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알프스의 4,000m급 명봉 (5)] 브라이트호른 트윈 & 로치아네라 *-

paxlee 2009. 3. 25. 21:27

        [알프스의 4,000m급 명봉 (5)]  브라이트호른 트윈 & 로치아네라

4,000m급 5개 연봉 중 3개봉 하루에 연속등정
브라이트호른 고개~웨스트트윈~이스트트윈~로치아네라~비박산장

영어로 ‘브로드피크(Broad Peak)'란 뜻이 있는 발래(Valais) 산군의 브라이트호른(Breithorn)은 말 그대로 4,000m 넘는 능선이 2.5km나 펼쳐진다. 드넓은 능선에는 지난번에 오른 브라이트호른 주봉과 중앙봉 외에도 UIAA(국제산악연맹)가 인정한 4,000m급 봉우리가 3개 더 솟아 있다. 바로 브라이트호른 웨스트트윈(West Twin·4,139m)과 이스트트윈(East Twin·4,106m), 그리고 로치아네라(Roccia Nera·4,075m)다.


이 봉우리들은 차례로 동쪽으로 위치해 있는데, 로치아네라가 긴 능선의 동쪽 끄트머리에 솟아 있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북측인 체르마트(Zermatt)쪽은 가파른 암벽과 빙설벽이 펼쳐져 있으며, 남측인 이태리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설사면과 빙하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체르마트에서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3,884m) 전망대행 케이블카를 이용해 남남서면으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봉우리들이라는 이점은 있지만, 능선 횡단시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4,000m급 등반대상지다. 브라이트호른 주봉(4,164m)과 중앙봉(4,159m)을 오른 우리들의 다음 등반대상지는 당연히 나머지 세 봉우리였다.


▲ 쌍둥이 봉우리 사이 능선을 횡단하고 있는 일행. 저 멀리 몬테로자와 리스캄이 보인다.


4,000m급 5개 봉을 두 번에 나눠 모두 올라


광활한 브라이트호른 설원의 동쪽 끄트머리인 3,824m의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눈밭에서 캠핑한 일행은 해뜨기 전에 산행을 시작했다. 브라이트호른 고개에서 동쪽으로 난 설원으로 내리막을 내려간다. 얼마 후 갈림길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아래의 큰 길은 베라(Verra) 빙하 상단을 가로지르며 또 다른 4,000m급 봉우리인 카스토르(Castor·4,223m)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쪽 길은 우리가 가는 세 봉우리를 등반한 후 들르게 되는 로치에볼랑 비박산장(Rossi e Volante Bivouac Hut·3,750m)쪽으로 나 있다. 당연히 우리들은 위쪽 길을 따랐다.


이른 아침이라 바람이 꽤나 차다. 이제부터 완경사 설사면이 이어진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아 모두의 발걸음이 무겁게만 보인다. 필자와 임덕용 선배, 그리고 후배 나현숙과 남동건 선배 순으로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걷고 또 걷는다. 캠프를 떠난 지 1시간쯤 되자 또 다른 갈림길이 나왔다. 계속해서 평지의 눈밭을 따라가면 비박산장이 나오는 길이며, 위쪽으로 난 길을 따르면 우리가 오를 길이다. 즉 위쪽 길은 브라이트호른 중앙봉과 웨스트트윈 사이 안부에 닿는 길이다. 안부로 이어지는 급경사 설사면 아래에서 등반복장을 고쳐 입고 장비를 점검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등반이다. 하나 둘씩 도착하는 일행을 기다리며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3명의 이태리 산악인이 우리를 앞질러 오른다. 아마도 그들은 비박산장에서 하룻밤 묵고 왔음이 분명해 보인다.


앞질러간 이태리인들을 보며 우리도 안자일렌을 한다. 물론 필자는 따로 가기로 하고 후배 나현숙, 남동건 선배, 그리고 임덕용 선배 순으로 자일을 묶는다. 브라이트호른 중앙봉과 웨스트트윈 사이의 안부로 이어진 급경사 설사면은 왼편 상단으로 비스듬히 이어져 있다. 이미 오른 이들의 발자국이 있어 어렵지 않게 꾸준히 오르다보니 어느덧 안부에 올라선다. 반대편인 체르마트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계곡 주변의 4,000m급 봉우리들이 도열한 듯 우뚝 솟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발길을 동쪽으로 돌린다.


북측인 왼편으로 커니스가 심하게 진 설릉을 따라 우리는 웨스트트윈을 향해 간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일행 뒤로 마터호른이 우뚝 솟아 있다. 세계적인 미봉 마터호른의 동남면이 시야에 훤히 들어온다. 체르마트에서 보는 아름다움만 못하다. 한동안 설릉을 따르던 우리는 정상부 바위지대에 가로막혔다. 할 수 없이 우측으로 우회한다. 필자가 먼저 올라 암각에 확보한 후 나머지 일행 셋이 뒤따른다. 두 피치를 이렇게 오른 후 마침내 브라이트호른 웨스트트윈 정상에 선다. 뒤따르는 일행 뒤로 이태리의 베라 빙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그 위로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다.


