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체험사례 [1]] *-

paxlee 2011. 1. 24. 16:49

[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험사례 [1]]
 
          척추협착증 이겨낸 김세정씨
          척추협착증 이겨낸 김세정씨

 
“걷기와 노르딕워킹으로 제 삶이 바뀌었어요” 

“척추협착증은 허리 디스크가 빠져나가서 뼈하고 뼈가 부딪쳐서 마찰이 생기는 거예요.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만 굉장히 통증이 심해요. 신경이 눌려서 다리를 잘 쓰지 못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척추 엑스레이를 보여주며 담담히 얘기하는 김세정(42)씨는 2006년 척추협착증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집안 자체가 1자 허리라 선천적으로 척추가 약했고 무리한 야근과 잘못된 자세 탓에 병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누워서 일어나질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30분을 끙끙대다 겨우 벽을 짚고 일어났다. 김씨는 한의원에 가서 침 맞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아 병원을 가니 디스크 하나가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우연히 본 TV에서 정형외과 의사가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면 수술보다 운동을 권한다는 얘길 듣고 산에 가기 시작했다.

“직장이고 뭐고 다 그만둬야 했어요. 집이 인왕산 근처에 있어서 길가에 뒹구는 작대기 짚고 척추가 휜 채로 낑낑대며 올라갔어요. 매일 산에 올라갔는데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산행거리가 늘어났어요. 목숨을 걸고 걷는다는 마음으로 아침저녁으로 걸었어요.”

걸어 다닐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김씨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다리 힘으로 걷긴 하지만 자세를 조금만 옆으로 틀거나 하면 통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몸의 유연성을 잡으려면 다른 걷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마침 노르딕워킹 강사를 만났다.

“호기심에 시작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다른 운동은 2~3개월 지나면 지루해서 혼자 못 하는데, 중독증세가 생길 정도로 노르딕워킹에 빠졌어요.”

노르딕워킹은 핀란드 크로스컨트리스키 선수들이 눈이 없는 여름에 롤러를 타고 아스팔트에서 훈련하던 방법에서 고안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노르딕워킹은 등산처럼 스틱을 양손에 들고 걷는 것이지만 주로 평지에서 스틱을 비스듬히 눕혀 걸음에 맞춰 지면을 밀면서 워킹하는 것이다. 김씨는 이것이 “관절과 척추에 가해지는 체중의 부담을 줄여주고 상하체에 전신운동을 시켜줘서 허리근육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6개월을 걷자 어떤 자세를 취해도 통증이 사라질 정도가 되었고 8개월 정도 후에는 아예 독일에 노르딕워킹 국제코치 시험을 치러 가서, 결국 자격증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국노르딕워킹협회 코치인 김세정씨는 잘못 걷는 사람들이 산에 많다고 한다. 무겁게 지고 잘못 걸으면 아무리 등산을 열심히 해도 나이 들어 관절염이 생긴다고 얘기한다.

“그냥 워킹은 팔은 흔들지만 어깨를 흔들진 않아요. 노르딕워킹은 어깨 자체를 움직이고 어깨뼈와 골반이 걸을 때 교차가 되요. 그런 전신운동 동작을 하게끔 자연스레 만들어 주는 게 노르딕스틱이에요.” 걷기와 노르딕워킹으로 삶이 바뀌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녀는 아예 노르딕워킹 제품 판매점을 하고 있다. 척추협착증 환자가 아닌 코치로 말이다.

기록적인 산행을 하며 간암과 직장암 치료한 문정남씨 

             “산은 암을 고친 명의”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암이라니…. 산행도 잘 하고 누가 봐도 이렇게 강건한 체질인데, 참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문정남(71)씨는 2000년 30년 가까이 했던 교직에서 물러나며 여가 시간을 등산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500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산행에 몰두하다 300산쯤 올랐을 때 직장암 진단을 받는다. 치료를 해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그는 숙고 끝에 수술을 받는다. 수술 전 25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시며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어야 했고 산에 다니던 사람이 병실에 갇혀 있으려니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나 수술 결과는 실패였다.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던 문정남씨는 재수술을 거부했으나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재수술을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치료방법은 항암주사를 맞는 것이었다. 1주일에 5일 동안 항암주사를 맞고 3주를 쉬는 방법으로 6개월을 치료받았다. 그는 이 기간에도 산행을 계속했다. 아무리 수술을 마쳤다 해도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산행을 하는 이는 흔치 않다.

“의사 말이 암에 걸리는 제일 큰 이유가 스트레스고, 둘째가 음주와 흡연, 셋째가 과도한 육류 섭취, 넷째가 성격이라고 합디다. 근데 암세포는 산소함량이 높은 곳에서 활동이 지연되거나 없어진다고 해서 산행이 제일 좋은 치료법이라 생각한 거죠.”

