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악인 박영석의 인터뷰 *-

paxlee 2007. 9. 26. 08:53

 

[강천석의 아주 특별한 외출] 산악인 박영석씨를 만나다.

 

죽음이 항상 따라다니는데 산에는 왜 오르나요.
꿈이고 인생이죠… 내겐 “왜 사느냐”와 똑같은 질문이에요.

왜 한국 산악인이 세계적으로 우수할까요.
독종이라 그래요… 또 돈이 없어 다시 오기 힘드니까, 한번 가면 끝장을 보는 거죠.

하산길에 사고가 많다는데 인생이랑 똑같네요 어떤 자리나 내려오는 것이 어려운 법인가 봅니다.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야 등반이 끝나는 겁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박영석 프로필

1963  11월 2일 출생
1992 동국대 체육교육과 졸업
1993  에베레스트(8848m) 등정. 국내 최초. 세계 8번째로 무산소 등정
1996 안나푸르나(8091m) 등정
1997 다울라기리(8172m) 등정. 가셰르브룸1(8068m) 등정. 가셰르브룸2(8035m) 등정. 초오유(8201m) 등정. 로체봉(8516m) 등정.
1998 히말라야 시샤팡마봉(8012m) 등정.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 마나스루봉(8163m) 등정. 통산 10번째 8000m급 봉우리 정복.
1999  히말라야 카첸중가봉(8586m) 등정. 시샤팡마봉(8012m) 등정.
2000  네팔 마칼루봉(8463m) 등정. 히말라야 브로드피크봉(8047m) 등정. 시샤팡마봉(8027m) 등정.
2001 히말라야 로체봉(8516m) 등정. K2봉(8611m) 등정.
2002 엘부르스(5642m) 등정. 남극 빈슨매시프봉(4892m) 등정
2004  남극 원정 성공. 44일 만에 성공. 남극점 무지원 탐험 최단시간 세계 신기록
2005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 세계 7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 모두 밟는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산악인 박영석(44)씨는 늘 꿈을 가지고 사는 사나이다.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도전한다. 따라서 그는 항상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다. 지난 5월 후배 두 명(고 오희준·이현조씨)을 잃은 불의의 사고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한국인이 개척한 ‘코리안 루트’를 만들려다가 실패한 것이다.
 
후배들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힌 박씨는 “은퇴도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내년에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요즘도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드는 날이 많다”면서 “두 후배와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려고도 했지만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사를 안 했다”고 말했다.
 
[강천석] 죽음이 항상 박 대장 곁에 따라다니는데, 산에는 왜 오르나요.
[박영석] 그 질문에 답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당신은 왜 사느냐’와 똑같은 질문이죠. 세계적인 산악인 조지 말로니는 기자들이 ‘산에 왜 오르냐’고 질문하자 퉁명스럽게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멋있게 포장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죠.
 
[강천석] 그렇다면 산악인 박영석은 왜 끊임없이 오르고 횡단합니까.
[박영석] 등산은 저의 꿈이자 인생입니다. 도시에 있으면 산악인이 아니죠. 에베레스트(네팔어로는 사가르미타, 바람의 여신이라는 뜻)산을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산에 오르고 싶어집니다. 끊임 없이 새로운 목표를 찾게 됩니다. 참 희한하죠. 희박한 공기 속으로 꿈을 찾아 자꾸 떠나는 것이.

[강천석] 사실 나처럼 산 밑에 사는 ‘평원족’은 박 대장 같은 ‘고산족’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박 대장을 만난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평원족’과 ‘고산족’의 대화가 통할지 걱정했죠. 그런데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까. 2006년 하산길에 다섯 구의 시체를 보고 무서웠다고 했고, 박 대장 후배도 여럿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영석] 물론 저도 죽음이 두려워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산에서 멋지게 떠나고 싶습니다.

