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부산 희망원정대 시샤팡마 등정기 [1] *-

paxlee 2010. 12. 30. 20:40

 

        [해외원정 | 시샤팡마]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 시샤팡마 등정기

다이내믹 부산 2010 희망 원정대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지난 봄시즌 네팔 히말라야의 캉첸중가(8,586m)를 네 번의 시도 끝에 정상 등정에 성공했고, 여름시즌 낭가파르바트(8,125m) 디아미르벽으로 3명의 대원이 등정해 도와주신 모든 분들의 염원에 보답할 수 있었다. 다음 목표는 세계 제14위봉 시샤팡마(8,027m)였다.

8,000m봉 14좌 중 마지막까지 오르지 못한 산이 시샤팡마(Shisha Pangma·Xixabangma)였다. 옛 산명은 고사인탄(Gosainthan)으로 히말라야 탐험사에서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고 하나의 미스터리 같았다. 그 이유는 산의 위치가 티베트와 네팔의 국경에서 약 16km 북측의 티베트 영내에 있어 정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티베트의 쇄국정책에 이어 1951년부터는 중국이 침공해 외부인의 입경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고사인탄이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고사인(Gosain)’은 성자(聖者), ‘탄(than)’은 장소 또는 거처(居處)의 뜻이다. 카트만두의 북방 약 40km에 고사인쿤드(Gosainkund)라는 호수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고사인탄은 인도에서 붙인 이름으로 티베트에서는 시샤팡마라고 불린다. ‘시샤’는 ‘봉우리’의 의미이고, ‘팡’은 ‘풀밭 또는 목초지’의 의미이며, ‘마’는 여성의 의미(語尾), 즉 ‘풀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티베트에서는 목축을 위해 눈의 봉우리보다 초지가 생활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산의 이름에도 초지를 중요시한 것일 게다.


▲ 정상 직전 동릉을 오르는 서성호 대원 뒤로 왼쪽 두드러진 지점이 정상이며 오른쪽 멀리 칼날 설능으로 된 시샤팡마 중앙봉(8,008m)이 보인다. 이 위치에서는 왼쪽의 설릉상의 봉우리 중에 정확히 정점을 판단 할 수 없었다.

시샤팡마 원정대는 홍보성(54·부경대산악회) 대장과 김창호(41·몽벨), 서성호(31·부경대산악회) 대원으로 단출하게 꾸려져 9월 6일 출국했다. 원정대는 카트만두에서 식량·장비 구입 및 행정처리를 마치고 중국령 티베트로 입경하려던 차에 네팔 측 코다리 부근의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되었고 그 길을 달리던 버스가 계곡으로 굴러 35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해져 왔다.

다시 도로가 개설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12일 오전 6시경(네팔 시각) 임대버스 편으로 카트만두를 출발했다. 그러나 밤새 내린 폭우로 도로 상에 또 다른 산사태가 발생, 도로가 다섯 군데나 끊겨 중국-네팔 국경마을 코다리에서 차량으로 1시간 못미친 거리의 바라비세(Bahrabise)에서 하루를 기다렸다.

90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게 거의 없는 니알람 거리

13일 오전, 밤새 복구 작업으로 소형차량 통행이 가능해지자 지프차를 임대해 코다리~장무를 거쳐 시샤팡마 등반기점인 니알람에 도착했다. 3,750m의 해발고도에 위치한 니알람(Nyalam)은 또한 냐낭(Nyanang)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 뜻은 예부터 이용되어 온 캐러밴 대상루트에서 연유되었는데 ‘수라(Sura)로 가는 길(The Road to Hell)’이다. 지금도 그 기능은 살아 있어 장무와 코다리는 진정 중국-네팔인들의 장사꾼과 무역상의 파라다이스라 할 만하다. 이곳은 옛날에도 네팔의 카트만두와 티베트의 주도 라싸의 실크로드 캐러밴을 형성했는데, 현재에도 중국과 네팔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육상로인 우정공로(Friendship Highway·友情公路)가 오픈되어 신 실크로드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고봉설산과 빙하의 장엄한 풍경은 등반가와 트레커에게 새로운 맛을 제공하고 있다.


