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6-1] (1987~1988년) *-

paxlee 2007. 9. 21. 21:24

 

못벗긴 17년 전의 추렌히말 등정 의혹


중동산악회 추렌히말원정대


87년 국내 첫 히말라야 원정대는 봄시즌의 추렌히말(7,371m)원정대였다. 중동산악회가 꾸린 이 원정대는 중동고 설립 80주년을 기념하는 것 외에도 70년 한국대의 초등정 의혹을 풀어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의 첫 페이지에 남아 있는 추렌히말 초등정에 대한 의문부호는 그 비중으로 봐서 반드시 진위가 밝혀져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중동고 산악부 졸업생들로 구성된 원정대는 도창호대장(36·77년 에베레스트원정대원)의 지휘아래 지훈구(32), 김은창(28), 신장섭(25), 이정근(25), 장인수(25), 조원철(24), 이상만(24), 천성구대원 등 9명으로 짜여졌다. 이들이 ‘시비의 산’ 추렌히말의 카페빙하 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것은 4월 6일, 그로부터 34일간의 전진끝에 다섯 번째 캠프(6,650m)를 설치한 것은 5월 10일. 등반로는 70년 당시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본래 같은 높이의 서봉과 중앙봉도 함께 등반하려 했으나 네팔관광성의 규정에 각기 입산료를 지불하게 되어 있어 동봉만을 택해 올랐다. 5월 11일 새벽 5시 40분, 17년 전보다 250미터가 높은 5캠프를 출발한 김은창대원과 셀파는 4시간 만에 예리한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동봉으로 이어지는 동릉의 첫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동봉까지는 불과 1킬로미터도 안 떨어져 보였다. 리지의 양쪽 벽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었고 전진할수록 능선은 더욱 칼날 같아져 어떤 자세로도 전진이 어려웠다.

 

11시 40분에 고도 7,200미터까지 전진했으나 그 속도로는 하루에 정상을 왕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보고를 받은 대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동릉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또하나의 캠프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장비와 식량은 이미 고갈되어 버렸다. 정상 부분의 동릉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다음해의 재도전을 다짐하며 카페빙하를 떠났다.

렌포강에서 등로주의 실현한 전남의대팀



전남의대산악회 렌포강원정대

▲ 87년 9월, 렌포강(7,083m) 서벽을 개척하고 있는 전남의대산악회팀 대원들. 이 루트는 후에 하늘길이라고 명명되었다.

가을시즌의 유일한 원정대는 전남의대산악회가 꾸린 렌포강원정대였다. 이들은 국내 최초로 꾸려진 의과대학 단일팀으로 현역의사와 의과대학 재학생들로 구성되어 관심을 끌었다.
네팔 중부의 쥬갈히말라야 최고봉인 렌포강(7,083m·1983년 네팔관광성은 6,979m로 발표)은 크고 하얀 산이란 뜻의 ‘빅 화이트 피크(Big White Peak)’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1955년에 이 산을 처음 등반한 영국여성대가 붙인 이름으로 그들의 뜻을 존중하는 뜻에서 한동안 그렇게 불렸었다. 그러나 후에 이 산의 고유명칭이 티베트어로 ‘설산’을 의미하는 렌포강(Lenpo Gang)임이 밝혀져 네팔정부가 공식 사용하게 되었다.


렌포강은 일본대가 60년부터 3차례에 걸쳐 초등정을 시도한 끝에 62년 5월 3일 이 산의 동쪽에서 중앙릉을 경유하여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후 중국과의 정치적인 이유로 20년 동안 등반이 허가되지 않다가 82년에 와서 일본의 동해대학팀이 동릉으로 제2등을 기록했다. 그러니까 한국대는 이 산의 세 번째 등정을 노리고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참가자는 윤재룡단장(56)과 조석필등반대장을 중심으로 권현(32), 홍운기(23), 이정훈(23), 김수현대원(21) 등 6명이었다.


전남의대팀이 랑시샤빙하를 거슬러 올라가다 4,75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것은 9월 3일. 이곳에서 전진 베이스캠프(5,000m)를 거쳐 9월 22일에는 전인미답의 서벽에 1캠프(5,750m), 2캠프(6,200m), 3캠프(6,650m)를 전진시켰다. 전남의대가 돌파한 서벽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거나 극심한 난이도를 가진 루트는 아니었으나 서벽 전체를 가르고 있는 빙괴의 눈사태를 피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이들은 1캠프까지 이르는 구간을 ‘토왕길’, 그리고 3캠프가 있는 능선까지의 구간을 ‘하늘길’로 명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상등정. 9월 27일 오전 6시 20분 이정훈, 김수현대원과 두 셀파가 3캠프를 떠났다. 이들은 7시경 정상 피라밋 아래를 통과하여 8시 15분 마침내 정상을 밟았다.
이 등정은 호남 지역에서 이룩한 최초의 히말라야 등정이며, 국내에서도 손꼽을 만한 등로주의 등반으로 기록되었다.

