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8경 [2] 안동하회마을 (2)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이조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이조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屛山書院)]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서원으로서, 1614년 선생을 흠모한 사림(士林)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配享)하였으며, 그 후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공을 배향하였다. 1863년「병산(屛山)」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병산서원의 전신(前身)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풍악서당」을 선조5년(1572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선생이 31세 때에 후학의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로 옮겼다.광해군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서애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배향(配享)하면서 서원으로 위상이 바뀌게 되었으며, 1629년에 서애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 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만대루(晩對樓)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건물로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입교당의 석축과 아궁이]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높은 쪽은 건물의 기단으로, 낮은 쪽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궁이는 1.8m의 기단 양끝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데, 건물의 전면에 있는 것이 다른 건물에서는 찾기 힘들다.
[장판각(藏板閣)]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습기를 줄이기 위해 정면 3칸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사진에서와 같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신문(神門)]
서원에 내3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존덕사(尊德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수암(修巖) 류진(柳袗)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이다. 가공(加工)된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翼工形(익공형)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정료대(庭燎臺)]
야간조명을 위한 석조물로서, 마당 좌우에 1쌍이 있는데, 사발 형태의 돌 위에 관솔(-소나무의 송진이 많이 엉긴 부분) 가지나 기름 등을 태워 불을 밝혔다. 팔각형의 기둥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팔괘(八卦)를 의미하고 있다.
[관세대(관洗臺)]
향(祭享)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놓는 석조물로서 네모난 형태의 역사다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위가 넓은 것은 대야를 올려놓기 안정되게 하고. 아래가 위 보다 조금 비스듬히 들어간 것은 가까이 가서 씻기 수월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생각된다.
[병풍을 펼친듯한 병산]
서원 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 한 병산(屛山)이 있다.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의 학덕을 흠모한 유림(儒林)이 정조10년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配享)하였고, 그 후에 2위를 추가 배향하였다.
고종 5년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가 1996년에 복설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경덕사]
당인 경덕사에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을 배향하였으며, 그 후 제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공과 종손자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공을 배향하였다.
[숭교당]
강당인 숭교당 정면에는 화천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고종 5년 화천서원의 훼철시에 주소와 함께 남은 건물이다. 좌우로 방이 있는데 좌측은 입교재(立敎齋)라 하고, 우측은 사성재(思誠齋)라 한다.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의 전체 모습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화경당(和敬堂) 중요민속자료 제84호
화경당(和敬堂) 중요민속자료 제84호 위에서 본 화경당 전체 모습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화경당은 마을북쪽 99칸 집으로 불려졌으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사대부 집이다.
작천고택(鵲泉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87호

류시주가옥은 현재 집주인 이름을 딴 것이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공의 호를 따「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려왔다. 건축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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