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악문학의 걸작 '유럽의 놀이터'의 저자 '레슬리 스티븐' *-

paxlee 2008. 6. 30. 21:03

 

            산악문학의 걸작 '유럽의 놀이터'의 저자 '레슬리 스티븐'(1832~1904)


 

해발 3,454m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역이 있는 스위스의 융프라우요흐. 만년설과 빙하, 고봉이 에워싼 환상적인 이곳을 레슬리 스티븐이 처음으로 횡단했다.

영국인이 쓴 세계등반사는 영국인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인이 쓴 등반사의 중심은 이탈리아인이며, 프랑스인이 쓴 등반사의 중심은 프랑스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누구보다도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들의 팔이 안으로 굽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모든 제 각각의 등반사에서 공통된 업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재론의 여지가 없는’ 업적으로 손꼽힌다.

 

산악문학사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거의 모든 세계등반사에서 최고의 산악문학으로 꼽힌 작품은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작품은? 레슬리 스티븐(1832~1904)의 <유럽의 놀이터>라는 데 이견이 없다.

 

에드워드 윔퍼는 널리 알려져 있듯 마터호른의 초등자이다. 이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념비적 업적에 속한다. 레슬리 스티븐 역시 숱한 초등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른 슈렉호른, 블륌리잘프, 비에치호른, 림피시호른, 지날로트로흔 등은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산 이름일 뿐이다.

 

<알프스 등반기>는 한 개인의 영웅담이다. 곳곳에서 과장과 왜곡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적’ 서술방식으로 쓰여졌다. 반면 <유럽의 놀이터>는 차분한 에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일반인들이 어떤 책을 더 좋아했을지는 불을 보듯 빤하다. 덕분에 <알프스 등반기>는 산악문학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제2위의 걸작’으로 꼽히는 <유럽의 놀이터>에 좀 더 마음이 이끌린다. 이 책은 그 제목부터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제목이 지칭하는 ‘유럽의 놀이터’란 다름 아닌 ‘알프스’를 뜻한다. 세상에, 알프스를 ‘놀이터(playground)'라고 표현하다니, 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일인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알프스는 ‘용과 악마가 살고 있는 끔찍한 곳’에 불과했다. 19세기에도 그곳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알프스를 ‘놀이터’라고 부르다니 이 얼마나 도발적이고도 통쾌한 발상의 전환인가.

 

일반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책이 <알프스 등반기>라면, 산악인과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책은 <유럽의 놀이터>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개가 부르주아 지식인들이었다. 따져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일반인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 험난한 산에 오르겠는가. 덕분에 당시에 산에 오르던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취미생활’에 대하여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대놓고 자랑스럽게 “나는 산에 오른다”고 밝히게 된 데에는 <유럽의 놀이터>가 끼친 영향이 크다.

 

이 책에서 묘사된 등반은 그만큼 지적이고, 우아하며, 고상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일대 발상의 전환을 일으켜, 이후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산에 올라야 한다’는 식의 풍조를 만연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레슬리 스티븐 자신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런던대학와 케임브리지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일찌감치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임용된 다음 27세 때 영국 국교회 목사로 취임한 젊은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후 그를 매료시킨 칸트의 철학은 평탄하던 그의 삶을 ‘돌아올 수 없는 강’ 너머로 건너가게 했다.

 

정통신학에 회의를 품고 ‘불가지론’에 기울더니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등반에 미친 재야학자’로 변신한 것이다. 레슬리는 그의 책에서 고백한다. ‘인간은 들판을 옥토로 만들 수도 있고, 강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산은 불요불굴의 자연력의 상징이다.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과 삶의 덧없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은 산을 숭배하게 된다.’

 

그는 하루에 40마일(64㎞) 걷기를 생활화했던 산악인이다. 영국산악회 회장 재직 당시에는 케임브리지에서 런던까지의 80㎞를 12시간 동안 걸어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위에 열거한 숱한 산들의 초등기록과 더불어 아이거요흐와 융프라우요흐를 최초로 횡단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런 열정적인 등반활동 중에도 <18세기 영국사상사>(1876), <스위프트>(1882), <영국의 공리주의자>(1890), <18세기의 영문학과 사회>(1904) 등 엄청난 분량의 저서들을 출간했다니 그저 놀라운 뿐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그를 19세기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학인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산악인들에게 그는 여전히 <유럽의 놀이터>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유럽의 놀이터>의 서문에서 레슬리는 25년 전 그와 함께 몽블랑 정상에서 일몰을 맞았던 샤모니의 화가 가브리엘 로페와의 추억을 고백한다. 가브리엘은 캔버스를 펼쳤고 레슬리는 얼어붙은 와인을 꺼냈다. ‘수많은 암봉과 빙하가 석양빛을 받아 불바다를 이루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던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몽블랑의 일몰에는 변화가 없으나, 그 산에 오르던 인간은 늙어버렸구나.’ 그가 남긴 저 숱한 명저들도 <유럽의 놀이터>에 실린 이 짧은 문장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가방 끈 짧은 산악문학 작가만의 오산일까?

 


 

버지니아 울프가 레슬리의 딸… 산행 즐겼다면 자살 없었을까?

 

레슬리 스티븐의 첫 번째 부인은 정신질환으로 숨졌다. 이후 그는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했는데, 당시 줄리아가 데려온 자식이 4명이었고 레슬리 자신의 자식이 1명 있었다. 레슬리와 줄리아는 이후 4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덕분에 모두 9명의 자녀를 기르게 된 것이다. 이들 중 8번째의 딸로 태어난 아이가 훗날 세계적인 여류 소설가로 이름을 떨친 버지니아 울프(1882~1941)다.

 

버지니아 울프는 고백한다. “아버지의 서재에 책이 넘쳐 났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9명의 형제들 속에서 시달릴 때마다 나는 책 속의 세계로 빠져들었지요.” 레슬리와 버지니아의 부녀애도 대단했다고 한다. 레슬리는 틈 날 때마다 이 병약했던 어린 독서광 딸을 데리고 가벼운 산행을 즐겼다. 하지만 레슬리는 버지니아가 18세가 되던 해에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훗날 버지니아가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을 때 쓴 편지를 보면 그녀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벼운 산행을 은근히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산에라도 오르지 그러느냐고 권하면 그녀는 지레 손사래를 쳐대며 새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산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어렸을 때 아빠 따라서 지겹게도 올라 다녔다고요!” 나는 그녀가 소설을 쓰는 대신 산에 올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정신분열로 삶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