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국내 네 번째 등정 마산 산악동지회 에베레스트원정대
|
에베레스트 서릉과 로체 등정에 쏠린 의혹 한국산악회 소속 이석우대장(36)을 비롯한 11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에베레스트 서릉원정대는 10월 23일 오후 2시 30분 정상용대원(26)과 두 명의 셀파가 서릉 직등루트(일명 유고루트)를 통해 지구 최고봉의 정상을 밟고 다시 서릉으로 하산했다고 네팔관광성에 보고함으로써 이 경이적인 등정소식이 세계에 알려졌다. 이 루트는 1979년에 와서야 유고대에 의해 초등정된 이래 84년에 불가리아대가 제2등을 기록했으나 두 팀 모두가 급경사의 이 루트로 하산하지 못했었다.
유고팀은 혼바인 꿀루와르로 우회하여 내려왔고, 불가리아팀의 등정대원은 이 루트로 하산을 강행하다 실족사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국대의 이 죽음의 능선에 대한 ‘등정과 하산’은 최초의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이들 원정대가 제시한 사진 속의 정상은 이미 여러 국가에서 수많은 산악인이 올라 너무나도 낯익은 최고봉의 그 정상이 아니었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두 사람이 서고도 평평한 설면이 많이 남아 있는 사진 속의 그곳이 아니라는 것이 앞서 등정한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무엇보다 최고 난이도 5급의 서릉 상단부를 어떻게 올라갔으며 어떻게 내려왔는가에 대한 원정대의 구체적인 정황설명이 없자 이 등정에 강한 의혹이 쏠리게 되었다. |
에베레스트 서릉과 함께 89년의 등정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허영호의 로체봉 등정은 국내 최초로 자이언트봉에서 야간 단독등반을 감행했다는 데서 크게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등정은 그의 네번째 8천미터급 등정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부인과 아들(5)을 데리고 가족원정대를 꾸린 허영호는 사진작가 성동규와 합류해 등반에 들어갔다.
몇 번의 고소적응끝에 10월 13일 아침 9시에 단신으로 2캠프를 떠난 허대장은 로체 페이스에 설치된 3캠프(7300m)에 도착하여 수면을 취한 후 저녁 8시 캠프를 떠나 단독으로 야간등반을 감행, 다음날 새벽 4시에 정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정상에서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사진 촬영을 못하고 곧바로 하산, 14일 오전 8시경에 다시 로체페이스 7300미터 지점에 돌아왔다. 87년 에베레스트 동계등정 이후 2년 만에 이루어진 그의 이 등정은 보다 진보된 등반방식을 택했다는 데서 산악계의 찬사를 받았다.
|
인도 벽등반지 첫진출, 바기라티 3봉 등정 세 명으로 구성된 광운대원정대가 인도 강고트리 산군에 첫진출해 암봉 바기라티 3봉(6,454m) 등정에 성공해 주목을 받았다. 배승렬대장(31), 장홍상(25), 곽봉신대원(22) 등 3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한국대는 8월 3일 등반기점인 강고트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틀 간을 더 카라반한 후 4,300미터 난다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하강루트 정찰과 고소적응 기간을 거친 이들은 15일에 베이스캠프를 떠나 4,800미터의 전진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80년 영국대가 초등한 남서벽(필라)으로 등반을 개시한 이들은 21일에야 5,580미터 지점의 비박지까지 진출했으나 악천후로 3일간 지체한 끝에 체력이 떨어져 일단 전진베이스캠프까지 후퇴했다.
이것은 인도 강고트리 산군의 암봉을 한국인이 오른 첫 기록이었다. 이들의 하산길도 만만치 않아 오후 8시에 마지막 비박지에 도착했고 계속 하강하여 9일에야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이들은 높이에 구애받지 않고 소규모 팀으로 벽 등반을 추구해 한국산악계에 새로운 히말라야 등반양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았다. |
대산련 정예부대 안나푸르나에서 패퇴 대산련의 8천미터급 14좌 완등 사업의 일환으로 파견된 안나푸르나원정대는 장봉완대장(37)을 중심으로 엄홍길(29), 송열헌(30), 정승권(29), 김진성(25), 송석현(25), 조성수(24), 하관용(29), 지현옥(여·25), 유한(27), 서성식(31), 지영태(27), 곽명옥(여·26), 곽상태(31) 등 전국에서 선발된 14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
국제분쟁 야기한 동계 초오유팀 삼천포산악회의 초오유원정대(대장 이호상 외 6명)는 이 산의 남동면 7,800미터까지 진출했으나 예기치 않았던 셀파의 실족사로 등반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 원정대는 같은 루트를 등반중이던 벨기에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벨기에팀이 자신들의 루트를 허가없이 등반했다는 이유로 한국대의 고정로프를 절단, 회수함으로써 야기된 이 사건은 국제산악연맹 원정분과위원회에서 벨기에팀의 항의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대한산악연맹에 한국대원을 제명할 것을 공식 요청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후에 한국대가 해명함으로써 종결되기는 했지만 서구산악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제산악연맹의 일방적인 제명 요청은 편파적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이 사건은 같은 루트를 등반하는 외국대원들끼리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해외원정을 추구하는 한국대원들에게 정확한 언어소통의 필요성을 인식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
소규모 대학팀 랑탕리 동계초등
|
국내 최대 규모 에베레스트팀 동계등반 좌절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상 가장 많은 대원들로 구성된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원정대는 대규모 인원으로 의욕적인 등반을 개시했다. 대원은 김하경대장(40)의 지휘아래 정태영부대장(41), 이정옥등반대장(39), 임형칠(30), 김인주(35), 김종철(32), 윤호근(27), 이연근(27), 김영학(29), 임우근(26), 신욱철(26), 이병철(26), 정찬득(27), 고재연(27), 김병규(26), 김홍빈(25), 윤장호(25), 김은철(25), 김동열(24), 이연주(여·26), 한민수(25), 최행준(23), 이병규(23), 김애란(여·21), 윤호준(21), 이창수(31·보도) 등 모두 26명으로 구성되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 |
'산악인의 발자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8-2] (1990년) *- (0) | 2007.09.27 |
---|---|
-*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 [8-1] (1990년) *- (0) | 2007.09.27 |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7-1] 1989년 *- (0) | 2007.09.26 |
-* 산악인 박영석의 인터뷰 *- (0) | 2007.09.26 |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6-3] (1987~1988년) *- (0) | 2007.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