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고, 오희준·이현조 주연으로 등장한 ‘길’ *-

paxlee 2008. 6. 29. 06:25

 

 

             [화제영화]

          산악 영웅들의 마지막 모습 다룬 다큐 나온다
고, 오희준·이현조 주연으로 등장한 ‘길’ 7월중 전국 동시 상영

지난해 5월 한국 산악계는 슬픔에 빠졌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에 새 길을 내겠다는 각오로 등반을 펼치던 박영석 원정대의 오희준(吳熙俊·사고당시 37세)·이현조(李鉉祚·당시 34세) 대원의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이었다. 5월15일 남서벽 C4(7,900m)에 올라 잠을 자던 이들은 이튿날 새벽 1시45분경 텐트가 무너져 내리면서 1.300m 아래 빙하지대로 추락, 사망했다.


▲ 영화 ‘길’의 무대로 등장하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위용.

박영석과 함께 에베레스트·북극점·남극점을 일컫는 3극점 탐험에 성공한 오희준은 당시 엄홍길·박영석·한왕용에 이어 8,000m급 14개봉 완등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고, 이현조는 2000년 마칼루·브로드피크·시샤팡마 3개 거봉 등정으로 고산등반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이후 몇 년간 멈칫하다가 2005년 낭가파르밧 횡단 성공으로 거벽등반가로서 도약이 기대됐다.


이렇게 뛰어난 등반을 펼쳤기에 두 사람에게 거는 산악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의 사고는 한국 산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오른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등반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산악영화가 ‘길(The Way)’이란 타이틀로 7월 중 전국 개봉관에서 동시 개봉될 예정이다. 이 영화는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30주년을 맞이한 대한산악연맹 ’77 원정대의 베이스캠프 트레킹과 박영석 원정대의 남서벽 원정이 함께 나온다.



“나는 마음을 비웠다. 이제 공은 너희 것이다”


영화는, 힘찬 붓글씨체의 ‘길’ 자와 함께 ‘2007년은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박영석 대장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새로운 길을 내는 원정대를 구성했다. 30년 전 에베레스트를 올랐던 원정대원들도 베이스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했다. 이 영화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대한 기록이다’는 자막과 함께 막을 연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의 카트만두 공항에서 시작한 영화는 77 원정대원들의 에베레스트 베이스트레킹으로 이어진다.

 

30년 전 세계 최고봉 등정의 꿈을 가지고 에베레스트를 향해 걸었을 이들은 이미 노년에 접어들고 있지만 모두들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낭만과 장난기 넘치는 분위기에서 베이스캠프로 향한다. 반면 남서벽 원정대는 캐러밴 기점이 루클라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착륙 직전 짙은 안개로 인해 다시 카트만두로 회항하는가 하면 캐러밴 초반 짐을 나를 야크와 포터가 없어 쩔쩔매는 등 초반부터 애를 먹는다.


텡보체에 도착한 남서벽 원정대가 박영석 대장과 함께 등반하다 목숨을 잃은 악우들의 추모탑에서 제를 올린 뒤 페리체(4,200m)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77 원정대 선배 산악인이 반겨준다. 이 날 밤 선배들이 후배들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연 파티는 ‘설악가’, ‘에델바이스’, 그리고 네팔 민요 ‘렛삼피리리’로 이어지고, 로지에 투숙한 세계 여러 나라의 트레커들이 동참해 밤늦도록 흥이 무르익는다.


이튿날 페리체에서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선후배 산악인들의 모습은 무척 대조적이다. 20~30대가 주축인 남서벽 팀은 발걸음이 가볍고 표정도 밝다. 그러나 77 대원들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선후배가 어우러져 설산이 도열한 산길을 따라 오르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다. 30대 중반인 이재용 대원은 “77, 07이 동행하는 게 너무 고맙다”고 하고, 20대 후반인 김영미 대원은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다. 정상까지 이렇게 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한다.


남서벽 원정대는 빠른 속도로 트레킹을 진행해 한국산악회 실버원정대 베이스캠프(5,400m)를 방문하고 하산 중인 77 선배들을 고락셉(5,180m)에서 만나 격려와 등정주를 받으면서 인사를 나눈 뒤 베이스캠프로 올라선다.


