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7] *-

paxlee 2009. 4. 1. 22:13

 

 2. 북악산 (4)

 

청와대의 역사

 

 

오늘은 북악산 아래 가장 좋은 자리에 존재하는 청와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사실 불로그에 정치적인 이야기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념논쟁에 관한 이야기는 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울의 산을 이야기 하면서 북악산과 관계가 있는 역사적인 건물 청와대를 이야기 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어 간단하게 청와대에 얽힌 이야기를 집고 넘어가려 한다. 청와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길지중의 길지에 속한다고 알려져 왔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駱山), 우백호인 인왕산(仁旺山),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시내를 통과해 동쪽으로 흘러가고, 객수(客水)인 한강이 동(東)에서 서(西)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위치한 세종로 1번지 일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때인 1104년경, 고려의 이궁(離宮)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곳을 삼경(三京)으로 삼았는데, 숙종때 동경대신 한양 이곳에 이궁을 두고 남경으로 삼았다. 청와대 자리는 고려시대의 궁터였고 조선시대 1426년(세종8년) 경복궁이 창건됨에 따라 궁궐후원으로 정해져 연무장, 융무당, 경농재, 과거장이 서고 왕의 친견장소로 사용했다. 1927년 일제총독이 오운각 외의 모든 건물을 헐고 관저를 지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군정장관 관저가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이곳에 있던 경무대의 이름을 따서 ‘경무대’로 명명하여 집무실 겸 관사로 사용하였다.

 

1960년 4.19혁명 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무대에 대한 국민의 인상이 좋지 않다 하여 '청와대'로 개칭하였다. 청와대(靑瓦臺)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관계된 행정기관을 말하며, 동시에 집무공간인 대통령 관저를 말한다.  1).본관 -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로 1991년에 신축되었다. 2).영빈관 - 대규모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로서 1978년에 준공되었다. 3).대통령 관저 -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곳으로 1990년에 준공되었다. 4).상춘재(常春齋)-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곳으로 전통 한옥이다. 1983년에 준공되었다. 5).춘추관(春秋館) -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기사송고실로 사용되는 곳으로 1990년에 준공되었다.

 

현재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101단, 구 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 번지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총 면적이 3개동 73필지 76,685 평에 달한다. 청와대 주인인 한국 대통령의 약사(略史)를 돌아볼 때,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한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에 자리잡은 대통령관저의 주인들의 면면은 불행하기만 하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으로 인하여 부패정치에 빠져 4,19혁명으로 하야를 하여 외국에서 불행한 일생을 보냈다. 

 

박정희는 5대~9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군사독재 정치로 비난을 받았으며,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통령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장지집권으로 인하여 결국 핵심 참모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하였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부인 육영수 여사와 같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은 박정희대통령의 급서로 12,12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군인출신으로 군사정권의 연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물러난 후 감옥을 다녀오는 불행한 대통령이 되었다. 

 

문민정부의 기치를 들고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도 금융실명제라는 혁명적인 경제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으나 기존세력의 강한 반발에 분루를 먹음고, 끝내 IMF사태를 불러오는 불행한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어서 3김정치의 두번째 주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문민정부의 실패로 정권을 창출하였다. IMF위기관리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도 성공한 대통령은 되지 못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국민의 지탄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 이었고, 전국균형발전이라는 핵심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단임제의 한계에 부딪혀 추진만 요란하게 하고 결과는 없는 정책으로 유보된 상태이며, 경제정책으로 뚜렸한 것은 전국적으로 집 값과 땅 값을 올려놓았다는 원성을 듣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과 최규하 대통령은 단기간의 재임으로 결과물은 없다.

 

청와대하면 북악산 아래 가장 좋은 명당의 조건인 배산임수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주인공들은 불행한 대통령을 많이 배출 하였으며, 성공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글세 누굴 꼽아야 할지 한참을 생각 해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풍수지리설은 하나의 설로 존재하며 전해오는 하나의 전통사상이라는 의미로 받아드려야지 그것으로 인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욕심일 뿐인가 하노라.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뇌물혐의로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하였으니, 한국의 대통령은 모두가 한결같이 불행한 대통령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금 다른 희망과 비젼을 주는 대통령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1~3대 이승만 / 출생 : 1875년 황해도 평산,/ 재임: 1948, 7~1960, 4.

호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하고,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4대 윤보선 / 출생: 충남 아산 / 재임: 1960, 8.~1962, 3.

호 해위(海葦). 충남 아산(牙山)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8·15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韓英)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5~9대 박정희 / 출생 : 1917년, 경북 구미 / 재임 : 1963. 12 ~ 1979. 10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의 신경(新京:지금의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군사혁명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지식인·학생·종교인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농민의 생존권확보운동은 더욱 드세졌다.

 

이런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10대 최규하 /출생 : 1919년, 강원도 원주 / 재임 : 1979. 12 ~ 1980. 8

 

 호는 현석(玄石)이고,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태어났다. 1941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나와서, 1943년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을 졸업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농림행정에 종사,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해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으며, 1975년 국무총리에 발탁되었다. 국무총리 재임 중인 1979년 10.26사건을 맞아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고, 같은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이 이른바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결국 같은 해 8월 16일에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이끈 정부는 '과도정부' 또는 '위기관리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임 뒤에는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2006년 10월 2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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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대 전두환 / 출생 : 1931년, 경남 합천 / 재임 : 1980. 9 ~ 1988. 2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되었다.

 

13대 노태우 / 출생 : 1932년, 대구 / 재임 : 1988. 2 ~ 1993. 2

 

육사11기 전두환과 동기로써 12.12사태의 주역의 한사람으로 전두환 집권 후 항상2인자로 군림하며 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대통령에 당선 됐다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선언’을 발표, 정국()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 1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2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킴으로써 4당체제에서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그 해 6월과 이듬해 4월에 러시아 대통령 M.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으로 한·러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사건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었다.

 

14대 김영삼 / 출생 : 1927년, 경남 거제 / 재임 : 1993. 2 ~ 1998. 2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무총리 장택상()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9선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사이 민주당 대변인 2번, 민중당 등 야당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고 1974·1979년의 신민당과 1987년의 통일민주당 등 야당총재를 3번 지냈다.

1980년 이후 전두환()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 하였고, 1983년 5월 18일~6월 9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 5공화국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신한당을 와해시켰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년 2월 취임함으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야심적인 경제실명제를 추진하여 실시하려고 할 때 기득권자들의 강력한 제재로 실패하면서 정치생명을 잃고 끝내 정권말기에는 유일무이한 IMF사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15대 김대중 / 출생 : 1926년, 전남 신안 / 재임 : 1998. 2 ~ 2003. 2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박정희()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6대 노무현 / 출생 : 1946년, 경남 김해  /재임 : 2003. 2 ~ 2008. 2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이듬해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이후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수임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8년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통일민주당)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날카로운 질문과 정연한 논리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해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전에 들어가, 마침내 12월 19일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임기 중 대통령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에 대해 거절하자, 2004년 3월 국회는 본회의에서 193대 2로 탄핵소추를 의결하였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의결은 56년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다. 탄핵소추 의결로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되었고, 고건 국무총리권한대행 체제로 들어섰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5월에 열린 탄핵심판 선거공판에서 기각결정을 내려 탄핵사건은 종결되었다.

 

               - 출처/ 두산 백과사전 / 인터넷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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