정상에 선 일행들 모두 환한 웃음을 짓는다. 정상에는 누군가가 꽂아 놓은 대나무에 작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일곱 번째 오른 4,000m급 봉우리였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 정상에서의 조망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바람이 꽤나 심했을 뿐더러 갈 길이 멀어 우리는 곧 정상을 등지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스트트윈에 오르기 위해서다.


▲ 1 이른 아침 브라이트호른 고개에 친 캠프에서 등반준비를 하고 있는 일행. / 2 커니스 진 능선을 따라 브라이트호른 웨스트트윈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 / 3 웨스트트윈을 오르는 일행들 뒤로 저 멀리 마터호른의 동남면이 보인다.

이스트트윈으로 향하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눈 덮인 능선이다. 저 멀리 리스캄과 몬테로자를 앞에 두고 한 발 두 발 전진한다. 능선을 동으로 횡단하며 두 군데의 바위지대를 조심해서 내려선 후, 동서 쌍둥이봉 사이의 안부에 내려선다. 마침 남녀 두 산악인이 이스트트윈쪽에서 오더니 우리를 지나친다. 서로 갈 길이 먼 탓이라 헬로 라는 인사만 나눈 채 헤어진다. 안부에서 정상까지는 급경사 바위지대라 오른편 아래로 급경사 설사면을 꽤나 걸어 내린다. 모두들 조심해서 아이젠을 내딛는다. 자칫 잘못하면 몇 백 미터는 족히 추락이다. 약 200m쯤 정상부 바위지대를 피해 아래로 비스듬히 내린 다음, 급경사 설사면을 오른다. 간혹 몇몇 구간은 프런트포인팅이 필요할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


뒤따르는 일행을 보니 안자일렌을 한 채 꾸준히 오르고 있다. 이른 아침에 이태리쪽에 펼쳐졌던 구름바다가 이제는 심하게 파도를 치듯 일렁이고 있었다. 곧 저 구름바다가 4,000m대의 이 국경능선을 타고 넘을 형상이다. 시간은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일행들도 이스트트윈 정상 아래 능선에 올라섰다. 시간이 촉박함을 느낀 남동건 선배는 등정을 포기하겠다며 우리 셋에게 양보한다. 함께 오르자며 설득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곧장 동쪽 면을 따라 정상으로 오른다. 숨을 헐떡이며 오른 정상에선 짙은 구름이 남쪽 이태리에서 북쪽 스위스로 넘고 있었다. 셋이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나눈다. 여덟 번째 오른 4,000m급 명봉이었다.


잠시 주변 풍광을 둘러보지만 급변하는 날씨 탓에 즐길 여유라곤 없다. 아쉬움을 달래며 하산을 서두른다. 조심해서 안부에 내려선다. 아무리 급할지언정 아이젠을 내딛는 발걸음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정신을 바짝 차리며 잰 걸음으로 남 선배와 헤어졌던 안부에 닿으니 그는 이미 능선을 따라 먼저 출발한 뒤였다.


우리 셋은 그를 따라잡기 위해 서두른다. 앞서 걷고 있는 일행 왼편은 커니스가 심하게 져 있다. 북벽으로 떨어져내릴 듯 커니스가 갈라진 균열면을 몇 미터 사이에 두고 걷는다. 앞서가던 남 선배와 합류하자 구름이 우리를 집어삼킨다. 시야는 2, 3m밖에 되지 않는다. 다행히 이전 등반자들의 발자국이 있어 조심해서 따른다.


짙은 안개 속을 걷듯 굴곡진 설릉을 한동안 횡단해 오르막을 오르자 둥그런 정상부 언덕이 나타났다. 더 이상 높은 곳은 없다. 아이젠 발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로치아네라 정상임이 분명했다. 정상에서의 멋진 풍광을 기대했기에 아쉬웠지만 웨스트트윈에서부터 무사히 횡단한 사실만도 기뻤다. 우리는 힘차게 손을 모아 등정의 기쁨을 나눴다.

 

 

간단히 사진 한 장을 찍자마자 하산을 서두른다. 안자일렌을 한 채 앞서가고 있는 일행 셋을 뒤따른다. 한참 걸었을 때다. 빠르게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구멍이 뚫린 듯 체르마트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껏 눈을 가린 거와 같은 상황에서 이런 장면은 의외라 급히 카메라를 꺼낸다. 바로 그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필자 자신의 아이젠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왼손에 카메라를 든 채, 오른손에 들고 있던 피켈을 급히 설사면에 꽂지만 어설펐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넘어진 방향이 횡단하던 설사면 위쪽이었다. 하여 넘어진 자세 그대로였다. 만일 아래쪽으로 넘어졌으면 최소한 수백 미터의 설빙벽 아래로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온몸에 흐른 식은땀을 느끼며 일어선다. 앞선 일행 셋은 필자가 겪은 끔찍한 순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혹 필자가 왼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을지 그들에겐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 1 웨스트트윈 정상. / 2 웨스트트윈 정상에 접근하고 있는 일행들 아래로 베라 빙하과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다. / 3 이스트트윈 정상에 오르고 있는 임덕용 선배와 후배 나현숙. 뒤에 솟은 봉우리가 로치아네라다.