다른 항암치료 환자들과 달리 산에 갈 체력이 있었던 그는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그러나 항암치료 6개월 후 종합검진을 받아보니 결과는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제는 진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산을 열심히 다녔는데 그럴리 없다며 병원을 옮겨 검사 받아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산행이 최고의 암 치료제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결연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는 순간까지 암세포와 싸워보기로 했지요. 죽기를 각오하고 한 달 동안 산행을 했습니다. 한 달 후 간암 수술을 받으려 입원했는데 마지막 CT촬영을 한 결과,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의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너무 놀랐습니다.”

암이 사라진 것에 대해 그는 간절함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산에 가면 큰 소나무를 끌어안고 심호흡을 하며 기원했다. 기원한 내용은 암을 낫게 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단지 500산을 다 오를 수 있도록 그때까지만이라도 삶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무슨 소나무한테 비느냐고 했지만, 그게 그만의 기도 방법이었다. 또 산행하노라면 암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자연스럽게 산에 몰입해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려 암에 가장 좋은 치료약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일주일에 산을 4~5일을 오를 정도로 미쳐서 산만 다녔다.

“2004년에 1,000개 산을 탔고 2006년에 2,000산, 2008년에는 3,000산을 넘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암이 나은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첫째는 간절히 기원한 것이고, 둘째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운 것입니다. 산행을 하면 마음을 비울 수 있어 좋습니다. 셋째는 산행을 하니 자동으로 음식 조절이 되서 그렇습니다.”

그는 암을 극복하며 산행을 하는 동안 마음이 훨씬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산행을 하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욕심을 버리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문정남씨는 “남을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산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등산 이외에 다른 일은 안 해요. 내 생명을 연장시켜준 게 산이고, 산이 내 모든 희망입니다. 딴 데 신경 안 쓰고 다른 욕심도 없으니까요. 어쩌다 이틀 연속 쉬면 산에 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요. 그러다 산에 들어서면 어머니 품에 왔구나 하며 마음이 편해져요.”

그는 암을 치료하는 10여 년 동안 산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다. 수술이 성공적이었기에 암을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는 등산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산은 암을 고친 만병통치의 명의”라고 그는 말한다.

등산 통해 고혈압 치유하고 뚱보에서 날씨한 몸매로 변신한 박병욱씨

“좀더 일찍 산을 알았다면 더 멋진 인생 살았을 것”
                     
박병욱(朴炳旭·45·가든플라워 대표)씨는 산을 통해 건강뿐 아니라 세상을 되찾았다. 젊은 날 그는 먹고사는 일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대학 졸업 후 남들처럼 직장에 몸을 담은 그는 곧 ‘이게 아니다’ 싶었다. 1년쯤 다니다 새로운 직장을 찾던 중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인천시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외국 잡지에 실린 꽃시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무엇보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꽃을 필요로 하는 인구가 는다는 대목이었다.

6개월에 걸쳐 전문서적도 보고 시장조사를 하는 등 연구를 했다. 그리곤 20개월간의 수업을 시작했다. 꽃집 직원 생활이었다. 계획한 대로 20개월이 되던 날 남의 집 살이를 그만두고 결혼한 그는 이듬해인 1995년 1월 ‘목림화원’이란 이름의 꽃집을 차렸다. 꿈에 부푼 그는 밤 10시까지 꽃가게를 지키며 꽃도 만지고 배달도 직접 다녔다가, 가게문을 닫기 무섭게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꽃시장으로 달려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새벽 4시. 침대에 드러누울 때마다 온몸이 푹 꺼져드는 기분이 들곤 했다.

사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도 찾아왔다. 2001년, 이미 4년 전 인터넷 상에 문을 연 온라인 꽃가게 가든플라워와 그가 7년 가까이 해온 오프라인 목림화원의 만남이었다.

가든플라워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온라인 꽃가게가 막 태동하던 시절인지라 경쟁상대가 별로 없어 고객이 빠른 속도로 확보되는 등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이었다. 그런데 몸이 뭔가 불편해졌다.

“먹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꽃가게 하는 동안 가게문을 닫고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꽃시장에 가면 출출하니까 꼭 뭔가를 먹었어요.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술은 나한테 맞지 않는다 싶어 진작 끊었지만 담배는 엄청 피워댔어요. 하루에 세 갑씩 폈으니까요.”

“산에 다니며 건강해지니까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어요”

가끔 어지럽거나 머리가 무거웠다. 숨도 찼다. 가슴까지 아파 왔다. 건강의 적신호였다. 병원을 찾았다. 110~160의 고혈압이었다. 아차 싶었다. 모친께서 뇌경색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오는 등 가족병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혈압도 나쁘고 혈관계통이 전반적으로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의사가 고혈압 약을 처방해 주면서 가벼운 운동으로 몸무게를 줄이라고 했어요.”

