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

-* Special Report : 제17대 대통령 당산자 이명박 [1] *-

paxlee 2008. 1. 10. 13:49

  Special Report : 제17대 대통령 당산자 이명박

1. 이명박 당선자의 뿌리를 찾아서 

제17대 대통령에 이명박 전 서울시장, 아니 이명박 전 현대건설 회장이 당선됐습니다. 최초로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인물이 5년간 한국을 이끌어 가게 됐습니다. 참 많은 변화가 올 것 같습니다.

10년 진보 정권이 다시 새로운 보수 정권으로 교체된 정치적 의미를 떠나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는 ‘이명박’이란 한 개인에 대해 포커스를 맞춰 봤습니다. 굳이 프로이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의 성장 과정, 가족·인간 관계, 성취의 경험 등이 향후 국정 운영 스타일과 리더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선 직전 이명박 당선자의 고향인 포항 일대에 정치팀 기자를 파견해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그의 성장 과정을 취재했습니다. 초·중·고 학적부부터 어린 시절 살던 판자촌 쪽방까지 ‘청소년 이명박’의 자취도 두루 따라가봤습니다. 동시에 경제팀 기자들은 이 당선자의 현대 그룹 재직 시절 지근거리에서 동고동락했던 인사들을 만나 ‘CEO 이명박’의 일하는 스타일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한계는 있었습니다.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한 자신의 친척, 과거 회사 동료에 대해 가능하면 ‘좋은 얘기’만 전해 주려는 인지상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의 모든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큰 틀에서 그의 '개인적 자아'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데는 독자들에게 다소의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명박의 사람들 126인도 간추려 보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인물, 앞으로 새 정부에서 역할을 할 사람들이 선정의 잣대였습니다.

우선 후보군의 리스트를 망라한 뒤 이명박 당선자의 의중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읽어온 캠프의 핵심 5인에게 한 명 한 명 평가와 엄선을 자문했습니다. 개인마다 연고지·학력·경력은 물론 당선자와의 인연, 그간의 주요 역할 등의 정보를 담았습니다. 또 126인에 대한 통계 작업을 통해 새로운 파워엘리트 그룹으로 등장할 이들의 주요 특성을 찾아 함께 그래픽으로 소개합니다.

내년 2월 출범할 실용정부의 인사 때마다 독자 여러분들이 그 인연과 인맥의 뿌리를 이해하는 참고 자료로 간직됐으면 합니다.
 
                             -/ 글 최훈기자 중앙sunday  제41호 /-
 

2. 사람의 능력과 잠재력 마지막까지 다 뽑아 쓴다

       '대한민국 CEO' 이명박의 리더십 

이명박 당선자가 서울시장 시절인 2005년 6월 서울숲 개장식에 참석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올해 66세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15년간 현대 그룹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기업 마인드를 시정에 도입한 서울시장 4년도 따지고 보면 서울시 CEO였다. 그의 인생 66년 중 19년을 CEO로 산 셈이다. 게다가 24세에 현대에 입사해 CEO가 되기까지 12년을 그는 회사의 CEO처럼 고민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호랑이 같은 오너 정주영 회장의 눈에 들어 고속출세를 한 비결이었다. 대학 졸업 후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까지 이 당선자의 40년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CEO다.

이 당선자가 시장이었던 2005년 서울시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시청 전체를 태극기로 뒤덮는 이벤트를 벌여 눈길을 끌었다.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CEO가 있다. 혁신을 강조하는 이도 있고, 창조를 부르짖는 이도 있다. 공통점은 '실천'이다.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은 "CEO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실행능력"이라고 말했다. 모든 CEO는 목표와 비전을 제시한다. 1등 기업, 주가 50% 올리기, 이윤 100% 증대 등이다. CEO들은 그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느냐를 놓고 평가받는다. 미달하면 오너에게 잘리거나 주주들에게 내쫓긴다.

실적을 올려야만 자신도 살고, 기업도 발전하고, 직원들도 살아남는다. '실천'과 '실적'은 모든 CEO의 원초적 스트레스다. 이 때문에 CEO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갖다 쓴다. 그리고 이념과 연고를 떠나 최적의 자원을 찾아다닌다. 명분보다 이익을, 관행보다 효율을 중시한다.