[강천석] 한국에 세계적 산악인이 10여명 된다고 들었습니다. 왜 한국 산악인이 우수할까요.
[박영석] 한국사람이 독종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외국인은 한두 번 실패하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국인은 끝까지 도전합니다. 끝장을 보는 성격이죠. 또 산악인에 대한 지원이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가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다시 오기 힘드니까요.
▲ 강천석 주필(오른쪽)과 박영석씨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강천석] 특히 초창기에는 경제적으로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박영석] 등반비용 때문에 결혼을 세 번이나 연기했어요. 1989년 히말리아 랑탕리에 도전했을 때 돈이 없어서 편도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등반이 끝나면 장비를 팔아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사려고 했죠. 등정에 성공한 후에 장비를 팔아서 돈을 마련했는데 함께 간 원정대가 너무 고마워서 보너스로 다 줘버렸어요. 결국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패물 판 돈을 받았습니다.

[강천석] 박 대장 같은 남자에게 홀린 여성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만났나요.
[박영석] 고1 때 후배 소개로 만났어요. 그 뒤로는 미팅 한 번 안 했습니다. 아내 집이 오색약수터 근처여서 설악산에 자주 갔죠. 지금 아내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산고등학교 시절 박씨는 사격부원이었다. 고1때 오산중학교 사격부 후배들을 모아 놓고 “누나 있는 사람은 사진을 가져와라”고 했는데, 그 중 가장 순진한 후배가 사진을 가져왔고 그 인연으로 만난 동갑내기 고등학생이 지금의 아내(홍경희씨)다.

[강천석] 가장 처음 오른 산은 어디입니까.
[박영석] 네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백운대에 제일 처음 올라갔습니다. 자연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북한산, 관악산 등에 자주 데려가셨죠. 또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김찬삼씨의 세계여행 전집을 사주셨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등산과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키웠죠. 중학교 2학년 때(1977년)는 고상돈 선배가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당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고등학교 때는 동국대 산악부의 퍼레이드를 보고 동국대에 진학해서 산악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결국 재수 끝에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진학했어요.

 

박씨는 1963년 서울 남산 기슭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숭의초등학교, 동북중학교, 오산고등학교, 동국대 등 모두 남산 기슭에 있는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시절에는 매일 남산 약수터까지 10㎞ 달리기를 하며 체력을 다졌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격투기부터 사격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운동이 없다.

[강천석] 산악인이 되고 나서는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을 텐데요.
[박영석]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150여m 떨어졌는데, 셰르파가 구해줬습니다. 떨어지는 동안 첫째 아이가 생각나더라고요. 얼굴이 함몰돼서 수술을 했는데 다른 셰르파가 마취약을 안 가지고 와서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수술을 했어요. 지금도 얼굴에 광대뼈를 고정시키기 위한 철사핀이 3개나 박혀있습니다. 또 1995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오르다가 눈사태를 맞아 700m 정도 쓸려갔어요. 눈을 뚫고 나온 제 손가락을 보고 셰르파가 구했습니다. 떨어지는 내내 둘째를 생각했어요. 원정 떠나기 이틀 전에 둘째가 태어났거든요.

 

[강천석] (강 주필은 박 대장에게 ‘인생수업’이라는 책을 건네면서) 한 번 읽어 보세요. 유명한 정신과 여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죽을 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죠. 주로 부모, 연인, 친구 등에 관한 것입니다. 저자는 ‘죽는 순간 하고 싶어하는 것을 지금 살아서 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박 대장은 최후의 순간에도 ‘산 하나를 더 오를 걸’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박영석] 1991년 에베레스트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도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이 사실이 집에 알려지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데 벽에 걸린 에베레스트 사진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빨리 수술 받고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1993년 드디어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강천석] 박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14개 산봉우리 등정,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3극점(에베레스트·남극·북극) 도보탐험을 이룬 세계 최초의 산악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박영석] 한동안 언론이나 스폰서가 제게 1년에 8000m급 산봉우리를 몇 개 올랐냐는 것만 물어봤어요. 저는 오기가 나서 1년 만에 6개를 올랐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스폰서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록이 아니라 기존의 루트와 다른 새로운 루트를 내는 것, 기록을 초월해서 내가 원하는 등반을 하는 것, 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룬 것은 그저 대표적인 곳만 골라 올라갔을 뿐입니다. 지도를 펼쳐보면 가보고 싶은 곳이 수두룩합니다.

 

[강천석] 8000m급 14봉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산을 꼽는다면 어느 산입니까.
[박영석] 산이요? 산 밖에서 보면 멋있죠.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산이 안 보입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싫어요. 안에 들어가면 14개 봉 중에서 안 힘든 산이 없어요. 굳이 꼽자면 에베레스트가 가장 매력적입니다.


