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

-* Special Report : 제17대 대통령 당산자 이명박 [2] *-

paxlee 2008. 1. 10. 14:03

 

              Special Report : 제17대 대통령 당산자 이명박

 
4. 政·財·法·醫·學… 친인척 곳곳에 포진

         이명박 당선자의 가계(家系)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친인척은 정·재계를 비롯해 법조·의료·학계 등 사회 각 분야에 두루 포진해 있다. 특히 재계에선 효성·LG 그룹과 혼맥이 닿아 있다.

이 당선자는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채태원(64년 작고)씨의 4남3녀 중 3남이다. 그러나 6·25 당시 바로 위의 누나 귀애씨와 남동생 상필씨가 사망해 현재는 3남2녀만 남아 있다.

형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역시 둘째 형인 이상득(72) 국회 부의장이다. 포항 동지상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77년부터 88년까지 ㈜코오롱과 코오롱상사 사장을 지냈다.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지금까지 내리 5선을 기록하며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원내총무·사무총장·최고위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큰형 상은(74)씨는 대선 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다스의 대주주다. 다스는 현대자동차의 부품 납품 업체다. 상은씨는 이 당선자의 막내 처남인 김재정(58)씨와 다스를 공동 소유하고 있다. 이 당선자의 중·고교 친구인 김창대(65)씨도 다스의 주주다.

이 당선자는 부인 김윤옥(60) 여사와 70년 12월 19일 결혼했다. 김씨의 큰오빠 재응(작고)씨가 이 당선자의 동지상고 시절 교사와 고교 동창이어서 인연이 됐다. 김 여사는 대구 수창초등학교와 대구여중ㆍ고를 나와 이화여대 보건교육과를 졸업했다.

이 당선자가 서울시장일 때는 걸스카우트서울연맹 명예연맹장,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여성봉사특별자문위 명예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김 여사는 김시구(83년 작고)씨와 최덕례(79년 작고)씨의 3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두 명은 작고했다.

김 여사의 아버지 김시구씨는 전매청 공무원 출신으로 고려화성이라는 회사를 경영했다.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한때 고교 교사 생활을 했던 이 당선자의 친구 김창대씨도 이 회사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이 당선자는 슬하에 1남3녀를 뒀다. 큰딸 주연(36)씨와 둘째 딸 승연(34)씨는 미국 줄리아드 음대를 나왔다. 막내딸 수연(32)씨는 숙명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했다. 모두 전업주부다. 아들 시형(29)씨는 서울고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를 다닌 뒤 한때 국내의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했다.

이 당선자의 세 사위는 각각 법조·의료·재계 출신이다. 맏사위 이상주(37)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3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부산·수원지검 검사를 지내고 퇴직했다. 현재는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다. 법조계 내에서 이 상무는 성격이 원만한 데다 연수원 성적도 좋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시 동기 중에 유승엽·김윤욱·양정일·정상식씨 등이 삼성·SK·한화 등의 기업에 상무급으로 진출해 있다.

둘째 사위 최의근(34)씨는 서울대병원 내과 의사다. 아버지 최윤식(63)씨도 서울대 의대 교수다. 심장ㆍ부정맥 분야가 최 교수의 전공이다. 대한순환기학회 이사장과 한국성인병예방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셋째 사위 조현범(35)씨는 한국타이어 부사장을 맡고 있다. 조양래(70) 한국타이어 회장이 아버지다. 형 현식(37)씨도 같은 회사 부사장이다. 조현범씨의 큰아버지는 조석래(72) 효성그룹 회장이다. 전경련 회장도 맡고 있다. 대통령 당선자와 전경련 회장이 사돈 관계가 된 셈이다.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인 현준(39)·현문(38)·현상(36)씨는 각각 효성 사장·부사장·전무를 맡고 있다. 효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그러나 “선대인 고(故) 조홍제 회장 때부터 ‘정치를 멀리 하라’는 유지가 있었다”며 “앞으로도 정치권과 얽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선자의 둘째 형인 이상득 국회 부의장은 부인 최신자(66)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대구 출신인 최씨는 경북여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이 부의장의 장남 지형(41)씨는 골드만삭스자산운용 대표를 맡고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 출신인 그는 대학 시절 잠시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진로를 경제 분야로 바꿨다고 한다.

