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총설
1. 서울 산의 지세(地勢)
- 서울의 산 분포도 -
우리 국토는 7할이 산악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은 전체 약 605㎢ 가운데 임야가 약 160㎢로 약 3할을 차지한다. 우리의 삶과 문화, 역사는 자연 곧 산과 강에 관계를 갖는다. 서울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지평선은 없다. 하늘과 땅이 닿은 자리에는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반드시 산능선이 하늘과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서울의 자연풍경이다. 조선시대 서울 진경화(眞景畵)를 그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산수화는 모두 산과 더불어 이루어졌고, 그 안에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화시키고 있다. 서울 지역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의 흐름을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철령(鐵嶺)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500∼600리를 달리다가 양주(楊州)에 와서는 자잘한 산으로 되었다가,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서 도봉산(道峰山)의 만장봉(萬丈峰)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서남방을 향해 가면서 조금 끊어진 듯 하다가 다시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봉(白雲峰)이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만경봉(萬景峰)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는 서남쪽으로 뻗어갔고, 또 한 가지는 남쪽으로 뻗어서 백악산(白岳山)이 되었다. 형세(形勢)가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의 형국(形局)으로 궁성(宮城)의 주산이다’ 라고 한다.
동·남·북쪽은 모두 큰 강이 둘렀고,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潮水)와 통한다. 여러 곳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서리어 얽혀서, 온 나라 산수(山水)의 정기(精氣)가 모인 곳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백악산(白岳山/北岳山)아래 명당중에 명당인 곳에 조선의 역사를 펼치게 되어 경복궁을 이루었으며, 창덕궁과 창경궁, 덕수궁과 경희궁을 세우고, 현재 청와대도 백악산 아래 명당자리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명당이 조선의 운명을 처참하게 하였고, 현재 청와대를 지배한 대통령들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성공한 대통령은 없으며, 오늘 아침 뉴스에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산 추락사란 소식이 슬픔을 전해주고 있다.
- 서울의 산, 내사산(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과 외사산(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 - |
● 충주 서쪽이 경기도의 죽산·여주의 경계이다. 죽산 칠장산(七長山)이 경기도와 호남의 경계에 우뚝 솟았고, 그 산에서 나온 맥이 서남쪽으로 가다가 수유(水踰) 고개에서 크게 끊어져서 평지로 된 다음, 다시 솟아나서 용인(龍仁)의 부아산(負兒山)·석성산(石城山)·광교산(光敎山)이 되었다. 수원 광교산의 서북편이 관악산(冠岳山)이고, 바로 서쪽은 수리산(修理山)인데 맥이 서해(西海)에서 끝난다. 우리나라의 땅을 동서로 갈라놓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흐른다.
태백산 부근에 이르러서는 서쪽으로 뻗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까지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이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지형의 척추를 이루고 있다. 이 백두대간은 장백정간(長白正幹)과 함께 청북정맥(淸北正脈)·청남정맥(淸南正脈)·해서정맥(海西正脈)·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한북정맥(漢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호남정맥(湖南正脈)·낙동정맥(洛東正脈)·낙남정맥(洛南正脈) 등 13개 정맥을 이루고 있다.
서울의 주요 산줄기는 크게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쪽 지역은 함경도 안변의 동남쪽 105리에 있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뻗어나온 임진북예성남정맥을 따라 남서방향으로 진행하여 안협(安峽) 동북 10리에 있는 백운산(白雲山)에서 갈려 나온 한북정맥으로 이어져 있다. 남쪽 지역은 상주(尙州) 서쪽 70리에 있는 백두대간의 속리산(俗離山)에서 갈려 나온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북서방향으로 진행하여 경기도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갈려 나온 한남정맥으로 이어져 있다.(신경준의 『산경표』) 다시 서울 지역을 에워싸고 있다.