그것이 CEO들의 유전인자(DNA)다. 이 당선자도 이 DNA가 강렬하다. 그 DNA는 '실용주의'로 표출된다. 시계추를 돌려 보자. 서울시장 이명박의 최대 난제는 서울지하철 노조 파업이었다. 공무원들은 "34년간 해봤지만 노조 요구를 들어주는 것 외엔 대안이 없다"고 보고했다. 노조의 파업 때문이었다. 하루에 670만 명이 이용하는 지하철이 3일만 멈춰서면 서울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당선자는 '지하철공사 간부'라는 인력자원을 동원했다. 그들에게 기관차 운전을 배우게 했다. "기관차 몰려고 행정고시 쳐 공무원 된 게 아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 당선자는 그들을 설득했다. 시장 취임 후 1년 반, 마침내 지하철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지하철은 차질 없이 운행을 계속했다. 공사 간부들이 운전석에 앉은 것이었다. 결국 노조가 백기를 들었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이 당선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있는 비서 김윤경씨는 "사람의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한, 마지막 순간까지 다 뽑아 쓴다"고 이 당선자를 표현했다.

이 말에 이 당선자 리더십과 용인술의 본질이 담겨 있다. 그는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명예욕을 자극하거나, 무한 신뢰를 보내는 등 다양한 수단으로 사람의 능력을 뽑아낸다. 그 사람이 그의 반대자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과거를 불문에 부친다. 5년 전 서울시장 취임식 날, 서울시 고위 간부가 그를 찾아와 '살생부'를 내밀었다. 시장 선거 때 상대편을 도운 명단이었다. 그는 살생부를 뜯어 보지 않고 돌려보냈다. 일부 언론에 명단이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복 인사는 없었다. 소문이 퍼졌고, 살아남은 그의 반대자들은 도리어 더 열심히 일했다.

원세훈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은 "출신과 연고를 따지지 않고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쓰는 것이 이 당선자의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CEO가 실력을 중시하는 조직에선 경쟁이 불붙는다. 이 당선자는 현대 그룹 회장 시절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군'인 현대차 노조 편집장의 여동생을 비서로 채용했다. 성적이 최고였기 때문이었다. 여비서는 성심껏 일했고, 결과적으로 현대차의 노사관계도 부드러워졌다.

이 당선자는 실수했다고 해서 사람을 자르지 않는다. "그릇을 씻지 않는 사람보다 씻다가 깨는 사람이 낫다"고 이 당선자는 말해 왔다. 서울 버스체계 개편 초기 그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명박 시장 퇴진 국민서명운동'까지 벌어졌다. 주위에선 교통체계 개편을 주도한 음성직 교통관리실장 경질을 건의했다. 그는 건의를 일축했다. 대신 자신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원 전 부시장은 "일을 시키되 책임을 자신이 지기 때문에 밑에선 일에 몸을 던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당선자의 잠버릇을 보자. 그는 자다가 전화를 받아도 평상시처럼 통화하고 다시 잔다. 현대그룹 CEO 시절 형성된 버릇이다. 해외 현지에서 전화하기 좋은 시간은 한국에선 한밤중이나 새벽이다. 그는 사장이 졸린 내색을 보이면 급한 업무라도 부하 직원이 전화를 걸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해외에서 한국 시간에 맞추면 하루 이틀이 금방 넘어간다. 의사결정이 느려지고 시간과 자원이 낭비된다. 그는 연습을 거듭했고, 새벽 1~2시에 자다가 전화를 받아도 낮에 전화를 받듯이 또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직원들은 아무 때나 이 당선자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는 끝까지 일을 챙긴다. 한나라당 경선을 하루 앞둔 8월 18일, 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12시간 동안 캠프 사무실을 지켰다. 그는 전국의 당협위원장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투표를 독려했다.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는 그날 기자회견 뒤 일찌감치 캠프를 떠났다.

'끝없는 경쟁'은 이 당선자가 집착하는 조직 관리 방식이다. 그는 대선 기간 중 캠프에 칸막이를 치지 않았다. 경선 때는 후보 홍보물을 한 곳에 맡기지 않았고, 후보 연설문은 많을 땐 네 사람이 썼다.