 

바로 지금 그런 일을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무 일 없었던 듯 그들을 따라잡는다. 브라이트호른 고개에 친 캠프로 돌아가기 위해선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순 없다. 우선 로치아네라 남쪽 아래에 위치한 비박산장쪽으로 내려가다가 브라이트호른 남측 아래쪽 사면 즉, 베라 빙하 상단부를 가로질러야 한다. 물론 이것은 구름에 휩싸이기 전에 하산루트를 세심하게 살핀 덕에 어렵지 않게 길을 잡을 수 있었다.


한동안 급사면을 조심해서 걸어 내린다. 짙은 구름 속에서 계속되는 내리막이라 지겹고 지친 발걸음이다. 하지만 발아래가 어떤지 모른 상황이라 내딛는 발걸음마다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 다리가 후들거릴 즈음 갈림길이 나왔다. 하산하던 방향에서 직감으로 오른편에 나 있는 길이 우리의 캠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적어도 2시간은 설원 위를 더듬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왼편 아래쪽에 비박산장이 있음을 알고 있던 터라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왼편의 작은 눈 언덕을 넘어가니 몇 십 미터 바위사면 아래에 우리가 찾던 비박산장이 있었다. 조심해서 바위사면을 걸어내려 산장에 닿았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다. 하루에 4,000m 봉우리 셋을 오른 후의 안도감이 이제야 느껴진다. 눈 덮인 옷을 털어 말리며 따뜻한 차를 마신다. 뒤늦은 점심을 먹으며 구름이 걷히길 기다린다.


▲ 로치아네라로 향하던 중 커니스가 심하게 진 구간을 이동하는 일행.차츰 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 이스트트윈 정상에서 하산하는 일행. 차츰 구름바다가 4,000m 능선을 넘고 있다.

 

어둠이 내리기까진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구름이 걷힐 기미가 없었다. 하여 비박산장에서 하루를 묵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캠프로 돌아가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10여 명이 잘 수 있는 비박산장 내부에는 담요가 있었다. 하지만 식량과 연료가 충분한 캠프에 비하면 열악하기 그지없었기에 모두 돌아가길 원했다. 또다시 복장을 고쳐 입고 아이젠과 안전벨트를 찬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우리는 오던 길을 되돌아 눈 언덕에 올라선다. 이제부터 브라이트호른의 기나긴 4,000m대 능선을 오른편에 두고 즉, 설사면 위쪽을 오른편에 두고 서쪽으로 길을 잡기만 하면 캠프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걷는다. 한참을 걸었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베라 빙하 아래쪽으로 걷는 것만 같았다. 실수의 인정은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에 맨 앞에서 걷던 필자는 급히 걸음을 멈추고 설사면을 되돌아올라 마침내 옳은 길을 찾았다.


짙은 구름 속에서 눈까지 내리는 상황이라 설원에 나 있는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캠프에 도착해야 했다. 모두들 묵묵히 걷는다. 이윽고 약 1시간만에 이른 아침에 지나쳐왔던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캠프까지 대로나 마찬가지였다. 브라이트호른 고개까지 한동안 눈언덕을 걸어 오른다. 모두들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캠프가 멀지 않음을 알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물론 캠프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꽤나 떨어진 설원에 위치해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우리 모두 굳은 악수를 나눈다.


구름은 그날 밤 내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텐트에 아늑하게 보금자리를 튼 우리들은 하루에 3개의 4,000m급 봉우리를 오른 기쁨을 마음껏 나눴다.


등반정보


1813년 8월에 메이나드(H. Maynard) 일행이 초등한 브라이트호른은 아마도 알프스에서 가장 접근이 용이하고 쉽게 오를 수 있는 4,000m급 봉우리 중 하나다. 물론 이것은 2.5km 길이의 능선에 펼쳐진 다섯 개의 4,000m급 봉우리들 중 맨 서쪽에 위치한 주봉과 중앙봉인 경우에 한하며 로치아네라까지 다섯 봉우리를 한꺼번에 횡단하려면 많은 시간과 알파인 등반경험이 필요하다. 하여 중앙봉과 웨스트트윈 사이의 안부를 기준으로 둘로 나눠 하루씩 등반하는 게 일반적이다.


잠자리는 클라인 마터호른 전망대 아래의 강데그 산장(Gandegg Hut·3,029m·전화 028672196)을 이용해도 되며, 능선 가장 동쪽 봉우리인 로치아네라 아래의 비박산장(Rossi e Volante Bivouac Hut·3,750m·비상전화 없음)을 이용해도 된다. 12명이 묵을 수 있는 이 비박산장에는 침상과 담요밖에 없기에 취사도구는 따로 준비해야 하며, 여름성수기엔 붐빌 가능성이 있어 일찍 도착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편 여름 시즌에는 브라이트호른 설원에서 캠핑도 권할 만하다.

- 글·사진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 / '월간 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