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8경 [8] 인사동의 역사와 전통문화 (4)
인사동에 없어진 옛 건물
우선 안국동 네거리에 있던 안동별궁(安同別宮)이 화동으로 올라가는 입구 오른편에 일부분 옛 담장만 남기고 싹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솟아있다. 안국동 별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령으로 지은 궁(宮)이며, 이곳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星皇后)의 혼례, 가례(嘉禮)를 지냈으며 순종(純宗)과 순명황후(純明皇后)의 가례도 이 궁에서 올린 후에는 해직된 상궁(尙宮) 궁녀(宮女)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다음으로 지금 통문관(通文館) 건너편 뒷편에 충훈부(忠勳府)가 있었는데 일제침략(日帝侵略) 후에는 얼마 동안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라는 유교기관이 있다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民家)가 들어섰다. 지금 경인미술관(耕仁美術館)은 한말에 친일 정치가 박영효(朴泳孝)가 살던 고가(古家)인데, 수년전에 일부분은 헐어 남산밑 필동에 새로 건설한 민가촌으로 옮겨가고 고색이 창연(蒼然)하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음 지금의 수도약국 건너편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이 살던 큰 저택(邸宅)이 있었는데, 정원이 넓고 들어가는 대문은 없었으나 입구 양편에는 네모진 큰 돌기둥이 서 있었다. 이 유서깊은 고가도 6·25 전란후에 모두 민가로 바뀌었다.
동문관 주인 이겸로(통문관 주인·서지학자)
필자의 고향은 평남 용강군 삼화면 주림리 경방(京坊)이라는 삿갓봉 밑에 옹기종기 40여 가구가 모인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집성촌(集姓村)이다. 필자는 아버지 斗(두)字璜(황)字이고, 어머니 청주 김씨 李(이)字元(원)字의 막내 아들로 1909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불행하게 필자가 태어난 다음해에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나는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자랐다.
여섯 살에 천자문(千字文)을 배웠고 열살되는 봄에 4년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졸업 후 집살림이 가난하여 16살되는 봄에 일본으로 간다고 집을 나와 기차로 부산까지 왔으나 일경(日警)의 저지(沮止)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지못하고 서울로 왔는데, 여비는 떨어지고 혹 취직자리라도 얻을까? 걸식을 하면서 거리를 방황했으나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의지할 친척도 없고 일자리도 얻지못해 하는 수 없이 환고향할 생각으로 도보로 평양을 향해 떠났다.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여 생각하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평양거리를 방황하다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장국밥 음식점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이 음식점에서 한해 동안에 약간의 돈을 벌어 그 돈을 가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가 뜻밖에 서점에서 점원을 하는 보통학교 동창생 이태식을 만났는데, 이 친구의 소개로 나도 정동에 있던 선문옥(選文屋)에 점원으로 채용되었다.
이 서점 주인은 영어에 능통하고 영문 속기술(速記述)과 타이프 기술이 있어 그당시 정동에 있던 미국인이 경영하는 씽거미싱(재봉틀회사)에 많은 월급을 받는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서점은 부업으로 했기 때문에 서점일은 거의 필자가 맡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거이 10년간 근무하다가 1934년 3월 내 나이 26살 때 지금 수도약국 자리에서 구멍가게 책방(금항당)을 개점 거이 반세기 동안 운영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특히 잊지 못할 일은 1967년에 지금의 5층 사옥을 신축하였으며, 1961년 12월에 세종어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上을 200부 한정판으로 복원본(復原本)을 발행하여 중요기관에 기증도 하고 다 팔고 2책을 보관해 두었다가 청주고인쇄박물관에 한 권을 보내고 단 한권을 보관하고 있던 중 91년 9월 우리나라가 UN에 가입하고 『월인천강지곡』을 가입기념으로 보내기로 결정되었으니 기증하라는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의뢰에 의하여 UN본부로 보내고, 나에게는 보관본마저 없게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로 나의 장서인까지 찍힌 책이 UN본부에 영원히 보관되게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관훈·인사동 전통문화거리
지금 관훈동, 인사동 거리에 고층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선 것은 5.16군사혁명 후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개혁과 경제정책과 발전에 힘 입은 바 크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그 전에는 관훈동 입구에서부터 인사동 끝까지 옛 단층 기와집이 양편에 줄지어 있었는데, 6.25전란중에 상당부분 전화(戰禍)로 타버리고 빈터로 변하기도 했었다. 특히 한일(韓日)국교 정상화로 일인(日人) 관광객들이 입국하여 돈을 털어놓고 가는 것도 경제회복에 일조(一助)가 되었을 것이다.