▲ (왼쪽부터) 고 오희준 대원. / 고 이현조 대원.

4월18일, 드디어 등반 시작이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아이스폴로 들어서는 대원들의 모습은 악마의 입으로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섬뜩하게 느껴진다. 이들이 한 발 한 발 오르는 아이스폴에는 악마의 입처럼 무시무시한 크레바스와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압적인 빙탑이 수없이 솟아 있다.


이 날 등반에서 C1(6,000m)까지 겨우 오르던 대원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두 번째 세 번째 등반 때는 전진캠프인 C2(6,400m)까지 당일 정오경이면 도착할 정도로 빠른 적응력을 보인다. 대원들이 C1에서 C2로 향하는 사이 서서히 남서벽이 그 위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하단부는 하얀 눈이 덮여 있지만 중단 이후로는 시커먼 벽이다. 위로 오를수록 커다란 혹이 튀어나온 듯해 괴기하기까지 하다. 남서벽 등반을 앞두고 박영석 대장은 대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나는 마음을 비웠다. 이제 공은 너희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


남서벽은 역시 험난한 거벽이었다. 체력과 경험에 관한 한 대원 한 명 한 명 뛰어난 클라이머이지만, 등반을 마치고 C2로 내려설 때면 하루 사이에 몇 년 늙은 것처럼 피폐해졌다. 그래도 이들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한 발 한 발 오른다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현조는 “굉장히 빡세네요. 이제 2,000m만 더 오르면 된다는 생각으로 등반한다”며, “낭가파르밧 루팔벽에 비해 짧지만 셰르파들이 속을 썩이고 염소(식량)가 빨리빨리 올라오지 않아 답답하다”고 상황을 전해준다.


남서벽 등반 나흘째. 설벽 구간을 지나 바위지대로 접어들면서 남서벽은 악마의 성과 같은 칙칙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이 날 대원들은 루트를 찾아 헤매다 오희준과 이현조 2개조로 나뉘어 루트를 개척하고, 애를 썼지만 “지금 설악산에 연습하러 온 거냐”는 박영석 대장의 호통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장은 대원들의 실수에 대해 이렇게 야단을 치면서도 자신이 직접 빚은 만두와 루클라에서부터 짊어지고 올라온 수박을 썰어놓고 대원들을 격려하는, 따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시 남서벽 등반. 12kg가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 해발 8,000m대 거벽을 오른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 소모를 가져온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대원들은 해발 7,300m 높이의 암부에 C3를 구축하고 까치집이라 명명한다. 대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는 데에서 오는 성취감에 밝은 표정이다. 창 밖으로는 800m 높이의 절벽이지만 흰 구름을 뚫고 솟구친 로체와 눕체는 석양에 반짝이며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죽음을 살아내고자 한 사람들의 이야기


▲ 남서벽을 주마링 등반하는 박영석 대장.

등반은 이 날 이후 더욱 어려워진다. 박 대장이 10년 가까이 등반해오면서 형제처럼 지내온 사다인 장부 셰르파를 비롯해 8명의 셰르파 중 4명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요구하며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뒤 하산해 버린다. 돈도 돈이지만 이들은 남서벽의 험난함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이 날 이후 원정대는 식량과 장비 수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애를 먹는다. 게다가 C3에서 하룻밤 묵은 정찬일은 심한 고소증세로 하체 무기력 증세까지 보이다 이튿날 어렵사리 C2로 내려선다. 박 대장은 그래도 무사히 하산한 정찬일을 반겨주지만 찬일은 원정대에 패를 끼쳤다는 미안함에 텐트 안에도 못 들어간 채 장비 텐트에 쌓아놓은 산소통 더미에 기대어 애처로운 모습으로 잠에 빠져들고 만다.


5월8일. 어버이날이란 얘기를 들은 박 대장은 ABC의 대원들에게 인공위성전화기를 건네주면서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라 하고, 이형모 대원과 정찬일 대원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이상 없다 전하지만 표정을 금세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하다.