허영호, 숙원의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 이룩



한산합동 동계 에베레스트원정대



87년 한국산악계의 핫 이슈는 이해 겨울철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나왔다. 에베레스트와 캉첸중가, 그리고 고줌바캉 등 자이언트급 봉에 출사표를 던진 3개의 한국대가 전부 성공을 거둬 87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12월 22일에 있었던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동계등정은 84년 이후 한국산악계에 가장 크게 부각되었던 관심사를 한꺼번에 풀어준 쾌거였다. 즉 고상돈에 이은 제2의 에베레스트 등정과, 계속적으로 고배를 마시던 ‘겨울철’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준 것이다.


86년 겨울에 이미 한 차례 고배를 마신바 있는 허영호(34)는 이번에는 함탁영대장(48·82년 마칼루 원정대장)이 꾸린 한산합동대의 대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 원정대의 스폰서이면서 직접 참가한 김일권단장(38)을 비롯해서 신승모부대장(40), 최종열(29), 정갑수(28), 손재식(31), 김춘수(32), 김재신대원(30)까지 포함하여 모두 9명이 참가한 원정대였다.

▲ 87년 12월 22일 한국산악인으로는 10년 만에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오른 허영호. 그의 등정은 겨울철로는 네번째였다.

이들은 11월 30일 해발 5,400미터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한 후 빠른 전진을 보여 12월 4일 1캠프(6,100m), 6일에는 남서벽 하단에 2캠프(6,500m), 10일에 로체 페이스 상단 빙설벽에 3캠프(7,200m), 그리고 18일에는 최종 캠프를 사우스콜(7,980m)에 설치했다. 그리고 12월 19일 허대원과 셀파가 1차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남봉 부근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다가 뒤돌아서고 말았다.

 

허대원은 그 다음날 단신으로 재차 정상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혼자서 남봉과 힐라리 스텝을 통과할 수는 없다고 판단, 또다시 후퇴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12월 22일 새벽 1시 허대원은 앙리타 셀파와 세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두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길을 찾아 올랐다. 마침 날씨는 쾌청하게 맑았다. 오전 6시에는 남릉 허리에 도달했고, 11시에는 남봉 위에 올라섰다. 마지막 난관인 힐라리 스텝을 넘어섰을 때는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 이곳에서 날카로운 정상설릉을 1시간 넘게 전진한 끝에 오후 2시 20분, 드디어 최고봉의 정상에 섰다.

세계 3위봉 캉첸중가 동계등정과 의혹



대륙산악회 동계 캉첸중가원정대



캉첸중가는 55년 에반스대장이 이끈 영국대가 얄룽빙하를 경유하여 남서면으로 초등정한 이래 77년 인도대가 북동릉으로 두 번째 등정을 이루었고, 78년 봄에는 스페인대가 중앙봉을, 폴란드대가 남봉을 초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북면으로 영국과 일본이 새 루트를 뚫었으며 82년에는 메스너 일행이 최초로 무산소등정에 성공하는 등 87년까지 통산 21회의 등정이 이루어졌다.
부산의 대륙산악회가 이 원정을 추진할 85년 당시만 해도 이 봉은 동계 미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86년 겨울 폴란드의 쿠쿠츠카 일행이 먼저 등정해 버렸다.

▲ 부산대륙산악회 87년 동계 캉첸중가원정대원들.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정철, 한 사람건너 이주이, 이재춘대원. 해를 넘긴 88년 1월 2일 이정철대원이 단독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으나 후에 정상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의혹을 받았다.

