으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가뜩이나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국내산악계에서 등반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정상사진을 완성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등정 시비라는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고교생들이 이룬 고줌바캉 동계초등정
한편, 이해 겨울시즌 마감을 불과 4일 앞둔 88년 2월 11일 광운전자공고에 재학중인 두 고교생이 네팔 쿰부히말라야에 있는 고줌바캉(7,743m)을 동계초등정했다는 외신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것은 국내는 물론 히말라야 등반사상 매우 특이한 등반으로 기록되었다. 불과 10대 후반의 고교생들이 이 산을 등정했다는 것은 세계 최연소 등정기록으로, 30대가 넘어야 고소적응에 유리하다는 이때까지의 통념을 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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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과 함께 8천미터급 원정 확산
따라서 한국산악계의 해외원정도 그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대거 양산되었다. 이해의 빅 이벤트라 할 수 있는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로체 동시등정 계획은 당초부터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었다. 88년에 가장 많은 한국원정대가 몰린 곳은 단연 히말라야였다. 이해의 히말라야 진출은 봄에 1개 팀, 가을에 9개 팀, 겨울에는 3개 팀으로 모두 13개 팀을 기록했다. 특히 8천미터를 목표로 한 팀이 5개 팀이나 되었는데, 파키스탄의 브로드피크(8,047m)와 낭가파르밧(8,125m), 그리고 네팔히말라야의 로체(8,516m), 다울라기리 1봉(8,167m)에 각 한 팀이, 에베레스트(8,848m)에는 가을(로체와 동시목표)과 겨울에 1팀씩 출사표를 던졌다.
이것은 한국의 히말라야 진출사상 한해동안 가장 많은 8천미터급 원정대를 파견한 기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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