이후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한 뒤에는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을 거쳐 자산운용사인 맥쿼리IMM자산운용 사장을 지냈다. 골드만삭스가 이 회사를 인수한 뒤에는 골드만삭스자산운용 대표로 직함이 바뀌었다. 부인은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미대를 나온 조재희(34)씨다.

이 부의장의 큰딸 성은(38)씨는 영동여고와 서울대 심리학과를 나와 구본천(43) LG벤처투자 사장과 결혼했다. 구자두(75) LG벤처투자 회장이 그의 아버지다. 구 회장은 구자경(82) LG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이다. 따라서 구본천 사장은 구본무(62) LG그룹 회장의 사촌 동생이 된다.

이 부의장의 둘째 딸 지은(37)씨는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를 나왔다. 남편은 오정석(37)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다. 현대고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나와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참여정부에서 과학기술부총리를 지낸 오명(67) 건국대 총장이 그의 아버지다.

이 당선자의 친인척 관리 스타일은 어떨까. 고향인 포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은 “현대그룹에 있을 때부터 전혀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의 7촌 조카인 이용주(67)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친척 어른 한 분이 명박이 아재가 현대에 있을 때 서울 자택으로 취직 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간 적이 있다”며 “어른의 얼굴을 보면 안 들어주기 곤란하니까 아예 밤 늦게 들어와 새벽같이 나가 버렸다고 한다”고 말했다.

역시 7촌뻘인 이수형(52ㆍ합기도장 관장)씨도 “30년 전 군 복무를 마치고 취직을 부탁하러 찾아갔더니 ‘젊은 사람이 살아가는 자세가 안 돼 있다. 건물 수위라도 하려면 원서를 내고 아니면 돌아가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엔 서운했지만 그게 자극이 돼 더 열심히 살 수 있었다”며 “임기 5년 동안 친인척으로 인한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글 김선하기자 중앙sunday 제41호 /-

5. 직원들 조금 느슨한 면 보이면'뭐 하러 출근했어?' 다그쳐

                            현대건설 CEO 시절의 이명박

현대 시절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통했다. 1980년대 초반 공사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이 당선자(큰 사진). 오른쪽 사진은 81년 현대건설 신입사원 하계수련회에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모습.
현대 시절 이명박은 ‘오로지 일’로만 세상을 봤다. 그래서였는지 윗사람들에게 이명박은 다소 부담스러운 부하 직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만은 예외였다.

현대건설 상무로 있던 1970년대 초반. 서산 간척사업을 할 때 일이다. 인허가 문제가 잘 안 풀리는 바람에 정주영 명예회장은 임원회의 때마다 짜증을 냈다. 연일 사장·부사장에게 빨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닦달했지만 “잘 안 된다”는 소리만 나왔다. 그런데 회의장 말석에 앉아 있던 이명박 상무가 갑자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며 나섰다. 정 명예회장은 “옳거니, 한번 가 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불과 일주일 뒤 이 상무는 “다 해결됐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미 사전에 해결 방법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건설의 한 전직 임원은 “당시 사장과 부사장 등 고위 임원들의 당황하던 표정이 눈에 선하다”며 “윗사람들에게는 그가 매우 ‘껄끄러운 부하’였지만 정 회장에게만은 예외였다”고 회고했다. 봉급쟁이 시절부터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유형이었다는 지적이다.

윗사람들이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그는 ‘원칙’과 ‘일’을 내세워 따졌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종종 상사들의 견제와 질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특별한 총애’는 이런 난관을 극복하는 바탕이 됐다. 임형택(서울경제포럼 고문) 전 한라건설 부사장은 “현대에 있는 동안 정 명예회장이 이명박 사장을 야단치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현대 사람들은 “CEO 시절 이명박 당선자는 체육행사를 할 때도 악바리 근성이 대단했다”고 기억한다. 왼쪽 큰 사진은 80년대 초반 그룹 체육대회에서 직원들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이 당선자.
“명예회장의 지시는 현대에서 곧 법이다. 하지만 이명박 사장은 이런 정 명예회장을 상대로 반대 의견을 종종 냈다. 워낙 설득을 잘했고 명예회장도 이 사장의 얘기는 들어줬다.”