처음 한 운동은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을 하루에 10바퀴씩 도는 것이었다. 욕심을 냈다. 인천에서 강남구 역삼동 뱅뱅사거리 부근의 회사로 출근하기 전 청계산을 찾았다. 처음엔 숨이 차고 머리가 아파 20분 걷고 돌아서야 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3일쯤 지나 또 청계산을 올랐다. 이번엔 25분 올랐다 내려오고, 그 다음엔 30분 이렇게 차츰차츰 거리와 고도를 높였다. 이렇게 1주일에 두세 번씩 청계산을 찾은 박병욱씨는 3개월쯤 지나 매봉에 처음 올라섰다. 청계산을 찾기 전까지 산이라면 바라보는 것으로만 생각해 왔던 그가 처음 올라본 정상이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 석 달 동안 체중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혈압도 잘 조절되어 가고 있었다. 의사도 처방대로 잘 하고 있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체력이 점점 나아지자 욕심을 냈다. 제물포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고교 동창회원들끼리 나서는 산행에도 참가하고, 모집산행을 통해 원거리 산행에도 나섰다. 지난해 7월부터는 당일에 10시간 이상씩 걷는 산행을 기본으로 삼는 제인악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산행에 참가하고 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산에 다닌 지 1년쯤 지나 혈압약을 반으로 줄이게 되었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4분의 1로 줄이게 되었어요. 체중도 80kg대로 내려가더니 점점 줄어들었고요. 물론 엄청나게 좋아하던 야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생활을 엄격하게 했으니까요. 3년쯤 지나니까 의사 선생님이 이젠 혈압약을 안 먹어도 된다고 하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물론 몸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어요. 체중이 68kg으로 떨어졌고 허리는 30인치로 줄어들었어요. 그 전에 입던 옷을 싹 바꿨으니까요. 아깝다니요. 몸이 무겁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모를 거예요. 지금은 날아다닐 것 같아요.”

박병욱씨는 9년 동안 산에 다니는 사이 300개 산 이상 오른 것 같다고 한다. 그는 그간 지리산 무박종주와 화대종주는 물론 지리산 천왕봉만 해도 14번이나 올랐다. 이렇게 등산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니까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고, 업무 효율도 상당히 좋아졌다고 말한다.

“허리 둘레가 조금 굵기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만들어진 근육일 테니까요. 요즘도 한 달에 두 번은 꼭 장거리 산행을 해요. 자영업을 하는 관계로 시간이 있어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전국의 산을 찾고 있어요. 주말이나 일요일에 산에 못 가면 주중에 꼭 가니까요. 산이 저를 도와준 걸 생각하면 너무 고마워요. 그래서 산에 가면 늘 겸손해져요. 그런 산을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백운대 100회 등정으로 좌반신장애 극복해낸 박철규씨

“청소년기에도 없던 삶의 뜨거운 열정을 북한산에서 찾았습니다”

                                   
“백운대를 백 번 오르는 사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박철규씨(朴喆圭·49·재현고 교직원)는 좌반신장애인이다. 그는 젊은 날 우울한 삶을 살아왔다. 머릿속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런 그의 삶을 바꿔준 게 바로 산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박씨는 고교 입시를 남겨놓은 시점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수업을 마치고 열차를 타려고 구포역으로 달려가다 넘어졌어요. 겉으로 아무 이상이 없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그런데 3일 뒤 갑자기 쓰러졌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20일이 지난 뒤였어요. 몸 한쪽이 움직여지지 않는 거예요. 머리를 레일에 부딪히는 순간 뇌진탕이 일어났던 거예요.”

이후 좌반신장애가 온 그는 2급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모든 게 힘들었다. 17세 되던 해에는 영도다리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터보트가 순식간에 달려와 그를 낚아채 다시 땅으로 올려다놓았다. 이렇게 절망과 비관이 반복되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갔다. 그가 새 삶을 시작한 것은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1977년 이영득씨와 결혼한 뒤였다.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박철규씨는 아내가 많이 이해해주었으나 가장노릇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게 늘 가슴 아팠다. 첫 아이 종국이가 태어나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 무렵 독지가가 나타났다. 불암산자락에 위치한 재현학원 이사장이었던 고(故)이익엽씨는 사정이 딱한 그를 교직원으로 채용해 주었다.

1981년 재현중고교에서 교직원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게 안정돼 갔으나 67kg에 불과하던 날렵한 몸이 84kg으로 불어나는 등 건강이 나빠졌다. 1989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약수터를 찾아 다녔다. 같은 동네 사는 동료 교사들의 도움으로 시작해 8년 가까이 거의 매일 약수터를 찾던 그는 1997년 4월 1일 큰 목표를 세웠다. ‘대동문 등정’이었다.