젊은 실무자들을 중용하는 것도 이 당선자가 조직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법 중 하나다. 서울시장 시절 그는 간부회의 때 과장급 이하 실무자들까지 배석시켰다. 대선 기간에도 국회의원 보좌관들을 늘 회의에 참석시켜 질문을 쏟아냈다. 실무자들은 신을 내 일하고, 간부들은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는 위기감으로 일에 달려들었다.

이 당선자는 자신의 조직에 2인자를 허용하지 않아 왔다. 그것은 이 당선자가 절대적 권한을 지닌 오너 밑에서 오랫동안 독점적 위치의 CEO로 지내오는 과정에서 몸에 밴 것일 수도 있다. 2인자의 존재가 자신에게 정보와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 당선자가 박근혜 전 대표 측과의 갈등 뒤 캠프의 2인자로 불린 이재오 의원을 사퇴시킨 것을 그런 맥락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당선자는 끊임없이 사람을 체크한다. 흔히 이 당선자의 복심(腹心)으로 평가받는 정두언 의원도 정무부시장 시절 이 당선자의 인터폰을 세 번 받았다. "이 인사(人事) 왜 이렇게 했어?" 모두 정 의원이 사전에 보고했던, 인사에 관한 질문이었다. 대선 기간 대통합민주신당의 네거티브 공세가 한창일 때 이 당선자는 클린정치위원회에 방어의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 대신 실무진을 찾아 물어봤다. 일종의 크로스체크였다.

'CEO 이명박'에겐 냉정하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목표 성취에 골몰하는 리더가 흔히 듣는 얘기다. 이 당선자의 측근과 지인 누구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정두언 의원은 "일을 해내려다 보니 사람 관리를 하지 않아 그렇다"고 분석했다. 곱씹어보면 '내 편'이었다고 챙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여옥 의원은"그 같은 냉정함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연고주의를 끊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냉정함이 승자독식(勝者獨食)으로 흐르고 포용력 부재(不在)로 나타날 경우 우군을 돌아서게 하고 적을 양산할 소지도 있다.

이 당선자는 12월 19일 밤 대통령 당선 후 "대한민국 경제를 반드시 살리고, 국민 통합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목표를 제시했다. 그가'대한민국 CEO'로서 대한민국 주주인 국민에게 약속한 목표를 어떻게'실천'할지가 주목된다.
 
               -/ 글 이상렬기자 중앙sunday 제41호 /-
 

3. 자존심 하나로 가난·콤플렉스 넘었다

          ‘신화의 뒷면’에 감춰진 성장기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의 졸업 기념 사진. 흰색 점선 안이 이명박 당선자. 친구 김창대씨 제공
경북 포항의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지금부터 62년 전 겨울 일본 오사카에서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당시 4세)의 가족을 맞았던 겨울 바다는 지금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탄 부산행 귀국선은 대마도 인근에서 침몰했다. 이 당선자의 큰누나 귀선(77)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어머니가 명박이를 살리기 위해 끈으로 꽁꽁 묶어 업고 있었다”며 “그 와중에도 명박이는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이 당선자는 14년간 포항에 살며 초·중·고교를 마쳤다. 가난을 가장 처절하게 경험한 것도 이곳이다. 포항은 이명박을 어떻게 키웠을까.

이명박 당선자가 중학 시절 살던 포항 북구 덕산동 집. 지금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포항=김선하 기자
“덩치가 반에서 중간이나 됐을까요. 그런데 턱 하니 칠판을 둘러메고는….”
이 당선자의 모교인 포항 영흥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동창 박이득(66)씨는 “그 친구, 당찬 구석이 있었다”고 말했다. 6ㆍ25전쟁 중 시내 초등학교는 죄다 군부대에 수용됐다. 인근 해수욕장 소나무 숲이 교실을 대신했다. 칠판 등 수업 용구를 챙길 때면 이명박은 뒤로 빠지는 법이 없었다. 청소 시간에도 그랬다. “빨리빨리 일하고 가자”며 가장 먼저 소매를 걷었다.

박씨는 1965년 이 당선자가 현대건설에 입사한 직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좋은 회사 들어가 월급 받으니 좋겠다고 했지. 대뜸 ‘이봐, 그 회사 내 거야. 내가 남의 월급이나 받으려고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잖아’라고 하더라고. 어릴 때와 똑같더라니까.”