서울시의 산지면적 비율은 현재 27%이다. 수치상으로는 서울의 산지면적 비율이 그리 적지 않은 것 같지만 서울시의 자연녹지도를 살펴보면 등급 6인 조림지와 등급 7인 2차림(자연림 중 20년생 이하의 숲)의 분포는 거의 서울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청에서부터 반경 5km 내의 산지면적 비율은 5%, 10km 내는 15% 정도로 도심에는 녹지가 매우 적은 것이다. 서울 도심지역은 대기 오염과 산성비에 의해 저항성이 약한 수종들 즉 소나무·독일가문비나무·전나무 등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 창덕궁 후원의 산 속에 들어가면 대기 오염에 약한 산벚나무의 고사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내성이 강한 졸참나무의 고사목까지 볼 수가 있으며, 남산에서는 산성토양에서나 자라는 벌등골나물이 남사면에 빽빽히 자라고 있다. 이외에도 서울 도심의 땅에서는 지렁이와 땅강아지 등을 찾아볼 수가 없고, 분해자인 미생물도 그 수가 줄어들어 쌓인 낙엽이 잘 분해가 되지 않고 있다. 또한 야생조류의 종수도 매년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서울 도심지역 산의 미래 모습은 산성토양에 강한 아카시나무숲이나 키가 낮은 관목림으로 변할 것이다. 앞으로는 자연환경의 보호가 인간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점에 왔으므로, 그에 맞는 새로운 정책 수립과 그 실천이 요구되고 있다
2. 서울의 산 역사와 의미
서울의 산은 서울 지역의 공간과 시간을 함축한 역사의 현장이요, 서울 시민의 존재를 규정해 주는 테두리이기도 하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잇는 기슭의 서울의 산도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였다. 서울의 산은 북한산 비봉(碑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보여주듯이 고대에는 삼국의 쟁패지(爭覇地)였고, 고려 때에는 북한산 장군봉과 관악산이 대몽항쟁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북한산을 진산(鎭山)으로,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도읍지를 정하여, 인왕산·목멱산·낙산을 잇는 성곽이 건축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外方定禁山 禁伐木放火(외방정금산 금벌목방화)”라는 귀절이 있어 한성(漢城) 외곽의 특정지역에 분포하는 훌륭한 산림을 왕실 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일반 주민의 수목 벌채 및 개간을 위한 방화를 금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산지는 일제 강점으로 현대적 토지소유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 하여 누구나 목재 및 땔감을 벌채하고, 버섯과 약초 등의 임산물을 채취하고, 수렵을 할 수 있었다. 사찰을 축조하고 선조의 묘소를 조성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산지를 훼손하였지만 소규모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울창한 산림이 유지되어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근대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병참기지(兵站基地)가 된 이후로 서울의 산야는 황폐해졌고, 6·25전쟁으로 헐벗고 척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급속한 경제성장은 인구의 도시 집중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무계획적인 주택지가 많이 조성되었다. 그런 중에 산도 크게 환경훼손을 입었다. 특히 서울의 도시화는 농촌인구의 도시집중현상으로 나타났다. 곳곳에 토막촌이 들어서 무허가 정착지를 형성하였다. 광복 이전 홍제동·돈암동·아현동의 구릉지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광복 후 해외동포 귀환과 북에서 남하한 월남민으로 인구가 급성장하였다.
이들은 남산 산허리를 타고 중간 능선까지 올라가면서 정착하여 해방촌으로 불리워진 주거지를 이루었다. 1960년 4·19혁명을 전후한 무정부 상태 아래 무허가 건물의 증가는 녹지대를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인왕산·남산·돈암동 뒷산·서대문형무소 뒷산·홍제동 화장장 근처 등 광범위한 녹지대는 물론, 심지어 장충단·삼청동 등의 공원지대도 이들 판자촌으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한편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부터는 일부 구릉지대, 공원 및 개발제한 녹지대 등을 중심으로 고급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산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침범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산비탈을 중심으로 중산층 주택지 개발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남산의 외인주택군이나 하야트호텔, 한남동 한강변 언덕, 서빙고동,성북동,평창동에는 고급 주택들이 많이 들어선 것이 그 예이다. 반면 1960·1970년대부터 산림녹화·애림녹화의 구호 아래 서울의 산과 더불어 전국토의 산을 푸른 산으로 되살리려는 노력도 꾸준히 전개되어 왔고,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산의 녹화사업에 대한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 공기·물·토양의 오염에 따른 환경생태 보전에 정성어린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따라서 우리 민족사의 현장으로서 산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가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산이 가지는 시간적·공간적 가치를 살피고,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여 미래 보존적인 가치를 창출하여야 할 것이다. 산이 우리에게 주는 기능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는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산이라는 공간성(空間性)은 자연 그 자체로 위치와 지형, 지질, 토양을 제공하며, 산세와 기후·식생에 따라 우리 경제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역사적 시간성 속에서의 산은 우리의 삶의 터전, 생산의 터전, 죽음의 터전으로서 곧 역사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각 마을의 진산을 배경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찾아 마을이 형성됨에 따라 산은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더욱이 산은 원시공동체사회(原始共同體社會) 이래 임산자원의 생산기지로 인간의 노동 대상이 되어 식량을 제공해 주었다. 수렵(狩獵)·채집(採集) 경제와 식량생산경제의 터전이 되었고, 땔감과 목재를 제공해 주므로써 인간의 정착 문화생활을 이룩하게 하였다. 또 험준한 산세는 외세(外勢)의 침략을 막아주는 관방(關防) 기능을 함으로써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울타리 기능을 하였다.