한 예를 들면 K씨는 일정(日政) 때부터 골동품 중간상을 했었는데, 8.15광복으로 일인(日人)들이 자기나라로 쫓겨 가면서 가지고 있던 골동품들이 쏟아져나왔고, 또 6.25전란중에도 생활의 피폐로 골동품들이 홍수처럼 흘러나와 값이 그야말로 싼값으로 사 산더미처럼 쌓였던 물건을 일인(日人)관광객들이 천정부지(天井不知)의 많은 돈을 내고 가져가는 바람에 수년 내에 큰 돈을 벌어 5층 빌딩을 짓고 재벌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인사동 전통문화거리
거리의 옛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변모했고, 지금 관훈동, 인사동 거리에 진열된 산적(山積)한 상품들이 전통과 고풍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몇 종류나 될 수 있을까? 근래에는 중국과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중국의 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우리의 민속품이나 골동품은 어느 구석에 있는지 눈을 씻고 보아야 할 지경이 아닌가? 하지만 곳곳에 전통찻집이 많이 눈에 뜨이고 전래하는 떡을 치고 엿장수가 가위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엿파는 장돌뱅이는 이색(異色)적인 구경거리이다.
그리고 관훈·인사동에 화랑이 많지만 이름이 간혹 외국화가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는데, 신라 때 황룡사 벽화로 유명한 솔거(率居)나, 근래에 유명한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인용한 화랑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나부터도 전통문화가 무엇인지 좀더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여 우리 전통문화에 걸맞는 시설과 상품의 진열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다.
- 인왕산 치마바위 상암산방(上巖山房)에서 -
- 山氣 李謙魯(이겸로/통문관 주인·서지학자) -
통문관 이야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7번지. 인사동 골목으로 접어들어 스무걸음정도만 걸으면 나타나는 고서점 통문관(通文館)은 생긴지 60년이 된다. 우리나라 고서점의 역사 그 자체이다. 통문관 주인 이겸로(李謙魯)옹(82)의 뇌세포 속에는 60년간 그의 손을 거쳐가 수십만권의 책과 그책을 나눈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이 빼곡히 들어있다.
그가운데는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 소창진평(小倉進平)이 들고 사라진줄 알았던 국보 『月印釋譜(월인석보)』를 61년 10월 중순께 찾아내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케한 사연같은 반가운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장서각(藏書閣)에서 도둑맞은 조선왕조실록을 발견해서 대부분 찾았으나 1권만은 전주의 제지소로 팔려가 재생용지가 되고 말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연도 있다.
그가 사학자 황의돈(黃義敦)박사한테서 사서 소장하고 있던 『時用鄕藥譜(시용향약보)』를 어느 대학에 영인본을 만들라고 빌려주었다가 원본 4장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들어있다. 뿐만아니라 좋은 책을 싼 값에 사려는 밀고 당김과 통문관을 드나들며 대학자로 성장한 이들과의 인연도 담겨있다. 이옹은 고서점 주인이라기보다는 귀중한 책을 찾아내서 가치를 평가받게한 우리 전적(典籍)의 수호자이자 귀중한 전적을 영인출간하여 한국학 발전에 이바지한 출판인이며 주요 전적의 수집가이기도하다.
그가 61년 영인한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은 내용뿐 아니라 외형에서도 닥지에 오프인쇄를 한 뒤 연화문(蓮花紋) 능화판으로 책옷을 입혀 옛 책의 장엄함을 되살림으로써 전세계 주요 도서관에 한국 서지문화(書誌文化)를 자랑했다. 이 책 영인본은 지난해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기념으로 유엔본부에 기증되기도 했다. 이옹이 서점을 시작한 것은 불과 17세때인 1925년. 고향에서 일본으로 밀항하겠다고 나섰다가 실패하고 서울로 올라온 뒤 서점일을 하던 친구의 소개로였다.
9년정도 선문옥(選文屋)등 여러 서점의 일을 봐주다가 친구가 하던 금문당(金文堂)을 34년에 인수했다. 그 서점을 맡은 뒤 이름을 일본의 출판사 금항당서적(金港堂書籍)에서 따와 금항당(金港堂)으로 고쳤다. 이옹이 본격적으로 국학서적을 발굴하고 수집하고 재출간하는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45년 광복과 더불어서 이다. ‘전당포이름같아 영 맘에 들지 았았던’ 금항당(金港堂)이라는 이름부터 통문관(通文館)으로 바꾸었다.
통문관은 고려때부터 역관을 키우던 곳으로 한-중-일-몽고어를 망라하여 한국학 서적을 다루겠다는 이옹의 의지를 반영하는 작명(作名)이다. 이옹은 46년 2월에는 이윤재(李允宰)선생이 쓴 『聖雄李舜臣(성웅이순신)』을 출간했으며, 이해 8월에는 『靑丘永言(청구영언)』을 영인출간했다. 『靑丘永言』은 우리나라 시조 1천여수와 가사 7편을 영조 때 가객 김천택(金天澤)이 엮은책이다.