이명박 당선자의 포항 동지상고 시절 사진. 가장 왼쪽이 이 당선자. 친구 김창대씨 제공
그러나 가난은 소년 이명박을 점점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원래도 넉넉지 못했던 집안은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 목장에서 일했던 아버지 이충우(81년 작고)씨가 전쟁 이후 실직하면서 더 어려워졌다. 이 당선자는 『어머니』란 책을 쓸 정도로 모친 채태원(64년 작고)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은 적은 많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당선자 일가의 고향인 포항 북구 흥해읍 덕성1리를 찾았다. 시내에서 승용차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이 당선자의 사촌 형수 유순옥(76)씨는 “우리 시삼촌(이 당선자의 아버지)은 참 훌륭한 분이었슴니더”라고 말했다. “내가 시집 와 포항 시내 사는 시삼촌 댁에 인사를 갔어예. 부부가 고물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웬 거지 아이가 웃통을 벗고 지나갑디더. 시삼촌이 이리 와보니라 하고 부르더니 헌 옷을 골라 입히고 잔돈푼까지 쥐어주데요. 그리고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어도 입은 거지는 얻어먹는다더라’면서 그냥 보내요. 지켜보던 시숙모가 ‘저분은 자기 대에 복을 못 받으면 자식 대에서라도 꼭 받을끼다’라고 합디다.”

이명박 당선자의 고교 생활기록부. 국어·수학은 3년 내내 ‘수’였지만 일부 상업 과목은 ‘미’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이 당선자 가족은 남을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유씨는 “집에 가보니 판때기를 얼기설기 얹은 게 꼭 개집 같더라”며 “점심 때 밥을 차리려고 물어보니 ‘우리는 귀국 후 점심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좀 더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학 시절 친구들은 “명박이네는 집에 부엌이 없어 툇마루에 구멍을 뚫고 거기 화로를 넣어 밥을 해먹었다”고 전했다.

이 당선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성실하고 정직한 분이었지만 돈 버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기 싫어하던 당찬 소년과 가난하면서도 한없이 사람 좋은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을지 짐작할 만하다.

소년 이명박을 괴롭힌 것은 가난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일하던 목장이 동지상고 재단 이사장 소유여서 그의 두 형은 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고교에 진학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어머니는 “우리 형편에 너를 고등학교 못 보낸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수재 소리를 듣던 둘째 형 상득(72ㆍ현 국회부의장)을 위해선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고 있었다.
친척들은 “이 당선자 가족이 단칸방에서 발조차 제대로 못 뻗고 잘 때도 이 부의장이 밤에 공부할 자리는 꼭 남겨뒀다”고 전했다. 이 당선자는 나중에 “형들 교복과 옷을 물려 입은 것도 억울한데 이젠 형들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 가는구나… 가난과 형들이 원망스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장학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형들이 다닌 고교의 야간부에 들어갔다. 형들에 비해 얼굴이 못났다고 생각했던 것도 큰 콤플렉스였다.

이 당선자가 가난과 형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두 개의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준 힘은 뭐였을까. 포항중·동지상고 동창인 김홍대(66)씨는 “아마 자존심이었을 것”이라며 “명박이는 행상하고 리어카 끈다는 티를 전혀 안 내 솔직히 잘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동지상고 야간부는 2∼3년씩 진학이 늦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선자처럼 중학을 마치고 바로 진학한 경우가 외려 드물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든 지려 들지 않았다. 고3 때 벌어진 시험 거부 사건 때도 그랬다. 고교 동기 김칠복(68)씨의 말이다.

“학교 배구부가 대구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했어요. 나도 선수였는데 경기 뒤 학교에 와 보니 시험을 친다더라고. 우리는 공부 하나도 못 해 시험 못 치겠으니 다들 답안지에 이름만 써서 내자고 내가 ‘백지 동맹’을 주동했지. 선생님들이 발칵 뒤집어졌어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선수도 아니었던 명박이가 오더니 ‘이름 다 썼는데 (주동한 너는) 왜 안 나가느냐’고 하면서 교실 밖으로 뚜벅뚜벅 나가더라고. 덩치도 작고 공부만 하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내가 좀 창피했어요.”

