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7-2] 1989년 *-

paxlee 2007. 9. 26. 21:49
에베레스트 국내 네 번째 등정

마산 산악동지회 에베레스트원정대

▲ 지방 단일팀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출사표를 던진 마산산악동지회팀. 남릉 7,900미터에 4캠프를 설치한 이들은 89년 10월 13일 남동릉으로 우회하여 정상에 올랐다. 국내 네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이었다.

한편 단일팀으로는 국내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출사표를 던진 마산 산악동지회팀은 9월 4일 라마제를 지내고 등반을 개시했다. 대원은 김인태대장(38)과 최재일부대장(38), 이상곤(34), 구자억(35), 김병오(32), 조효제(30), 조광제(28), 박동열(32), 김현진(27), 천문철(27), 김범택(27), 김민효(26), 김석수(34), 이근배(29), 박희택(27), 김일철(38) 등 16명으로 구성되었다.


9월 4일 1캠프(6,050m)를 설치하고 7일 2캠프(6,400m), 12일에는 3캠프(7,000m)까지 진출했다. 이어서 19일 7,400미터 지점에 4캠프를 설치했고 22일 조광제, 김범택대원이 그곳을 올라 다음날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8,700미터 지점에서 산소 부족으로 돌아섰다.


폭설로 열흘간이나 운행을 중단했던 한국대는 10월 6일 등반을 재개 7일 4캠프를 7,900미터 지점으로 올려 설치했다. 그러나 심한 폭풍설로 정상공격이 지연되다가 12일 밤 10시 30분 조광제, 박희택대원이 마지막 캠프를 떠났다. 이들 중 박대원은 남봉에서 몸 상태가 나빠 포기했고 조광제대원 만이 13일 12시 30분 일본과 멕시코 대원 4명과 함께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 등정은 77년, 87년, 88년에 이어 국내 네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이며 조대원은 9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에베레스트 서릉과 로체 등정에 쏠린 의혹

전국합동 에베레스트 서릉원정대



한국산악회 소속 이석우대장(36)을 비롯한 11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에베레스트 서릉원정대는 10월 23일 오후 2시 30분 정상용대원(26)과 두 명의 셀파가 서릉 직등루트(일명 유고루트)를 통해 지구 최고봉의 정상을 밟고 다시 서릉으로 하산했다고 네팔관광성에 보고함으로써 이 경이적인 등정소식이 세계에 알려졌다. 이 루트는 1979년에 와서야 유고대에 의해 초등정된 이래 84년에 불가리아대가 제2등을 기록했으나 두 팀 모두가 급경사의 이 루트로 하산하지 못했었다.

 

유고팀은 혼바인 꿀루와르로 우회하여 내려왔고, 불가리아팀의 등정대원은 이 루트로 하산을 강행하다 실족사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국대의 이 죽음의 능선에 대한 ‘등정과 하산’은 최초의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이들 원정대가 제시한 사진 속의 정상은 이미 여러 국가에서 수많은 산악인이 올라 너무나도 낯익은 최고봉의 그 정상이 아니었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두 사람이 서고도 평평한 설면이 많이 남아 있는 사진 속의 그곳이 아니라는 것이 앞서 등정한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무엇보다 최고 난이도 5급의 서릉 상단부를 어떻게 올라갔으며 어떻게 내려왔는가에 대한 원정대의 구체적인 정황설명이 없자 이 등정에 강한 의혹이 쏠리게 되었다.


허영호 로체 원정대



에베레스트 서릉과 함께 89년의 등정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허영호의 로체봉 등정은 국내 최초로 자이언트봉에서 야간 단독등반을 감행했다는 데서 크게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등정은 그의 네번째 8천미터급 등정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부인과 아들(5)을 데리고 가족원정대를 꾸린 허영호는 사진작가 성동규와 합류해 등반에 들어갔다.