▲ 김창호 대원 / 서성호 대원

니알람의 모습이 외부인의 기록에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 위원회가 파견한 제1차 에베레스트 정찰원정대에 의해서다. 이때의 대장은 하워드 베리(Col. Howard-Bury) 대령이었고 대원 중에는 여행가이자 자연주의자인 왈라스톤(Wollaston)이 있었다. 그가 탐험 도중 부인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오래된 중국인 막사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묵은 먼지와 일상의 오물이 가득합니다. 쿨리(coolie·하급 노무자)들은 천박한 습관을 갖고 있어요.… 이 티베트 사람들은 친절하긴 하지만 아주 돈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지저분하고 무지하며, 미신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곳의 사원과 수녀원은 기도로 시간을 보내면서 생활은 전적으로 활동 인구에게 의존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입니다. 지금 지어진 어떤 건물보다 더 크고 훨씬 튼튼한 건물의 잔해들로 보아 영화롭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1980년 시샤팡마가 외부인에게 개방되자 니알람을 찾은 첫 원정대는 1982년 영국대였다. 등반을 기록한 <Shisha Pangma> 책에서 더그 스코트(Doug Scott)의 느낌을 들춰보자.

‘왈라스톤이 니알람을 떠나며 결론내린 -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곳보다도 더욱 불결하고 악(惡)의 냄새가 풍기는 - 마을이었다. 더그가 1982년 경험한 바로는 -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다지 많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 고 적었다.’


▲ 고소포터 없이 2명의 등반대원인 원정대는 루트개척과 모든 짐 수송을 직접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더 지난 2010년 현재, 우리 원정대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과 대면했다. 새롭게 올린 콘크리트 건물은 고전적 티베트 양식의 모습을 확 바꾸어 놓았지만 길거리 구석구석에는 경제발전에 따른 쓰레기가 넘쳐났고, 여기저기에 견공들이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다. 가장 눈에 걸리는 광경은 타운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폐기물이 냐낭 푸(Nyanang Phu)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에 그대로 버려진다는 것이었다. 이 하천의 수자원은 네팔을 거쳐 인도 갠지스 강까지 흘러들면서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될 것이다.

1964년, 중국 대규모 원정대 마지막 자이언트 봉으로 초등

다음날 티베트인 누르부를 키친보이로 고용하고 부족한 식량 장비를 보충하는 등 하루 만에 등반준비를 모두 마치고 15일 한국 대원 3명, 네팔 대원 1명(체링 도르지 셰르파는 8,000m급 14좌 완등이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우리 팀의 입산허가를 공유 합류했다), 쿡 1명, 키친보이 1명, 총 6명은 약 600kg의 등반물품을 야크에 싣고 니알람을 출발했다.

풀밭의 계곡과 평탄한 초원 구릉지대를 따라 걸었다. 몬순의 구름이 몰려와 마치 안개비가 내리는 듯하고 가스가 자욱하다. 이렇게 첫날, 시샤팡마는 우리의 눈앞에 나타날 만한데도 사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 상부 쿨와르로 진입하는 암벽지대를 오르는 김창호 대원.

시샤팡마의 베일을 벗기려 집착에 가까운 탐험을 펼친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페터 아우프슈나이터(Peter Aufschnaiter). 1939년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 계곡 정찰대에 참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페터 아우프슈나이터와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두 오스트리아 등반가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갇힌다. 인도 데라둔(Dehara Dun)의 수용소를 탈출, 라싸로 가는 엄청난 여정에서 수많은 난관들에 부딪힌다. 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행군을 계속한다.


1945년 11월 하러와 아우프슈나이터는 랑탕히말의 북쪽에 위치한 행복의 마을 키롱(Kyirong)을 몰래 떠나 시샤팡마 북쪽에 다다른다. 도망자 신세였지만 두 명은 우연한 시샤팡마와의 첫 조우에서 그들이 바로 등반가라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고사인탄과 랍치 캉(Lapchi Kang) 2개 봉우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이들 봉우리는 히말라야산맥의 최정상이라고 불릴 정도였고, 아직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다. 우리들의 손가락은 추위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으나, 스케치북을 꺼내 이들 산의 윤곽을 대충 그려 넣었다. 아우프슈나이터는 낡은 나침반을 이용해 가장 중요한 정상의 모습들을 그리고, 언젠가는 이용하게 될지도 모를 숫자들을 써 넣었다.’-〈티베트에서의 7년)