다시 남서벽. 해발 7,350m 지점에 올라선 오희준은 로체와 눕체 등 웨스턴쿰 일원의 고봉들을 설명해준 다음 설벽을 오르며 “이렇게 무거운 짐을 메고 8,000m 산을 등반하려니 다섯 발자국을 걷는 것조차 힘들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C2에서 대원들이 머물고 있을 때 몰아친 강풍은 여러 나라의 캠프를 무너뜨리고 날려버리는 등 C2가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까치집은 안전하다. 이형모 대원은 해발 8,100m 지점까지 올라 쿨와르 상단부의 루트 상황을 파악하고 하산, 원정대는 곧 정상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들뜬다.


드디어 정상공격의 날이 왔다. 오희준과 이현조가 15일 새벽 C2 출발을 앞두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데 전기가 나가버린다. 헤드랜턴 불빛에 식사를 마친 오희준과 이현조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남서벽으로 향한다. 출발에 앞서 박 대장은 “이들 두 사람이 보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며 10년 가까이 한 지붕 아래서 살아온 후배들에 대한 믿음을 밝힌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을 좇고 있지만 거대한 남서벽에 매달린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보잘 것 없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 날 등반을 마치기 직전 정상공격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다음날 새벽 2시 등반을 시작, 로프 두 롤 400m를 더 깐 다음 C4로 내려왔다가 그 다음날 정상을 올려친 다음 남동릉 노멀루트를 따라 하산하겠다는 계산이다.


결전의 날을 앞둔 두 사람은 이미 짙은 어둠이 스며든 C4 텐트 안에서 드러누워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오늘 몇 시간 걸은 거냐?”


산소마스크를 쓴 상태에서도 무척 지쳐 보이는 현조는 희준의 질문에 “10시간”이라 단답식 대답을 한다. 이들 두 사람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이자 이현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날 밤 해발 7,500~8,300m 사이에서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쌓이고 쌓이더니 이튿날 새벽 1시를 넘어서면서 텐트를 압박해왔다. 공간이 좁혀지자 답답함에 잠에서 깨어난 오희준은 새벽 1시45분경 BC의 박영석 대장에게 탈출을 시도하겠다고 무전을 날렸다. 그러나 잠시 후 “솨악~” 하는 소리와 동시에 교신이 끊기고 말았다. 눈사태가 오희준과 이현조의 텐트를 덮친 순간이었다.


7월중 전국 개봉관에서 동시 상영


이들과의 교신이 끊어지자 밤새 갑갑해하다 새벽녘 사고를 확인한 박영석은 침통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잡고 실버원정대 베이스캠프의 김종호 부단장에게 소식을 알린다.


“텐트가 없어졌어요. 캠프4가 없어졌어요.”


두 차례의 수색 끝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이들 두 사람은 셰르파들에 의해 베이스캠프로 운구되고, 이튿날 헬리콥터에 실려 카트만두로 옮겨진 다음 형제들과 선후배 산악인들이 지켜보는 사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이들은 이렇게 그들만의 길을 따라 간 것이다.


▲ (왼쪽부터) 셰르파들의 파업 이후 남은 셰르파들과의 단합대회. / 해발 7.300m 지점의 암부에 구축한 C3. 일명 까치집. 로체 페이스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치솟아 있다.

영화는 화장장을 배경으로 하는 자막으로 막을 내린다.


‘8,000m를 오른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고 다리를 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모험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무모하다고 말합니다. 삶이란 본시 예약된 죽음의 다른 형태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뜻밖입니다. 여기, 죽음을 살아내고자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이더스FNH 제작, 김석우 감독 촬영, 러닝타임 100분의 이 영화에는 세계 최고 높이의 에베레스트에서도 어렵다는 남서벽에 새 길을 내려는 산악인들의 의지가 담담하게 전해지고 있다. 루클라에서 팡보체와 페리체, 고락셉을 거쳐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캐러밴을 통해 골짜기 양옆으로 흰 눈을 머리에 얹은 채 고봉들이 치솟아 있는 쿰부 히말라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아이스폴~쿰부빙하로 이어지는 에베레스트 등반과정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르는 사이 맞은편에 웅장하게 치솟은 로체와 눕체가 눈에 들어오는 것도 큰 볼거리다.