이 책의 영인본을 낸지 7년만인 53년에 국내서는 유일한 김천택의 자필원고본을 입수해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 원본은 납북된 시인 오장환(吳璋煥)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그 아내가 『靑丘永言』만 어루만지며 노상 눈물짓는 것을 보다 못한 장인이 이옹에게 청하여 사들이게된 귀한 책이다. 그무렵 “만일 그이와 상봉하였을 때, 『靑丘永言』을 팔았다고 한다면 그분이 얼마나 나를 책망하고 섭섭해 하시겠느냐”는 그 부인의 고민을 듣고 이옹은 통일이 되면 그 책을 오(吳)씨에게 돌려줄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통문관이 출간한 책은 지금까지 50여 종. 그 가운데는 이상백(李相伯)선생의 『한글의 기원』같은 저서와 『梁琴新譜(양금신보)』같은 영인본이 두루 들어있다. 또 직접 영인하지 않았지만 『조선왕조실록』영인본이 55년까지도 국내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일본 것이 수입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이 사실을 학자들에게 알린게 55년 국내서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됐다.
통문관이 국학 발전에 기여한 것은 출판도 있지만 역시 서점으로서이다. 서울대 송욱(宋稶)교수나 중앙대 김덕룡(金德龍)교수같은 이들은 중학생 때부터 평생 이곳을 드나들었꼬 평양태생의 서지학자 이인영(李仁榮)교수 (서울대-납북) 사학자 송석하(宋錫夏) 가람 이병기등이 모두 통문관의 단골이었다. 서지학의 태두(泰斗)인 김두종(金斗鐘)박사 사학자 김철준(金哲俊)선생, 동창(東滄) 원충희(元忠喜) 선생과 국문학자인 김민수(金敏洙) 고려대 교수 사학자인 이기백(李基白)한림대교수등 통문관을 거쳐간 단골학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이옹은 또 주요 전적의 제집을 찾아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6.25로 잃을 뻔한 『三國遺史』는 이홍식(李弘植)박사에게서 건네받아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케 했으며 구한말의 대학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장서 3천4백89권을 위탁받아 국립도서관에 『위창문고』를 마련토록 주선하기도했다. 상해에서 발간한 『獨立新聞』도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케 했다.
어느 고등학교의 도서책임자인 황(黃)모씨가 고대(高大)에서 훔쳐내 팔았던 『北史詳節』은 이옹을 매개로 성균관대 도서관에 소장됐다가 고대(高大)로 return도 했다. 이옹이 67년간 서점일만 하며 제일 안타까워하고 있는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점차로 책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광복전에는 주말이면 서점이 사람들로 꽉차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일본인들의 독서수준에 비기면 우리 독서수준은 양과 질에서 너무 떨어진다”고 말하는 이옹은 조선시대까지 전통을 돌이켜 보면 이런 격차가 더욱 안타깝다고 덧붙인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일 뿐 아니라 종이개발과 제책에서 동양 3개국 가운데 으뜸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필사본의 양이 다른 나라 책들과 비길 바가 아닌데 이것은 독서욕구는 많으나 인쇄량이 따르지 못하니까 베껴 본 증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양반지배계급 중심으로만 인쇄된 책을 독점하다보니 점차로 국력도 쇠약해졌다는게 이옹의 풀이이다. 반면 요즘은 “책은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학자나 젊은이나 책을 사보는 사람이 드문게 걱정”이란다. 이옹이 또 못마땅한 것은 책을 빌려주고 받는 일을 ‘바보짓’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이옹은 원래 책을 빌리면 술 한 병과 함께 돌려준다는 옛말에서 술병 ‘치’字가 발음이 같은 痴(바보치)로 와전되어 이런 악습이 생겼다며 ‘책은 두루 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때문에 그는 소장도서 가운데 우리나라 활자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고려말부터 근세조선말까지 옛책 6백60여점을 대한출판문화협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는 1403년 계미자(癸未字)로 찍은 십칠사(十七史), 1420년 경자자(庚子字)로 찍은 『資治通鑑』같은 희귀도서가 많다. 이옹은 기증을 계기로 출협이 출판박물관이라도 만들길 기대했으나 출협측의 노력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옹이 몇 사람에게 빌려준 구한말 잡지 50여종의 창간호 등이 돌아오지 않아 아직 일반인의 문화수준은 이옹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옹의 소장도서는 1만2천종 정도인데 그 정보를 나누고 발전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이옹의 자녀 4남 2녀 가운테 둘째와 넷째아들, 맏사위가 인사동서 역시 고서점을 하고 있으며, 통문관서 배운 김영복(金榮復)씨가 인사동서 고서점을 운영, 통문관의 가지를 뻗고 있다.
- 글 / 서화숙(한국일보 여론독자부 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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