아우프슈나이터는 라싸에서 하러와 헤어져 키롱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1951년 10월 그는 우리의 캐러밴 첫날 루트와 같은, 시샤팡마의 동쪽으로 6마일 이내로 들어가 콩초(Kong Tso)호수 위쪽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1954년 랑탕 지역을 방문한 그는 남쪽에서 보고 만든 것들에 북쪽에서 본 것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이 지역의 전체 지도를 완성했다.

▲ ABC(5,780m) 어프로치 구간에서 조망된 시샤팡마 남서벽의 노을. 등반루트는 벽 중앙의 상부 쿨와르와 하단의 암릉이 연결되는 선이다.

 

우리는 지금 이 지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 남자가 고산에 쏟았던 위대한 열정과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에 대해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시사팡마를 오르는 가장 유력한 길은 북서쪽으로 오르는 길이라는 것도 바로 아우프슈나이터의 생각이었다. 그 후 1964년 5월 2일 허경 대장이 이끄는 195명으로 구성된 중국 대부대의 대원 10명이 이 루트로 등정함으로써 8,000m급 자이언트 봉의 마지막 초등정 시대를 마감했다.

한국원정대의 시샤팡마 등반은 1991년 첫 진출 이래 2010년까지 총 27개 원정대가 등반하여 이 중 노멀루트인 북동릉에 13개팀이 시도해 10개팀이 시샤팡마 중앙봉 등정에 성공했으며, 남서벽으로 14개팀이 시도해 1개팀의 신 루트 초등을 포함하여 12개팀이 성공했다. 연인원 총 122명, 중앙봉 등정자 14명에 주봉 등정자 26명이 성공했다. 사망사고는 북동릉에서 1993년 거봉산악회팀의 박병태 대원 실종 사망 기록이 있다.

등반데이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가 오르려는, 1982년 더그 스코트(Douglas Keith Scott), 알렉스 맥인타이어(Alex MacIntyre), 로저 박스터존스(Roger G. Baxter-Jones) 3인조가 개척한 루트는 이미 많은 팀이 성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북동릉으로 오른 한국대들은 시샤팡마 주봉(8,021m)이 아닌 중앙봉(8,008m·중국 측 자료에는 7,998m)을 올라 등정논란으로 곤혹을 치른 선례가 있어 이 등반기에 탐험사 지면을 많이 할애하는 이유다.

 

▲ 시샤팡마 남서벽 베이스캠프는 잔잔한 호숫가 5,300m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가 휴대한 지도는 아우프슈나이터의 초기 지도를 업데이트해 오스트리아에서 1990년 발행된 랑탕히말 동부(Langthang Himal-Ost)다. 이 지도는  한국대가 시샤팡마에 도전하기 전에 이미 발행되었고 주봉과 중앙봉이 명확히 다른 위치에 표시되어 있으며, 1982년 영국대 등반기록에는 등정자들이 더 정확히 기록했다. 또 1980년 중후반 상업등반대가 시샤팡마 중앙봉에 대부분 올라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그런데도 한국원정대의 이 양봉 사이의 혼동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으며 한국의 히말라야 연구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였다.

이러한 문제는 외국등반대에도 많았던 듯하다. 1993년 폴란드인 크리스토프 비엘리키(Krzysztof Wielicki)가 더그 스코트 루트의 오른쪽 영역인 50도 경사로 이루어진 쿨와르를 단독등정으로 성공시켰다. 자신의 열 번째 8,000m급 봉우리 등정을 성공시킨 비엘리키는 이 등반 이후 중앙봉까지만 오른 등반가들과 초오유에서 정상 평지지형 등반만을 오른 등반가들에게 산을 좀 더 열렬히 열정적으로 오르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산 정상에 대한 지적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대부분의 팀들이 오른 정점이 가장 높은 지점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정상등반으로는 가치가 없다고 했다.

 

  - 글 김창호 / 사진 부산희망원정대 / 월간 산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