임 전 부사장은 당시 정 명예회장의 공사현장 시찰을 자주 수행했다. 불같은 성격의 ‘왕(王)회장’은 현장에 자재가 방치돼 있거나 공사 진척이 더디면 “당장 소장을 잘라라”고 소리쳤다. 한번은 임 전 부사장이 이런 회장의 지시를 전달하자 이 사장의 대답은 “노”였다고 한다. 그 뒤 이 사장이 정 명예회장을 찾아가 결국 해고 지시를 거두게 했다. “다른 기회를 주면 잘할 사람”이라며 설득했던 것이다. 어떨 땐 해당자를 6개월 정도 휴직하게 하거나 연수를 보냈다 슬그머니 복귀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王회장과 비슷하면서 다른 스타일

물론 아랫사람들을 쉴 새 없이 몰아가는 면에서 그는 정 명예회장의 스타일을 빼닮았다. 이명박은 사장 시절 임직원들에게 “모두 사장·회장이 돼서 뛰란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부하들을 독려했고, 조금이라도 느슨한 면이 보이면 “산보 다녀왔어? 빈손으로 왔으면 뭐하러 출근했어”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조적인 면도 있었다. 정 명예회장이 과감하고 즉각 즉각 판단하는 스타일이라면 사장 시절의 이명박은 상대적으로 고심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이명박 사장의 비서를 6년간 했던 노치용 현대증권 부사장은 “결재 받으러 가면 ‘기다리라’고 하고 몇 시간씩 고심하곤 했다. 그 시간이 길어져 아랫사람들이 불평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파격 인사’로 성공 가도를 달렸던 이명박 역시 파격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의 입사 동기인 박재면 전 현대건설 회장은 “사장 취임 초기에는 누군가 맘에 들면 이런 저런 단계를 ‘생략’하고 과감히 일을 맡기는 타입이었다”고 말했다. 조선호텔을 지을 때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난 자재담당 직원을 발탁해 자신의 밑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마닐라 공사 당시 수금 문제가 지지부진하자 이명박 사장은 외부 전문가를 파격적으로 영입했다. 그런데 어렵게 데려온 이 인물은 건설회사 경력이 없다 보니 업무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기껏 모셔다 놨더니 다른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명박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대로했다고 한다.

박재면 전 회장은 “이후 그의 인사 스타일이 신중해졌다. 무엇보다 조직 충성도를 십분 고려하는 듯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박 전 회장의 말대로 “같은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어서일까. 실제로 그 사건 이후 이명박의 인사 스타일이 실력과 능력 위주에서 충성도를 따지는 쪽으로 바뀐 듯하다.

이명박은 이번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캠프에서 한번 믿은 사람은 거의 바꾸지 않았다. 파격 인사도 거의 없었다. 78년부터 6년간 이명박 사장 비서를 지낸 노치용 현대증권 부사장도 비슷한 경험을 전한다. 당시 노치용이 실제로 비서실 근무를 하고 있는데도 이 사장은 한 달가량 정식 발령을 내지 않았다. 그냥 전임자의 보조로 일하는 수준이었다.

“이명박 사장은 가끔 내가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그 기간 중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유심히 관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보면 여비서 한 명을 뽑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그냥 두고 얼마 동안 관찰했던 것 같다.”

인사에서도 매정하다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했다. 고려대 출신이 유난히 많아 현대건설은 사내에서 ‘고대건설’이라고 불렸다. 인사철만 되면 청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학연·지연을 거의 따지지 않았다. 현대건설의 한 전직 임원은 “최소한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 출신을 티 나게 챙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정세영 회장이 동문인 고려대 출신을 상당히 챙겨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자기 사람이 없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야 했다.

박정희 “걔 인간 좀 만들어 주쇼”

77년 1월 서른여섯의 나이에 현대건설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명박 사장은 얼마 뒤 포항중·동지상고 동창인 김창대를 찾았다. 단둘이 술잔을 들이켜다 이명박이 별안간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오랜 지기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사 12년 만에 최고 자리에 올랐다. 승승장구라고 표현할 만큼 쉽게 오른 자리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상처가 없을 리 없다. 정 명예회장의 특별한 총애를 받다 보니 주변의 온갖 질시와 눈총을 받았다. 이명박은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자랐다.”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쉼 없이 달려온 12년 속에는 그처럼 남모를 눈물이 스며 있었다. 사실 첫발을 떼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65년 여름 직장을 구하던 이명박의 눈길이 현대건설 신입사원 모집 공고에서 멈췄다. 현대건설의 첫 번째 해외사업이던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 파견사원을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회고다.

