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생각을 파는 사람 [8] *-

paxlee 2013. 2. 13. 09:13

생각을 파는 사람 - 여섯 번째 인물

셀러(seller) 프로듀서 구범준
셀러유형 굿 네트워커(Good Networker)
대표상품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굿 네트워커의 셀링 포인트

 


1) 강사와 청중의 장벽을 없애라.
2) 비영리적인 영리성을 추구하라.
3) 자발적 네트워킹으로 한계를 넘어서라 .

 

프로듀서 구범준

 

얼마 전 한 방송사의 공개 녹화 강연에 초청을 받았다. 일찌감치 도착해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대기실 밖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마어마한 박수와 함성,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호기심에 나와 봤더니 이건 완전 교회 부흥회다. ‘I’ll say yes!’라는 노래에 맞춰 수백 명의 청중이 다 함께 춤춘다. 그것도 진심을 다해, 신나게.
   
   한바탕 축제가 끝나자 청중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강연 전에 이미 마음의 빗장을 열고 완벽히 감동받을 준비를 한 것이다. 이날 무대에 올라온 스피커는 총 6명. 대학생, 사진가, CEO 등 다수가 강의 경험이 많지 않은 분들이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뜨거웠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청중의 눈빛과 리액션이 무대 위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이날 나는 맨 마지막 순서에 등장했다. ‘청춘, 불공정거래 하지 마라’는 주제로 20·30대의 일과 결혼에 대해 강의했는데 2~3분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수백 명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순간 나도 울컥할 뻔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래가 아닌 강의로 사람들을 제자리에서 일으킨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것도 단 15분 만에.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보니 15분은 서로의 고정관념을 깨고 생각을 넘나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프로그램 이름처럼 ‘세상을 바꾸는 15분(이하 세바시)’이었다.
   
   
   유튜브 누적 조회 수 650만건 돌파한 ‘세바시’
   ‘한국형 TED’로 불리며 선풍적 인기

   
   바야흐로 지식 강연의 전성기다. 몇 년 전부터 토크 콘서트가 유행이더니 청춘콘서트, 삼성의 열정락서 등 오프라인 강연이 줄을 잇고 있다.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이유로 기피하던 강연 프로도 요새는 tvN ‘스타특강쇼’, KBS ‘강연 100도씨’ 등 앞다퉈 선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난해 시작한 CBS의 세바시는 ‘한국형 TED’로 불리며 젊은 직장인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TED는 전 세계 지식형 콘서트의 원조로 평가받는 강연회다. 전 세계 모든 분야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콘텐츠만 있다면 누구나 말할 자격이 주어진다. 강연 시간은 18분 내외. 그리고 모든 영상은 무료로 인터넷과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배포된다. 세바시 역시 마찬가지다. 나 같은 전문 강사뿐만 아니라 할 얘기가 있다면 누구나 스피커가 될 수 있다. 강연 시간은 15분. 모든 영상은 유튜브와 애플리케이션 IPTV 등으로 무료로 볼 수 있다. 세바시는 현재까지 유튜브 누적 조회 수만 650만건에 달한다. 인기 강연의 조회 수는 수십만 건에 달해 웬만한 아이돌 가수의 영상 조회 수와 맞먹을 정도다. 녹화가 월요일 저녁임에도 450석에 달하는 강연장(목동 KT 챔버홀)은 언제나 만석이다.
   
   “지난해 5월 처음 시작했을 때는 조마조마했죠. 우리가 공중파도 아닌데 과연 사람들이 올까. 돈을 주고 방청객을 데려올까도 했는데 돈이 없어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의외로 청중이 200명이나 온 거예요. 어, 이거 되겠다 싶었죠. 6개월 넘으면서부터는 강연장이 꽉 차기 시작했어요.”
   
   프로듀서 구범준(40). 그는 입사 14년차에 접어든 CBS의 베테랑 프로듀서이자 세바시의 ‘창조주’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처음에 세바시를 만들 때 선배들하고 독하게 싸웠단다. 기독교 방송인 CBS에서 갑자기 ‘목사님이 안 나오는’ 강연 프로를 만들겠다니 회사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만했다. 게다가 내부 스튜디오도 아닌 외부 강연장을 빌리겠다, 돈이 들더라도 HD로 촬영하겠다고 하니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구범준 PD가 내부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강연 프로에 ‘꽂혔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주목한 스피치 시장의 트렌드는 첫째, 대중의 자발성이었다. 테드(TED), 이그나이트(Ignite) 등 외국 강연들의 특징은 대중이 스스로 강연을 조직해서 만들고 이를 공유한다는 데 있다. 국내에도 테드 지역별 모임인 테드x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3위에 달한다. 겨우 인구 5000만인 나라가. 오죽했으면 테드의 큐레이터인 크리스 앤더슨이 “한국인의 지식 욕구는 정말 놀랍다”고 했을까. 둘째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발달로 이러한 자발적 강연 네트워크가 무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연을 만들고 싶고,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손쉽게 만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눈여겨본 구범준 PD는 그 어느 방송사보다 빨리 강연 콘텐츠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전문 강사 아닌 일반인도 무대 설 수 있어
   청중과 강사 따로 없는 지식의 선순환 구조

   
   20여년간 강사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나에게도 세바시는 꽤나 신선한 플랫폼이다. 동시에 몇 가지 생각해볼 만한 화두를 던져준다. 첫째는 강사와 청중의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강사와 청중은 수직적 관계였다. 직업으로 말하는 강사와 학점, 혹은 자격증을 위해 수동적으로 강연을 듣는 청중. 특히 강사로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인증받은 학위나 스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바시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따로 없다. 세바시의 전제는 이거다. ‘누구나 인생 살면서 15분 정도 들려줄 콘텐츠는 있다.’ 옆집 할머니도, 대학생도, 평범한 직장인, 심지어 어린이도.(실제 TED에는 어린이들도 등장한다.)
   