이 당선자가 중학 시절 살았던 포항 북구 덕산동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일제 시대 절터였던 이곳에는 극빈층 15세대가 모여 살았다. 금방이라도 지붕이 내려앉을 것 같은 이 집엔 지금도 형편이 어려운 10여 세대가 옹기종기 살고 있다. 인근에서 공인중개사를 운영하는 최상택(51)씨는 “집은 아예 값을 매길 것도 없고 땅값도 평당 100만원이나 할까 말까”라고 말했다.

이 당선자가 고교 1학년 때 뻥튀기를 팔던 북구 학산동 포항여고 앞길은 말끔하게 포장돼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교 친구 강원구(67)씨는 “당시 장사하던 모습을 종종 봤는데 명박이가 대통령이 되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시절 뻥튀기 기계가 있던 자리의 맞은편 길에는 이번 대선 기간 내내 후보들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공교롭게도 포스터 속 이명박의 시선은 자신이 장사하던 바로 그 위치를 향하고 있었다.

이 당선자는 59년 12월 고교 졸업을 앞두고 포항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77년 현대건설 사장 발령을 받은 뒤 처음으로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고 밝혔다. 정신 없이 바쁘기도 했겠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과 콤플렉스가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그가 서울에 와 보니 먼저 상경한 부모님은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 놓고 채소 노점을 하고 있었다. 60년 봄이 되자 중·고교 시절 그와 가장 친했던 포항 친구 김창대(65)씨가 상경했다. 이 당선자 대신 받은 고교 수석졸업 상장과 부상인 탁상시계를 들고 왔다. 김씨의 말이다.

“명박이가 갈 데가 없으니 내 자취방에 와서 같이 공부했는데 전날 아무리 심한 막노동을 했어도 오전 4시면 일어나 공부하더라고. 고려대 가서도 명박이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리포트 제출 때면 친구들이 그 사람 걸 베꼈다고 그래요.”

대학 친구가 기억하는 이명박은 어떤 사람일까. 고려대 경영학과 동기인 엄종일(65) 전 건영 사장은 “워낙 조용한 사람이어서 등록금 낼 때가 돼서야 명박이가 어렵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시골에서 소 판 돈을 올려 보내니 뭉칫돈으로 내는데 이 친구는 여기저기서 모아온 듯한 꼬깃꼬깃한 돈을 냈다”는 것이다.

청년 이명박의 삶이 달라진 것은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다. 본인은 나중에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성격을 바꾸고 싶어서 출마했다”고 말했다. 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주동하고 이 일로 반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을 짓누르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을 계속하면서 가난도 사라져갔다.

이 당선자는 올해 5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강한 사람 만나면 무한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데, 되게 약한 사람 만나면 흐물흐물해진다”고 말했다.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경험한 가난과 콤플렉스 때문일까. 김창대씨는 “이 당선자의 현대건설 입사 초기에 친구 세 명이 대구에서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다”며 “당시 술집 여종업원이 ‘집안 형편 때문에 여기서 일한다’고 하자 이 당선자가 주동이 돼 돈을 거둬 빼줬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시절 이 당선자가 기르던 잡종개를 잃어버리고 어찌나 슬퍼하던지 놀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초·중학교 동기이자 고려대 동문인 방무성(66)씨도 “극장 간판 그리던 고향 친구가 80년대에 무릎을 크게 다친 일이 있다”며 “당시 명박이가 수술비 몇 백만원을 모두 부담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방씨는 자신이 박정희 정권 시절인 71년 야당인 신민당 소속으로 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을 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서슬 퍼렇던 시절에 야당으로 나왔으니…. 다들 겁먹고 외면하는데 명박이가 자기 서너 달치 월급을 털어 선거 자금을 보태줍디다.”

이 당선자는 75년 현대건설 부사장이 된 날 김창대씨를 찾아가 술을 마시며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포항의 어린 시절과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김씨는 기자에게 “맨주먹으로 그 자리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포항 촌사람의 자존심이 마침내 가난과 콤플렉스에 한판승을 거둔 순간이었다.
 
  -/ 글 김선하기자 중앙sunday 제4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