우선 4·19묘지에서 대동문까지를 목표로 삼았다. 정상인에게는 1시간 거리지만 그에게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험로였다. 새벽녘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온 그의 몸은 나무에 긁히고 바위에 부딪쳐 온몸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 맛본 성취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 뒤 목표를 높였다. 대동문에서 용암문까지 능선을 탄 다음 도선사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자 목표를 또 높였다. ‘백운대 등정’이었다.

오른손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그에게 백운대 바윗길이 문제였다. 젊은이들이 해결해 주었다. 배낭을 대신 메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었다. 백운대 밑에서 나이 먹은 이들이 말릴 때는 그 역시 머뭇거렸지만,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니 점점 힘이 솟았다. 결국 그는 한 손과 한 발로 백운대 정상에 올라섰다. 너무나 기뻤다. 그 모습을 본 정상기념메달 장사가 “백 번만 올라오면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격려했다. 그 2년 3개월 뒤인 1999년 7월 4일 그는 메달 장사에게 보란듯이 백운대 100회 등정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그 사이 84kg 나가던 몸무게는 71kg으로 줄어들고 오른쪽 장딴지는 두 배 이상 굵어졌다.

박철규씨는 도보산행에 만족하지 않았다. 백운대 100회 산행을 한 달쯤 앞두고 설악산 단독산행에 나섰던그는 이후 판에 박인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지리산도 오르고 눈 쌓인 한라산도 올랐다. 백운대 등정 목표를 달성한 이듬해 봄에는 일반 등산뿐 아니라 캠핑에 이어 암벽등반에 이르기까지 6주간의 등산학교 교육을 무사히 마쳤다. 북한산 백운대와 노적봉을 비롯해 만장봉으로 이어지는 암벽등반이 그에게 쉬울 리 없었다. 힘없는 왼쪽 발이나 손이 크랙이 끼어 빠지지 않으면 당황하고, 하강 중 로프가 빠지지 않아 가슴 철렁했던 적도 있으나 인수봉 야간 등반까지 이어지는 암벽등반 교육도 무사히 해낸 것이다.

“대슬랩을 올라설 때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어요. 묘하더군요. 조금씩 올라가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다리에 힘도 더 들어가는 거예요.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순간이 선해요. 어찌나 기뻤던지 인수봉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바위에 엎드려 입을 맞췄으니까요. 그 후 한 번 오를 때마다 헬멧에 붙인 별딱지가 26개나 되요.”

박철규씨는 암벽등반에 재미를 붙였으나 인수봉 B코스 등반 중 15m나 추락하고, 또 동료 산악인들이 한 손을 쓰지 못하는 그를 끌어올리느라 애를 쓸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들어 몇 해 전부터 바위는 거의 찾지 않고 있다. 대신 도보 산행으로 즐거움을 찾는다.

“3, 4년 전에도 10여m를 떨어진 적이있어요. 확보자 실수였지만 끌어올리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어쩌다 한 번 가요. 대신 비박이나 도보산행을 즐겨요. 언젠가 설악산 둔전골을 거슬러 올랐다가 화채릉을 거쳐 염주골로 내려선 적이 있어요. 그때 왜 염주폭인지 깨달았어요. 빗방울이 염주처럼 떨어져 얼굴을 때리고 입으로 들어가지 뭐예요. 한여름에 그런 추위는 처음이었어요. 좁은 공간에 17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능선을 세 개 넘어 탈출했어요. 이튿날 대포 횟집에 가서 보니까 발톱이 새카맣게 죽어 있더군요.”

박철규씨는 “그 산행에서 젊은 시절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뜨거운 감동을 맛보았다”며 “이후 6번이나 같은 코스를 찾았다”고 한다. 퇴직 직후인 재작년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다녀온 그는 요즘도 산 다니는 재미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고소증 때문에 도중에 포기했어요. 요즘은 비박 산행을 즐겨요. 안 다녀본 산 위주로 다니고요. 사진 찍는 재미에 카메라도 새로 장만했어요. 아무도 없는 산마루나 바위 조망대에 앉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아는 사람들에 보내며 자랑해요. ‘밤하늘에 별이 가득 찬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줄 아냐’면서요. 남들이 장애인이라 말하지만 저는 제가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도 마음 내키면 조선팔도 어디든지 가요. 이 모든 게 산에 다녔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과 즐거움이에요. 북한산은 은인이에요.”

박철규씨는 “산을 통해 건강과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깨달은 게 더욱 큰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등산인은 산을 다니면서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저는 매사에 짜증스럽고 회의적이었어요. 지금은 달라요. 모든 게 환하고, 모든 게 소중해요.”
 
            - 월간 산 2011, 01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