한성의 풍수지리도 산은 이외에 수많은 공익적 기능을 갖는다. 먼저 산은 삼림을 이루어 자연재해를 방지하거나 경감하여 국토 보존기능을 갖는다. 또 산은 수자원을 함양하고 수질을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산소 공급과 대기정화의 역할, 야생 동식물의 서식 터전 마련을 통한 생태계 보전 기능을 갖는다. 또한 산림은 시민들에게 스포츠·레크리에이션, 산악활동의 등산 장소로, 산림욕과 산책의 장소로 양호한 보건·휴양공간이 되어 준다. 또한 자연학습장으로서의 기능은 물론, 많은 문화재와 역사유적, 빼어난 자연경관 등을 포함하여 교육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기능적 가치를 바탕으로, 산이 우리에게 주는 문화적 의미를 찾아보면 제일 먼저 산의 종교적 구원성(救援性)을 생각할 수 있다. 산은 자연신앙의 대상으로 인간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이다. 하늘과 인간을 잇는 매개적 기능을 제공함으로써 산악 숭배사상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 한민족의 발생과 건국이 산에서 비롯되었음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신화 이래 역대 왕조의 건국설화에서 나타난다. 천신(天神)이 산 꼭대기에 강림하여 산신이 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관념체제로서 산신관(山神觀)이 정착되었다. 고려 때는 4악신(四嶽神)으로 지리산·삼각산·송악산·비백산(鼻白山)을 삼고 제사지냈다.
이때부터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이 신산(神山)으로 주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와서 오악(五岳)을 동악에 금강산, 서악에 묘향산, 북악에 백두산, 남악에 지리산, 중악에 삼각산으로 삼았다. 또한 오진(五鎭)을 설치해서 오대산을 동진, 속리산을 남진, 백악산을 중진, 구월산을 서진, 장백산을 북진으로 삼아 산제(山祭)를 지내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또한 조선 초 태조 2년(1393)에 이조(吏曹)에서 명산에 신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기로 하여 송악의 성황(城隍)을 호국공(護國公)으로 삼고, 이령(利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 성황을 계국백(啓國伯)으로 삼았으며, 삼각산·백악·암이(暗異)·무등산·금성·계룡산·치악산 등을 호국백(護國伯) 또는 호국신(護國神)으로 삼았다.
중요 제단으로 서울 북악에 백악신사(白嶽神祠), 남산에 목멱신사(木覓神祠) 등을 설치하여 대사·중사·소사의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즉 산은 우리 민족의 고대신앙으로서 뿐만 아니고 국가의 한 행사로도 숭앙의 대상이었다. 한편 마을을 품에 안는 산을 일컬어 진산이라 하여, 산신과 동일시 하고, 동제(洞祭)의 주신(主神)으로 삼았다. 진산에 제사지내던 실례로 종로구 평창동 북한산 기슭에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이 있다. 이러한 산신각은 서울을 둘러싼 인근 산간마다 어김없이 존재하였다. 둘째, 산은 우리에게 심신 수양의 장이 되어 왔다.