 

몇 번의 고소적응끝에 10월 13일 아침 9시에 단신으로 2캠프를 떠난 허대장은 로체 페이스에 설치된 3캠프(7300m)에 도착하여 수면을 취한 후 저녁 8시 캠프를 떠나 단독으로 야간등반을 감행, 다음날 새벽 4시에 정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정상에서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사진 촬영을 못하고 곧바로 하산, 14일 오전 8시경에 다시 로체페이스 7300미터 지점에 돌아왔다. 87년 에베레스트 동계등정 이후 2년 만에 이루어진 그의 이 등정은 보다 진보된 등반방식을 택했다는 데서 산악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등정은 다음해에 몇 가지 의문이 공개적으로 제기되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대산련 계간지 90년 봄호에서 처음 거론된 의문에 대해 허영호가 월간 「사람과 山」 90년 7월호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자, 이어서 의문을 제기했던 대산련 김병준 등반기술위원이 재차 「사람과 山」 8월호에서 그의 등정을 부인했다.


김병준위원이 주장했던 의문점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야간등반의 경우 밤에 등반을 시작했다 해도 정상에는 날이 밝는 시점에 맞추어 도달하거나 또한 야간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날이 밝은 후 하산하는 것이 상식인데 허대장의 경우 밤에 올랐다가 굳이 날이 밝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산했다는 점. 둘째, 기록 의존도가 강한 그가 정상 사진 촬영에 전념하지 않은 점. 셋째, 그의 정상행을 아침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인도 벽등반지 첫진출, 바기라티 3봉 등정

광운대산악회 바기라티 3봉원정대



세 명으로 구성된 광운대원정대가 인도 강고트리 산군에 첫진출해 암봉 바기라티 3봉(6,454m) 등정에 성공해 주목을 받았다.

배승렬대장(31), 장홍상(25), 곽봉신대원(22) 등 3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한국대는 8월 3일 등반기점인 강고트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틀 간을 더 카라반한 후 4,300미터 난다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하강루트 정찰과 고소적응 기간을 거친 이들은 15일에 베이스캠프를 떠나 4,800미터의 전진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80년 영국대가 초등한 남서벽(필라)으로 등반을 개시한 이들은 21일에야 5,580미터 지점의 비박지까지 진출했으나 악천후로 3일간 지체한 끝에 체력이 떨어져 일단 전진베이스캠프까지 후퇴했다.


그 후 폭설이 계속 내려 광운대팀을 제외한 모든 팀이 철수한 가운데 9월 4일 장, 곽 두 대원이 전진캠프로 진출했다. 이들은 그날로 본격적인 등반에 들어갔다. 4일 5,500미터, 5일 5,700미터, 6일 5,900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하며 암벽등반을 거듭한 끝에 7일 11시 30분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총 27피치의 암벽구간과 600미터의 설벽으로 표고차 1,300미터를 10일  간의 등반 끝에 얻은 정상이었다.

 

이것은 인도 강고트리 산군의 암봉을 한국인이 오른 첫 기록이었다. 이들의 하산길도 만만치 않아 오후 8시에 마지막 비박지에 도착했고 계속 하강하여 9일에야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이들은 높이에 구애받지 않고 소규모 팀으로 벽 등반을 추구해 한국산악계에 새로운 히말라야 등반양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았다.

대산련 정예부대 안나푸르나에서 패퇴

대한산악연맹 동계 안나푸르나원정대



대산련의 8천미터급 14좌 완등 사업의 일환으로 파견된 안나푸르나원정대는 장봉완대장(37)을 중심으로 엄홍길(29), 송열헌(30), 정승권(29), 김진성(25), 송석현(25), 조성수(24), 하관용(29), 지현옥(여·25), 유한(27), 서성식(31), 지영태(27), 곽명옥(여·26), 곽상태(31) 등 전국에서 선발된 14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카라반 루트 중에서는 악명높은 뚜르부긴 고개를 어렵게 넘어 11월 26일 베이스캠프(4,300m)를 건설했다. 이때는 선발대가 이미 1캠프(5,600m)까지 진출한 뒤였다. 이어서 1월 10일 2캠프(6,400m)를 설치했고 빙벽으로 이루어진 세락지대를 어렵게 넘어 16일 3캠프가 설치되었다. 그후 날씨가 나빠져 등반은 열흘간이나 지연되었다. 그리고 29일 등반이 재개되어 7400미터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심한 강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31일 후퇴를 선언했다. 3명의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포함되어 있어 무난히 등정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 등반의 실패로 84년 겨울에 있었던 은벽산악회의 동계초등정 시비는 다시 숙제로 남게 되었다.

