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8경 [8] 인사동의 역사와 전통문화 (2)
인사동 야화(仁寺洞 夜話)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희랍이 그렇고, 애급(埃及)이 그렇고, 또한 인도가 그렇고, 중국이 그렇다. 그와 같이 나라 안의 동네도 오래된 동네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기 마련이다. 서울서도 동네 중에 이야기가 많기로는 인사동이 으뜸일 것이다. 인사동은 한 집 건너 골동가게, 두 집 건너 화랑이다. 이 인사동에서 골동을 거간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나는 이 노인의 이름도 성도 모른다.
그러나 이 노인의 별명(別名)을 일목국 황제(一目國 皇帝)라 불렀다. 왜냐 하면 한쪽 눈을 새가 파먹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애꾸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 쪽 눈으로만, 더듬어 보고도 눈알 둘 가진 사람보다 물건의 진가(眞假)며, 연대(年代)를 정확히 알아내는 노인이었다. 그래서 이 노인이 인사동에만 나타났다 하면 눈 둘 가진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물건의 감정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노인이 황제로 군림하는 가상(假想)의 나라에서는 눈 둘 가진 사람들이 되레 불구(不具)가 되는 것이었다. 흔히 세상에서 지나친 주관(主觀)에 사로잡힌 사람에겐 건전한 객관(客觀)도 수용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지금도 나는 홀연히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일목국 황제를 생각한다. 황제를 배알(拜謁)한 지 꽤나 아득하다. 이미 그는 귀적(鬼籍)에 올라, 저승에서 눈알 둘 가진 사람들의 처지를 연민(憐憫)하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인사동에는 몇몇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매고물(買古物)·매보물(賣寶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즉 “못쓸 고물(古物)을 헐값에 사서, 값진 보물(寶物)로 비싸게 판다”는 것이다. 이 희한한 말이 인사동에서는 다반사(茶飯事)의 현실로 일어난다. 이런 일이 곧 인사동의 질서요, 풍속이요, 화제(話題)인 것이다. 일인(日人)들이 골동을 사고 파는 데는 세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산따마(三玉), 즉 메따마(안목/眼目), 겐따미(현금/現金), 키모따마(담력/膽力)가 그것이다. 아무리 돈이 있다해도 보는 눈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또 설사 돈과 눈이 있다 해도 이것이다! 과연 이것이다! 판단하여 대금(大金)을 치르고 살 수 있는 담력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인들이 지어낸 말이기 보다 오래 전에 골동가(骨董街)의 수장가(收藏家)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의 규범으로 전해오는 것이다.
연전(年前)에 작고한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형의 일화(逸話) 한 토막이 기억난다. 하루는 한형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수장하고 있는 <감항아리>를 팔라고 떼를 썼다. 이 항아리는 유백색(乳白色)으로 연대도 높고 그 생김새도 특이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돈으로 팔 수는 없고, 당신이 노총각(老總角)의 신세(?)를 면한다면 나는 당신의 결혼 선물로, 오늘 당장이라도 이 항아리를 주겠다 하였다.
그러고 며칠 뒤, 참한 규수(閨秀) 하나를 데리고 왔었다. 아하! 이 항아리는 영락없이 한 사장에게 빼앗기는구나! 했다. 그러나 어쩐 영문인지 결혼은 결국 성사되지 않고 한 사장은 홀연히 이승을 뜨고 말았다. 봄이 호남(湖南)쪽으로 매화꽃 피는 농원에 함께 꽃구경 가자 약속만 해 놓고, 그는 끝내 그 참한 규수와의 결혼도 이루지 못하고 <감항아리>의 주인도 못 이룬체 떠났다.
끝으로 통문관(通文館) 주인 산기(山氣-李謙魯/이겸노 옹의 아호)선생은 비록 장사꾼의 행세를 했지만, 상인(商人)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문화를 교류시키는데 힘써오신 분이다. 가령, 미학자(美學者) 우현(又玄-高裕燮/고유섭씨의 아호)선생의 수필을 모아, 그 유고집을 낼만큼, 돈보다 먼저 문화를 생각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 인사동 통문관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고서점(古書店)이다. 한때 도심(都心)에서는 연탄(煉炭) 가스로 공기가 오염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무렵, 나는 매양 선생의 아호를 생각했었다. 산기(山氣-李謙魯)! 하면 푸른 이내(嵐)가 자욱한 산의 청정한 기운이 연상케 되기 때문이다. 선생을 뵈온지가 어느새 까마득하다. 아직 건재하시다니 백수(白壽)를 넘기시기를 빌어드리고 싶다.
- 글 / 金相沃(시인) -
인사동의 변화
인사동에도 개발이냐 보존이냐’ 외줄타기의 아슬아슬함이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거리 인사동. 상업화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닥쳤다. 하루가 다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인터넷 카페, 게임방, 편의점을 지나면서 안타까웠던 경험들로 씁쓸했던 기억들. 고향과 같은 포근함이 인사동의 전부가 아니더라도, 정적을 깨고 들어서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물들인 인사동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는가.
대처 영국여왕이 거쳐갈 정도로 문화관광 지구마냥 떠들어 대지만, 정작 인사동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사동을 지나면 눈에 띄는 흉물을 여러 곳 뽑을 수 있겠지만 게임방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게임방 허가과정 자체가 바로 인사동의 현재 위기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게임방 주인은 애초 종로구청 측이 영업허가를 내주었다가 이를 취소하자 허가여부를 둘러싸고 행정소송까지 들어갔다.
결과는 게임방 주인의 승리. 정부 차원에서 아무런 법적인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거대 자본의 논리는 인사동을 발빠르게 잠식해갔던 것이다. 이렇듯 인사동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여기에 또 하나의 사건이 인사동 보전에 불을 붙였다. 12가게 살리기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천리안 열띤 토론방에도 인사동 12가게 살리기가 뜨거운 쟁점으로 올라왔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사동에 대한 위기감은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직면해왔다.