[강천석] 들어가도 후회, 들어가지 않아도 후회. 결혼이랑 똑같네요.
[박영석] 그렇죠. 우리 인생이랑 똑같은 것 같아요.
 

[강천석] 그렇다면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봉우리는 어디인가요.
[박영석] K2입니다.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었어요. 또 히말라야는 70~80%가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강천석] 인생이랑 똑같네요. 어떤 자리나 내려오는 것이 어려운 법인가 봅니다. 내려올 때 더 사고가 많으니.
[박영석]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야 등반이 끝나는 겁니다. 내려올 자신이 없으면 올라가질 말아야 하죠.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우리가 훈련을 하는 것도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강천석] 산신령 중에서는 히말라야 산신령이 제일 센가 보죠.
[박영석] 저는 불교에 가깝지만 신이 있다고 봅니다. 5000m 이상은 신의 영역이에요. 생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죠.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하늘에서 길을 열어줘야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 가서도 올랐다가 바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산을 정복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또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면 후퇴해야 합니다. 겸허해야 하죠. 정상을 앞에 두고서도 돌아섬을 결정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하지만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면 돌아서야 해요.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아는 지혜를 배우는 거죠.

 

[강천석] 선배 산악인 중에서 존경하는 인물은 없나요.
[박영석] 존경하는 사람은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폴란드 출신의 에지 쿠크츠카입니다. 히말라야 14좌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완등하신 분입니다. 그는 동료애도 뛰어나고 사람냄새가 물씬 풍겨요.

 

[강천석]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관계는 형제와도 같은가요.
[박영석] 피보다 더 진한 것 같아요. 등반 시 팀워크는 생명입니다. 선배는 후배에게 가진 것을 100% 줘야 하고 대신 후배는 선배 말을 100% 신뢰해야 하죠.

 

[강천석] 그런데 한계상황이 오면 어떻습니까. 둘이 함께 올라가다 미끄러져 줄에 매달렸는데, 줄을 끊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죽게 되고 끊으면 위의 사람은 살 수 있는 상황에선 어떤가요.
[박영석] 물론 그런 극한 상황에서 같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대부분 위에 있는 사람이 줄을 끊죠. 최후 선택의 순간이 왔다고 느끼면 끊어요. 자신이 아래에 있으면서 줄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영화에나 있죠.

 

[강천석] 에베레스트를 꼭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각종 수단을 사용하는 상업등반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박영석] 자기 자신을 이겨나가는 과정이 중요한데 헬기, 가이드 등을 활용해서 올라가는 것은 결과만을 중시하는 것이라 좋게 보이지 않아요. 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겁니다.

 

[강천석] 산 정상에 올라가면 무슨 생각을 하나요.
[박영석] 거의 무의식에 가깝습니다.

 

[강천석] 먹을 것으로는 무엇이 생각나나요.
[박영석] 주로 생선이나 해물을 먹고 싶죠. 얼음 속에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찾아본 적도 있습니다. 냉동 상태로 보관된 생선 말이죠. 한번은 담배 생각이 나서 피웠는데 바로 쓰러지더라고요.

 

[강천석] 박 대장은 수직적으로 높은 곳도 많이 올랐지만 수평적으로는 극지대에도 갔습니다.
[박영석] 지구에 지옥이 있다면 북극이 지옥일 겁니다. 영하 50도 정도까지 내려가죠. 심지어 성기에 동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추운 걸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텐트를 쳐도 안과 밖의 온도 차가 거의 없습니다. 그 안에서도 입김이 다 얼기 때문에 안은 얼음동굴이죠. 물을 부으면 텐트 안에서도 그냥 얼어버립니다.

 

[강천석] 이제는 서서히 나이의 한계를 느낀다고 들었습니다.
[박영석] 그렇습니다. 느끼죠.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탐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에 맞고, 능력에 맞는 탐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천석] 아들 성우(고1)와 성민(초등6)이가 아빠처럼 산악인이 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박영석] 사실은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하겠다고 하면 최고의 스폰서가 되고 싶어요. ▒


/ 정리 = 서일호 조선일보기자, 손유정 인턴기자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3년


/I don`t know how to love 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