신라 화랑도는 정신수양과 심신단련의 방법으로 명산대천의 승지를 찾아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유람하였다. 이렇듯 이 시대에 벌써 우리 조상은 산이 주는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을 인식하여 정신수양이나 신체단련의 터전으로 산천을 가까이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의 산은 학문의 산실이었으며, 사상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북한산 아래에서, 유희경은 도봉계곡에서, 김시습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신위는 관악산 자하골에서, 강세황은 낙산 계곡에서, 이행은 남산 청학동에서, 성혼은 북악 기슭 청송당에서, 이안눌은 남산 먹절골 계곡에서 저마다 심신을 단련하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산은 물과 균형을 이루며 존재하니, 인간은 산을 즐기는 속에서 자신의 어진 덕을 쌓아갈 수 있고, 물을 좋아하는 가운데 지혜를 확장해 갈 수 있어 말하자면 지덕(知德)을 함양하는 환경의 이상향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서울과 인근의 선비들은 자신이 학문을 강론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생활의 터를 신중하게 골라 서울 여기저기에 있는 「우이구곡(牛耳九曲)」「남산팔경(南山八景)」과 같이 팔경(八景)과 구곡(九曲)이 있는 무릉계를 찾았고, 「자하동천(紫霞洞天)」·「중흥동문(重興洞門)」·「도봉동문(道峯洞門)」·「벽운동천(碧雲洞天)」·「삼청동문(三淸洞門)」·「백석동천(白石洞天)」·「복호동천(伏虎洞天)」·「청린동천(靑麟洞天)」·「도화동천(桃花洞天)」 등의 아득한 산수간을 찾았던 것이다.
셋째, 인간의 심성(心性)을 포용하는 산의 아늑한 형상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현장이 되어 많은 창작 활동의 대상이 되었다. 산은 문학·미술·음악 등 모든 예술 분야의 가장 넓은 소재의 대상이었다. 조선조 18C에는 우리 나라의 실제로 존재하는 산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발달하여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이 그 대표를 이룬다. 또 선비들은 명산을 유람하며 다수의 시문(詩文)과 시화(詩畵)를 남기고 있다.오늘날 우리 현대인들도 산천을 예술적인 심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수많은 작가·화가·서예가들이 대자연을 예술의 이상으로 삼고 현실과 조화를 구현시키고자 하고 있음은 옛날과 다름이 없다.
또 음악인들도 산을 찾아 수련하고 은둔하기도 하였다. 조선 헌종 때 대금의 명인 정고대(鄭苦大)는 매일 같이 인왕산에 올라가서 ‘도드리’라는 악곡을 수없이 반복하는 수련을 거쳐 신기(神技)에 가까우리만큼 대금의 달인으로서 성장하였다. 또 산을 소재로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한 음악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음악 중에서 현재 널리 불려지고 있는 노래들은 주로 민속악 계통의 민요와 선소리 분야이다. 선소리 분야로는 ‘앞산타령’·’뒷산타령’·’잦은산타령’ 등 지난날 서울 지방의 소리패들이 야외에서 흥겹게 어울리며 노래하였던 것들이다.
또 놀이공간으로서의 산은 시회(詩會)나 계회(契會)의 무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흔히 기악(妓樂)과 같은 음악이 수반되었다. 일찍이 안평대군은 창의문 넘어 인왕산 기슭 무계동(武溪洞)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어놓고 여러 인재들과 함께 시와 그림·거문고를 즐겼다. 세조 때 성간(成侃)은 세검정 계곡 조지서(造紙署) 근처에서 술과 기녀들의 노래를 곁들여 시회를 벌였다. 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은 경복궁 서쪽 인왕산 기슭에 우대(友臺)라는 누대(樓臺)에서 동료 가객들과 어울려 풍류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민시인 천수경(千壽慶)은 옥인동 계곡 송석원(松石園)에서 시회를 즐겼다.
- 참고자료 / 서울의 산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간 -
'서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울의 산 [39] *- (0) | 2009.05.28 |
---|---|
-* 서울의 산 [38] *- (0) | 2009.05.27 |
* 종묘와 종묘대제 *- (0) | 2009.05.23 |
-* 서울의 산 [35] *- (0) | 2009.05.22 |
-* 서울의 산 [34] *- (0) | 2009.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