현재 12가게 살리기 운동은 인사동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12가게(동서표구사∼인예랑∼경남화랑∼도한사∼영빈가든∼예성서각사∼아원공방∼청도화랑∼사보당∼보원요∼세로방∼찻집)가 있는 4백50여 평의 가게자리가 모건설회사에 매입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 12가게 대부분은 인사동을 10∼20년 지켜온 토박이들이다. 걷고싶은 도시만들기시민연대를 주축으로 지난 11월부터 들어간 서명운동은 현재까지 1만5천 명 이상되는 시민들의 공감을 불러냈다.
지난 8일에는 인사동 12가게 살리기 후원의 밤을 통해 인사동 전 상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인사동 살리기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12가게 살리기 운동에 대한 지적도 있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한 거 아니냐”라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전통가게가 하나씩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낯선 이방인들이 죽치고 앉아있을 때까지 뭐했냐”라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인사동이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인사동 상인들을 질책하는 것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이제와서 전통보전을 들먹이며 12가게를 살려야 한다는 논리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걷고싶은 도시만들기시민연대 최정한 사무총장은 “12가게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고 반박한다. 어떤 문제든지 개인이익과 이해문제는 얽혀있기 마련이라는 것. 우리가 특히 인사동을 주목하는 이유는 다른 곳과는 다른 지역의 특수성 때문이며, 12가게 자체가 인사동의 일부가 된 이상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개발논리로 인사동의 12가게마저 허물어지면 인사동 본래의 의미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사동도 엄격히 말하면 인사동이 아니다. 7∼8년 전 대일빌딩이 종로로 통하는 인사동 길목을 막은 뒤 인사동은 변하기 시작했다. 대형건물이 들어서자 그 쓰임새에 맞게 카페와 편의점, 중국집이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맥없이 허물어져 갔다. 샐러리맨들의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해 탈바꿈을 시도한 셈이다. 이처럼 전통가게들이 사라지고 본래의 인사동 거리가 상업화에 밀리면서 급기야 진짜 인사동은 관훈동에 그 이름을 넘겨주게 됐다.
인사동에서 쓸쓸히 전통공예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은 “7∼8년 전만 해도 도자기, 화랑, 나전칠기 등 인사동의 분위기를 살린 가게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다. 아직도 인사동을 꿋꿋하게 지키는 도자기 가게, 전통공예품 가게 등이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이들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의식 속에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차없는 거리’ 역시 인사동을 허문 요인으로 손꼽힌다. 97년 4월 전통문화보전 차원에서 시행한 ‘차없는 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개발바람을 부추겼다. 수만 명의 사람들 물결에 따라 돈벌기 위한 현대화가 시작됐고, 여기에 IMF 여파도 한몫했다. 차대신 노점상들이 거리를 메워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이를 두고 “시민단체가 병주고 약준다”고 따끔하게 꼬집었다.
차없는 거리 시행을 인사동전통문화보전회(이하 보전회)가 주축으로 앞장서긴 했지만, 여기에 대책없이 동조한 시민단체 역시 잘못했다는 지적이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하더라도 충분한 사전 논의가 없으면 되레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다. 차없는 거리 이후 재개발 바람으로 인사동 땅값은 재건축 분양가와 임대료 상승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전통공예품으로 생활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인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인사동 800여 개 가게중 90% 정도가 임대가게인 상태. 10평 남짓한 땅에서 월세 100만원 이상을 납부하려면 거기에 걸맞는 유흥업소를 운영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듯 재개발은 기존 가게들의 퇴출을 낳았고, 피자집과 인터넷 카페 등 새로운 유흥소비업종의 증가로 이어졌다. 인사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옛 골목 역시 부동산과 개발이익에 따라 언제 휘둘릴지 모르는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셈이다.
이렇듯 개발과 보전의 사이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인사동을 두고 총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그나마 이번 12가게 살리기 운동을 계기로 인사동 일대 31개 업소 상인들이 지난 11월에 인사동제모습찾기 모임을 결성하여 인사동을 살리기 위한 대안 모색에 나섰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다. 무너진 윗동네(인사동)와 허물어져가는 아랫동네(관훈동)가 의기투합하여 만든 게 이 모임의 특징이다.
12가게 중 한 관계자는 “인사동 문제는 진작 터졌어야 한다”며 “이번 일이 인사동이 거듭나기 위한 계기로 작용했으면 한다”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인사동이 무너질 때의 섭섭함을 누르고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동 살리기에 동참한 윗동네 김기대씨는 인사동 발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빌딩이 들어서면 전통가게들은 맥없이 주저앉게 됩니다.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그 여파가 서서히 다른 가게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발전이란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그냥 그대로 잘 보존하는 것도 발전의 다른 모습이라는 걸 알아야 할 때이다.” 서울시가 지난 20일 시장직권으로 인사동을 중심으로 신규 건축을 제한했다는 발표는 인사동에 대한 한가닥 희망을 주지만, 뒷북조치라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옛 향수를 느끼며 인사동을 찾아온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이곳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인사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인사동을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건물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같이 있었던 사람과 물건들이 사라진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죠. 남대문과 이태원과 다를 바 없는 인사동이 그저 무색할 따름입니다.” 인사동을 20년 동안 지켜온 한 관계자의 말은 인사동의 현주소를 반영한 씁쓸한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다. 세상이 변하고, 서울이 변하고 있으니, 인사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으나, 인사동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숨쉬는 곳이므로 그대로 전통을 보존할 때 인사동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 글 / 김혜균(전『시민의신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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