영화는 7월중 전국 개봉관에서 동시 상영될 예정이다.



인터뷰
다큐멘터리 영화 ‘길’ 제작한 김석우 감독
“자신의 꿈 좇는 산꾼의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


김석우(金石友·37·사이더스FNH) 감독은 다큐멘터리 산악영화 ‘길’을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30주년에 많은 의미를 두며 만들고 싶었다. 77 원정대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우리가 산악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와 같은 선배 산악인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후반부에 들어가 박진감 넘치는 남서벽 등반을 통해 신루트 등반의 가치를 부각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대원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갑작스런 죽음이 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너무 좋고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분명 산악 영웅이되 영웅으로 다루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꿈,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는 클라이머로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김 감독은 촬영을 위해 이 원정에 참가했으나 촬영 외적인 일 때문에 많은 고생을 겪어야했다. 원정 초 셰르파들이 보너스를 무리하게 요구하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8명 중 4명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촬영장비뿐 아니라 자신의 등반장비도 직접 C2까지 올려야했다. 그리고, 또한 남서벽 7,300m까지 오르면서 클라이머들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희준, 이현조는 정말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제가 힘들어하면 슬쩍 다가와 짐을 덜어주곤 했으니까요. 저는 해발 7,300m까지밖에 촬영하지 못했어요. 제가 오를 수 있는 능력이 거기까지였으니까요. 이형모 대원이 남서벽 등반의 많은 부분을 촬영해 주었어요. 사고 직전 C4까지 오르고 텐트 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오희준 부대장이 찍은 거랍니다. 사고 직후 설원에서 캠코더를 발견했을 때 많이 망가져 있었지만 다행히 복원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사고 당시 C2에 홀로 머물다 1,300m 아래 빙하지대로 떨어진 시신을 찾아나서야 했던 김 감독은 “사고 당시 어찌나 힘들고 슬펐던지 너무 많이 울었다”며, “편집하느라 깜깜한 밀실에 갇혀 죽은 이들을 몇 달간 쳐다보다 보니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라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길’에 대한 김 감독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 영화는 기존의 필름 방식도 DVD 방식도 아니다. 500기가가 넘는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영화를 그대로 방영하기에 원본의 손상이 거의 없이 고화질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한국 최초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전국에 동시 개봉하고, 하드디스크를 통한 첫 번째 방영입니다. 디지털 개봉은 가장 친환경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필름으로 촬영하다 보면 필름작업 시 폐수가 많이 발생하고, 필름 또한 나중에는 폐기물로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영화 ‘길’에서 내레이션도 직접 해낸 김석우 감독은 사고로 주제가 뒤바뀌면서 77 대원들과 나눈 많은 인터뷰를 영화에 담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이 많다고 말한다.


“흥행에 성공한다면 77 선배님들의 얘기를 많이 넣은 DVD를 따로 제작할 생각입니다. 오희준 이현조 대원들의 인터뷰 내용도 들어갈 거고요. 등산사료로서 가치있는 DVD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98년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을 나온 뒤 2000년 울산대 탈레이사가르 원정에 참가, 해발 6,500m까지 직접 등반하면서 촬영한 영상물을 ‘우리는 그곳에 갔다’는 타이틀로 선보이기도 했던 김석우 감독은 백두대간을 두 차례나 완주하고 최근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원래 연출이 전공인데 고산등반을 촬영할 만한 사람이 없다보니 제가 캠코더를 들게 된 거랍니다. 솔직히 지난 1년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특히 밀실에 갇혀 지내는 게 너무도 지겨웠습니다. 죽은 이들의 모습을 다시 볼 때마다 너무도 가슴 아팠어요. 너무도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대간을 걸으면서 악몽을 훌훌 떨쳐버리고 싶습니다.”

  - / 글 한필석 차장대우 /사진 이한구 사진가 / 월간 산 [464호] 2008.06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