“그때만 해도 현대는 임직원 380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였다. 나는 현대를 잘 몰랐다. 그러나 대한민국 처음으로 해외파견 사원을 모집한다고 하니까 매력을 느꼈다.”
당시 스무 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1000여 명의 지원자가 구름 떼처럼 몰렸다. 1, 2차 전형을 끝내고 3차 면접 때 이명박은 신원 조회에 걸렸다. 학생운동 전력이 문제였다. 이때 정 명예회장은 “해외파견 중 문제가 생기면 회사가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의 신원보증 각서를 써야 했다. 정 명예회장은 ‘스물넷의 이명박’을 이렇게 기억했다.

“얼굴이 새카만 녀석이 눈은 살아 있었다.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는데 그때는 똘망똘망하게 보이더군. 그래서 합격시켰다. 나중에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명박이라고 있지요. 아주 고약한 녀석인데 정치권에 기웃거릴 줄 알았는데 현대로 갔더군. 인간 좀 만들어 보세요’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 명예회장에게 골칫덩이 운동권 출신을 ‘인간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이명박은 이를 넘어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다. 입사 5년 만에 이사가 됐고, 12년 만에 사장이 됐다. 나중엔 무려 15년 동안 국내 최대 건설사의 CEO를 지낸다. “태국 건설 현장에서 폭도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다” “신군부의 산업 합리화 정책에 맞서 현대자동차를 지켰다”는 등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를 지켜본 이들은 “이명박 신화는 철저한 준비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66년 태국 도로공사 현장에서 공구장을 지낼 때 신입사원 이명박을 처음 만났다는 임형택 전 부사장의 회고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명박은 경리부 말단사원임에도 거의 매일 야근을 자처하던 특이한 직원이었다”고 기억했다.

“자정에 현장 직원들과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당시 이명박 사원은 경리부에서 혼자 불을 켜놓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무엇하느냐고 물으면 ‘잘 모르는 현장 서류들이 있어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런 밤샘 근무가 곧 빛을 발했다. 정 명예회장이 현장 시찰을 나왔을 때 일이다. 공사가 계속 적자가 난다고 화를 내면서 그는 “공구별 적자 현황을 면밀히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경리부에 난리가 났다. 이때 ‘말단사원 이명박’이 나서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정 명예회장이 이명박이란 존재를 처음 눈여겨보게 된 사건이다.

68년 귀국해 중기사업소에 근무하던 이명박은 1년간 세 번 승진하는 진기록을 세운다. 69년 7월 차장으로 승진하더니 그해 말 부장에 오른 것. 이듬해 5월엔 공무담당 이사가 된다. 이때마다 정 명예회장은 “내가 승진시킨 게 아니야. 자네 스스로 승진한 거야”라며 이명박을 치켜세웠다. 정 명예회장은 그룹 창립 35주년 사사에서 이명박을 벼락 출세시킨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중장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효로·서빙고·관악으로 옮겨 다니면서 중기공장을 운영했는데 이명박 사장이 이를 맡아 건설장비에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 사실 노동자 가운데 가장 다루기 어려운 층이 중기 운전기사다. 이 사장은 그쪽을 완전히 파악해 휘어잡았다.”

성실함도 남달랐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의 판단력을 높이 샀다는 전언이다. 노치용 부사장은 “이 당선자의 순간 판단력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이 당선자는 꼼꼼히 메모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두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치밀하고 세심함이 있었다. 건설업은 각종 사고 처리부터 입찰 금액을 써내는 일까지 순간순간 판단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면에서 놀라움을 많이 보여 줬다.”

그렇다 보니 일부에선 독선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노 부사장은 이를 업종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그는 “결정을 빨리 하고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게 건설회사”라며 “이 당선자는 욕을 얻어먹는다고 멈칫하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대표이사를 하면서 인천제철·대한알루미늄 등 현대가 새롭게 인수한 회사나 한국도시개발(현 현대산업개발)·한무쇼핑(현 현대백화점) 등 신규 설립한 회사의 대표이사를 겸임하도록 한 것도 그의 판단력 때문이었다. 전성기 시절 이명박은 현대 8개 계열사의 CEO를 맡았다.