국제분쟁 야기한 동계 초오유

삼천포산악회 동계 초오유원정대



삼천포산악회의 초오유원정대(대장 이호상 외 6명)는 이 산의 남동면 7,800미터까지 진출했으나 예기치 않았던 셀파의 실족사로 등반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 원정대는 같은 루트를 등반중이던 벨기에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벨기에팀이 자신들의 루트를 허가없이 등반했다는 이유로 한국대의 고정로프를 절단, 회수함으로써 야기된 이 사건은 국제산악연맹 원정분과위원회에서 벨기에팀의 항의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대한산악연맹에 한국대원을 제명할 것을 공식 요청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후에 한국대가 해명함으로써 종결되기는 했지만 서구산악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제산악연맹의 일방적인 제명 요청은 편파적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이 사건은 같은 루트를 등반하는 외국대원들끼리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해외원정을 추구하는 한국대원들에게 정확한 언어소통의 필요성을 인식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소규모 대학팀 랑탕리 동계초등

동국산악회 동계 랑탕리원정대



동국대산악부 재학생들로만 구성된 한국대가 랑탕리(7,239m)를 동계초등하는 데 성공했다. 박영석대장(26)과 윤태영(24), 김형우(21) 등 3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원정대는 12월 1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6일간 속공등반을 펼쳤다. 12월 2일 1캠프, 5일 2캠프, 그리고 8일에는 오버행 설벽을 넘어 3캠프를 설치했다. 이어서 9일 박대장과 윤태영대원, 그리고 셀파 1명이 새벽 5시 50분 마지막 캠프를 떠나 칼날 리지와 설벽을 통과하여 오후 1시 50분 정상에 올라섰다.

국내 최대 규모 에베레스트팀 동계등반 좌절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 에베레스트동계원정대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상 가장 많은 대원들로 구성된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원정대는 대규모 인원으로 의욕적인 등반을 개시했다. 대원은 김하경대장(40)의 지휘아래 정태영부대장(41), 이정옥등반대장(39), 임형칠(30), 김인주(35), 김종철(32), 윤호근(27), 이연근(27), 김영학(29), 임우근(26), 신욱철(26), 이병철(26), 정찬득(27), 고재연(27), 김병규(26), 김홍빈(25), 윤장호(25), 김은철(25), 김동열(24), 이연주(여·26), 한민수(25), 최행준(23), 이병규(23), 김애란(여·21), 윤호준(21), 이창수(31·보도) 등 모두 26명으로 구성되었다.


11월 22일 공식 허가일보다 조금 일찍 아이스폴 등반을 시작, 29일 1캠프(6,050m), 12월 1일 2캠프(6,350m), 8일 3캠프(7,300m)를 설치했다. 이어서 ‘보름달 작전’이라고 명명된 12월 13일 정상공격 계획을 세웠으나 고산병으로 셀파가 사망, 실행하지 못했다. 셀파의 시신을 운구하고 등반을 속개한 이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바람 속에서 전진이 어려웠다. 12월 28일 신욱철, 김병규대원과 셀파 4명이 사우스콜에 4캠프를 설치하려 했으나 도중에 후퇴했다. 김하경대장은 더이상 등반이 어렵다고 판단, 다음날 김대원과 두 셀파가 사우스콜(8,000m)에 다녀오는 것으로 이 등반의 종지부를 찍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