대륙산악회는 이 산의 두 번째 동계등정을 목표로 원정대를 결성했다. 전해에 정찰을 다녀온 바 있는 정상무대장(49)을 중심으로 하해룡(37), 이성호(35), 이주이(26), 이재춘(34), 성자영(40), 이정철(34), 이종연대원(26)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된 원정대였다. 이들은 선편으로 보낸 원정화물 지연으로 선발대를 먼저 보내 12월 10일 얄룽 빙하 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케 했다. 그러나 후발대로 오던 이성호대원이 갑자기 고산병 증세로 절명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대원의 죽음에도 이들은 등반을 속행, 12월 31일 네 번째 캠프(8,00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88년 1월 1일 이주이대원과 두 명의 셀파가 무산소로 정상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대원은 8,470미터의 암벽지대에 이르렀을 때 양쪽 발가락에 동상증세가 있는 것을 알고 과감히 후퇴했다. 1월 2일, 이번에는 이정철대원과 세 명의 셀파가 두 번째 공격에 가담했다. 이대원은 산소통 하나를 지고 20~30분 간격으로 약간씩만 마시면서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지친 셀파들은 도중에 차례로 등정을 포기한 채 하산해 버리고 결국에는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곳의 고도가 8,500미터. 이제 불과 80미터 밖에 안 남은 것이다. 이곳에서 이대원은 3시간 20분이나 걸려 혼자 등반한 끝에 캉첸중가 정상에 섰다. 86년 폴란드에 이어 이 산에 대한 두 번째 동계등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정철대원의 등정은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동계등정에 버금가는 성과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정상에서 카메라 작동 미숙으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가뜩이나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국내산악계에서 등반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정상사진을 완성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등정 시비라는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교생들이 이룬 고줌바캉 동계초등정



광운공고OB산악회 동계 고줌바캉원정대



한편, 이해 겨울시즌 마감을 불과 4일 앞둔 88년 2월 11일 광운전자공고에 재학중인 두 고교생이 네팔 쿰부히말라야에 있는 고줌바캉(7,743m)을 동계초등정했다는 외신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것은 국내는 물론 히말라야 등반사상 매우 특이한 등반으로 기록되었다. 불과 10대 후반의 고교생들이 이 산을 등정했다는 것은 세계 최연소 등정기록으로, 30대가 넘어야 고소적응에 유리하다는 이때까지의 통념을 깬 것이었다.


등정자는 유광렬(19), 최미호대원(17)으로 정진양대장(41), 이창호(36), 용철호(35), 이용원(29), 최상현(33)과 함께 이 등반에 참가했다. 겨울시즌이 거의 다 지나간 1월 25일 베이스캠프(5,100m)를 설치한 광운공고팀은 2월 9일까지 네 개의 캠프를 전진시켰다. 그리고 2월 11일 새벽 6시 유광렬, 최미호대원이 셀파 3명과 함께 7,300미터에 있는 네 번째 캠프를 떠나 10시간 28분을 등반한 끝에 오후 4시 28분 정상에 선 것이다. 고줌바캉 동계초등정의 성과도 캉첸중가 동계등정과 마찬가지로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동계등정에 가려져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국, 올림픽과 함께 8천미터급 원정 확산


히말라야 원정대의 급격한 증가와 8천미터 등정 열기가 높아지고 있던 세계산악계의 경향은 88년 한국산악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87년에 불과 5개 팀이 진출해 히말라야에 대한 원정 열기가 한풀 꺾이는 듯했던 한국산악계는 88년에 다시 13개 팀으로 급증했다. 8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 있었고, 20년 이상 지속되던 강권정치가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된 해였다.

 

따라서 한국산악계의 해외원정도 그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대거 양산되었다. 이해의 빅 이벤트라 할 수 있는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로체 동시등정 계획은 당초부터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었다. 88년에 가장 많은 한국원정대가 몰린 곳은 단연 히말라야였다. 이해의 히말라야 진출은 봄에 1개 팀, 가을에 9개 팀, 겨울에는 3개 팀으로 모두 13개 팀을 기록했다. 특히 8천미터를 목표로 한 팀이 5개 팀이나 되었는데, 파키스탄의 브로드피크(8,047m)와 낭가파르밧(8,125m), 그리고 네팔히말라야의 로체(8,516m), 다울라기리 1봉(8,167m)에 각 한 팀이, 에베레스트(8,848m)에는 가을(로체와 동시목표)과 겨울에 1팀씩 출사표를 던졌다.

 

이것은 한국의 히말라야 진출사상 한해동안 가장 많은 8천미터급 원정대를 파견한 기록이었다.
88년의 7천미터급 원정대는 5개 팀으로 울산합동대가 다울라기리 6봉(7,268m)과 구르자히말(7,193m) 등 2개 봉에 도전한 것을 비롯 추렌히말(7,371m), 라키오트(7,070m), 갸충캉(7,952m), 눕체 북서봉(7,745m) 등 6개 봉이 한국대의 목표가 되었다. 그밖에 6천미터급 원정대도 3개나 있었는데 가을시즌에 눔부르(6,957m)에 1개 팀, 그리고 아마다블람(6,812m)에는 가을과 겨울시즌에 각각 1개 팀이 출사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