한편에선 그가 정주영호(號)의 충실한 항해사였지 ‘선장’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 명예회장이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해 오면 이 사장이 살림은 잘했어도 직접 현장을 누빈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돌파력·추진력·아이디어는 좋은데 협상과 조율 능력에서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김정국 전 현대건설 사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이런 시각을 부정했다. 그는 “수주 실적이 없으면 사장 자리를 내놔야 하는 것이 건설회사”라며 “특히 페낭대교는 이명박 당선자의 단독 작품”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일본을 포함해 41개 사가 수주 경쟁을 벌였다. 페낭대교는 말레이시아 본토와 페낭섬을 잇는 8㎞짜리 동양 최대 다리 공사였다. 공사금액만 3억5000만 달러였다. 일본은 차관을 대주겠다고 했고 프랑스는 현대보다 입찰가가 낮았다. 그러나 이 당선자는 마하티르 총리를 설득해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페낭 프로젝트를 따냈다.”

가장 자주 쓰던 말 “내사둬!”

상당수 현대맨의 말대로 이명박은 잔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명절에는 청소부·수위 등 외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자신의 열정적인 업무 스타일 때문에 아랫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운전기사는 특히 고생이 심했다. 종일 자동차로 움직이다 새벽 1~2시에 퇴근하는 것이 예사. 그런 다음 오전 6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더구나 그는 술을 좋아해 가끔 지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이명박은 전혀 불평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출근했다. 총무부장이 운전기사를 교체하겠다고 했지만 이명박은 “내사둬!”라는 한마디뿐이었다. 처음에 아랫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의 “내사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할 때는 엄격하지만 정에 약하고 마음이 여리다는 얘기다. 다만 그는 요령 피우는 사람을 싫어했다. 이명박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진정한 사업가로서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정 명예회장이 인수합병으로 성장한 김 전 회장에게 호감을 가지지 못한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현대맨이라면 이명박에 대해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와 시기를 한꺼번에 받는 이유에서였을까. 이명박은 누구보다 몸가짐이 남달랐다. 현대건설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영일 에머슨퍼시픽 부회장은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피곤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남 보는 데선 하품도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업무상 술자리가 있더라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정국 전 사장은 “업무상 외국인 손님 접대가 있으면 당시엔 삼청각 같은 한식집에서 식사를 했다”면서 “음식 시중을 드는 여종업원을 마치 여직원 대하듯 했다”고 말했다. 해외 출장을 가서도 마찬가지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곧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일이 끝나면 부랴부랴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관광도, 쇼핑도 없었다. 호텔에선 저녁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기 일쑤였다.

현대건설 전직 사장의 말이다. “오너들은 전문경영인에 대해 반드시 이중·삼중으로 검증을 한다. 정씨 집안은 귀가 얇다. 한 방 쏘면 즉각 반응을 한다. 그런데 이 당선자는 10년 넘게 승승장구했다. 그만한 배경은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찾을 수 있다.”
연말 휴가를 빼고는 여름에 있는 신입사원 수련대회가 휴식의 전부. 식목일이나 국군의 날 같은 휴일에도 회사에 나왔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유로 일요일에 쉬는 정도였다. 일만 하다 보니 이명박은 ‘재미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노래도 잘 부르지 않아 회사 임직원들은 “사내 행사 때 어쩌다 부르면 지독히 못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데 80년께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현대 임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 이명박 사장이 배우겠다고 해서 비서가 테이프를 구해줬다. 그래서 출퇴근할 때 이 노래를 유일하게 배웠다고 한다. 이후 기분 좋을 때면 이 노래를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온 이명박 사장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 있었으니 바로 테니스였다. 그는 수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후 서울 도곡동에 있는 현대체육관에서 직장 동료들과 테니스를 즐겼다. 92년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도곡동 체육관은 그의 일급 아지트였다. 그와 같은 테니스 멤버인 김정국 전 사장은 “아마추어치고는 수준급”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당선자와 현대는 껄끄러운 이별을 해야 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 재벌 정책에 불만을 품은 정 명예회장은 통일국민당을 만들어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맞섰다. 이때가 92년 1월. 비슷한 시기 이명박은 현대건설을 떠난다. “같이 정치를 하자”는 정 명예회장의 제언에 으레 ‘예스’를 할 줄 알았는데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 분위기가 냉랭했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현대맨으로 27년을 지냈지만 그는 변변한 퇴임식도 없이 현대를 떠나야 했다. 민자당 비례대표로 정계에 진출하면서는 ‘평생의 후원자’였던 정 명예회장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후 97년 발행된 현대그룹 50년 사사에서는 ‘이명박’이란 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 글 조민근·이상재 기자 중앙sunday 제4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