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카랑가 캠프의 아침. 하루쯤 더 쉬었다 가고픈 유혹을 받는 곳이다. (하)후루피크에 올라선 이기열, 석상명, 김영미씨(왼쪽부터). 이기열씨는 일출 장관에 넋을 잃고 있다.
- 11월29일. 오늘은 윗세오름 너른 사면에서 아침햇살에 흉물스런 모습을 벗어던지고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드러내는 한라산 부악을 보는 기분이다. 메루산도 아침을 맞아 불쑥 솟구친다. 우리에게 힘내라 격려해주는 분위기다.
카랑가에서 바라푸까지는 2시간 조금 넘는 거리다. 1시간쯤 오르자 정상으로 오르던 캐나다 모녀와 오스트리아 청년이 쉬고 있다. 한 가족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만나 함께 트레킹을 하는 중이었다. 방학을 맞아 중학생 딸을 데리고 킬리만자로를 찾았다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는 말에 모녀는 너무도 즐거워한다. 아직 서른이 안 된 오스트리아 청년은 조금만 더워도 웃옷을 벗어버리는 등 건강미를 자랑해 일행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다시 밤을 맞는다. 구름이 벗겨지자 메루산이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듯 솟아 있다. 키보는 다시 달빛과 별빛에 반짝이고, 산 아래 마을에서는 불빛이 하나 하나 켜지기 시작했다. 어제와 달리 살짝 흥분이 인다. 내일 밤 출정에 나서기 때문인가 보다.
새벽 1시경 잠에서 깨어난다. 너무도 조용한 산이다. 이와 비슷한 높이의 설산이라면 크고 작은 눈사태와 크레바스 갈라지는 소리 등 간간이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건만 킬리만자로는 너무도 조용하다. 그렇지만 산 아래 마을의 불빛과 교교히 흐르는 달빛에 아름답고도 맑은 빛을 띠는 키보는 너무도 아름답다. 바라푸 캠프 위로 랜턴 불빛이 보인다. 정상을 향하는 이들의 움직임이다. 24시간 뒤면 내가 저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 바라푸 캠프가 보이자 모두들 힘이 솟는가 보다. 조셉을 제치고 쭉 뽑는다. 그러자 조셉은 킬리만자로 가이드를 잡으려 하느냐며 천천히 가자고 엄살을 부린다. 그런데도 이기열씨는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힘차게 오른다.
키보에서 뻗어내린 능선상의 캠프인 바라푸에 올라서는 순간 열댓 살 나이의 소년이 내려선다.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이었다. 어린 소년의 얼굴과 눈빛에서 당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역시 아프리카 최고봉을 올랐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리라.
능선에 올라서자 불꽃 같은 기세로 솟아오른 마웬지가 보이고 마랑구 루트가 가로지르는 고원사막이 내려다보인다. 이에 시라에서 키보 남사면을 내내 바라보고, 동단의 마웬지까지 보게 되었으니 킬리만자로의 반은 보았다 싶다. 정말 제주도 면적의 두 배에 이를 만한 큰 산답게 천의 얼굴을 가진 산이 킬리만자로였다.
- ▲ 바라푸 캠프를 향하는 트레커들. 앞에 보이는 능선 상에 바라푸 캠프가 자리잡고, 이 능선을 타고 스텔라포인트까지 오른다.
- “정옥아, 신영아~, 내가 해냈다”
잠시 풍광을 즐기는 게 못마땅했던지 어디선가 구름이 몰려오더니 또다시 키보를 감춰 버린다. 주방장 겸 리더인 김영미씨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사이 하늘이 어수선해진다. 눈보라가 치고, 싸락눈이 내리고, 강풍이 몰아친다. 그런데 조셉은 우리에게 운이 정말 좋단다. 이런 날 밤에는 바람도 거의 없고, 기온도 포근하다고 한다.
대낮에 잠을 청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눈을 감고 있지만 머리는 맑기만 하다. 까마귀는 깍깍대다 텐트 옆 바위에 앉는다. 현지인들이 던져주는 먹을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다람쥐처럼 생긴 쥐새끼들은 어디서 나왔는지 여러 마리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부스럭거린다. 그렇게 신경이 곤두섰다 몽롱해졌다 하다보니 밤 10시가 되고 말았다. 또다시 김영미씨가 끓여준 누룽지 한 공기씩 먹고 키보 정상 우후루피크로 향한다. 별을 따러, 꿈을 찾아서-.
- ▲ (상)하산길에 바라본 마웬지. 일행의 왼쪽 능선자락 끝에 키보산장이 자리잡고 있다. (하)음웨카 캠프에서 키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한 킬리만자로 트레킹단.
- 능선길 따라 두어 시간 오르더니 급사면 길을 또다시 두어 시간 오른다. 분화구 상의 바위인 스텔라포인트(Stella Point·약 5,750m) 아래 안부에 올라선 것은 오전 4시30분, 바라푸를 출발한 지 5시간만이다. 일행 중 체력과 고소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석상명씨는 변비를 해결하겠다고 어제 오후 먹은 설사약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는데도 끝내 스텔라포인트에 올라서고 만다.
이제 약 150m만 오르면 아프리카 최고봉의 정점에 선다. 키보 산장에서 출발한 트레커 한 명이 가이드와 함께 먼저 우후루피크로 향한다. 한쪽은 빙하, 한쪽은 분화구를 이룬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사이 등뒤로 구름바다를 뚫고 햇살이 올라온다. 마웬지도 창 끝 같은 정수리를 슬며시 드러낸다.
“정옥아, 신영아~, 내가 해냈다.”
오전 5시30분, 우후루피크 정점이 바로 앞에 다가오자 이기열씨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등정의 기쁨을 쏟아낸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자 분화구가 전모를 드러내고, 외곽으로 거대하게 형성된 빙하가 반짝인다. 과연 기상학자들이 예상하듯이 몇 십 년 안에 녹아내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거대한 빙하는 키보를 감싼 채 반짝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셉은 너무 오래 머물면 고소증세가 나타나고 지치므로 어서 내려가자 서두르지만 일행은 일출에 넋을 잃고, 조망에 감탄하고, 사진 촬영에 열중하느라 좀체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키보는 구름을 뚫고 솟구친 아침해와 더불어 다시 새날을 맞고, 수많은 트레커들이 우후르피크를 향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