   이전에 세바시에서 ‘스마트 시대, 행복의 진화’라는 제목의 강연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강의 앞머리에 이렇게 묻는다.
   
   “스마트폰 2300만명 시대, 여러분은 과연 행복하십니까?”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TV를 보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가족의 사진을 찍고 마인드맵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배우고 얻은 노하우를 플리커, 유튜브, 블로그에 올려 공유하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 나눠주었다. 덕분에 성공적인 이직은 물론, 일상에서의 행복감도 더 커졌다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발견, 소소한 일상이 아닐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청중은 위로받고, 영감을 얻고, 새롭게 도전할 힘을 얻는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들에게 세바시는 언제나 올라가고 싶은 ‘꿈의 무대’다. 구범준 PD에게 “나도 세바시 무대에서 내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싶다”는 내용의 이메일이나 댓글을 보내는 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실제로 이들 중에서 차기 스피커가 나오기도 한다. 청중과 강사가 따로 없는 지식의 선순환 구조야말로 세바시의 차별화 포인트이자 인기 비결인 셈이다. 하긴, 장벽을 허무는 데는 구범준 PD 자체도 일가견이 있다. 그는 방송사 PD가 안 하는 일만 골라 한다. 매번 녹화 때마다 현장에서 티셔츠 차림으로 박수를 유도하고, 강연자들의 프레젠테이션을 띄워주고, 책 선물도 직접 나눠준다. 녹화가 시작되면 청중과 함께 울고 웃는다.
   
   “직접 옆에서 강의를 듣다 보면 무릎을 탁 칠 때도 많았고 눈물이 날 때도 꽤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섭외할 때마다 이메일에 이렇게 써요. ‘프로듀서로 존재해야 할 저도 매번 강의를 들을 때마다 감동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관객의 한 명으로 세바시에 와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공익 위해 영리 포기하자 오히려 수익 증가
   사내 교육에 세바시 활용하겠다는 기업들 줄서

   
   둘째 화두는 세바시가 갖고 있는 ‘비영리적 영리성’이다. 세바시는 ‘결핍’으로부터 출발한 프로다.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TV에서 시작해 시청률이 낮을 수밖에 없고, 이는 광고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구범준 PD에게 시청률은 관심 밖이었다. 대신 그는 세바시가 가진 태생적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데 집중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아나운서도 없다, 다른 토크 콘서트처럼 가수도 못 부르고 유명 강사도 섭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최대한 심플하게 만들어서 무료로 오픈해버리자. 이건 공중파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시나리오죠. 일단 세바시처럼 단순한 포맷으로는 안 만들어요. 뭔가 재미있거나 색다른 장치를 붙이려고 하죠. 시청률이 나와야 제작비를 건지고, 광고가 붙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15분을 훌쩍 넘겨 유통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수익을 내야 하는 방송국에서 무료로 콘텐츠를 배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시청률과 영리성에서 자유로웠던 세바시는 유튜브 등을 통해 과감히 오픈해버렸다. ‘가치 있는 생각을 모든 이들과 공유한다’, 오픈 콘텐츠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자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세바시는 지금껏 CBS에서 만든 모든 콘텐츠 중에 가장 큰 수익을 내는 프로가 됐다. 세바시가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사내 교육에 세바시를 활용하겠다는 기업들이 점차 늘어난 것이다. 유튜브 동영상에 광고를 붙이는 방식으로 후원하겠다는 기업들도 생겨났다.
   
   요즘은 출판사에서 저자를 출연시켜 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세바시 출연자들을 저자로 모셔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교에서 교재로 쓰고 싶다는 요청도 끊이지 않고 있다. 수업 시작 전, 매일 세바시 하나씩 보고 수업을 시작하는 고등학교도 늘고 있다. 물론 학교에는 무상으로 모든 콘텐츠를 공급한다. 세바시는 지금 지식 콘텐츠 시장에서 ‘비영리적 영리’라는 새로운 경제 트랙을 만들고 있다. 공익을 위해 당장 눈앞의 영리를 포기하면 그것이 선한 영향력이 되고 마침내 자본과 권력이 되기도 한다. ‘돈이 선이 되는 게 아니라 선이 돈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세바시의 진정성, 대중을 움직이다
   무료로 앱 만들어주고 SNS 홍보도 다함께

   
   
셋째는 자발적 네트워킹이다. 세바시는 스승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었다. 나와 비슷했지만 조금 더 노력하고 도전해서 뭔가를 경험하고, 이루고, 깨달은 수많은 멘토들을. 세바시의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세바시로 인해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대중은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빚을 갚는다. 누군가는 입소문으로, 누군가는 정성스러운 블로그 포스팅으로, 누군가는 무료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했다. 다음 같은 거대 포털사이트도 영상 페이지에 세바시 영상을 올리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주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 오직 진정성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대중의 자발성이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는 세바시의 진정성이 있었기에 대중은 스스로 움직였고 SNS와 입소문을 통해 세바시의 영향력을 두 배, 세 배 높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구범준 PD를 ‘굿 네트워커(Good Networker)’라 부르고 싶다. 사람과 콘텐츠를 연결시켜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 내는 사람.
   
   “밤하늘의 별을 보면 밝게 빛나는 별도 있고, 희미하게 빛나는 별도 있어요. 그러나 어두운 별일지라도 주위의 별들과 연결하면 하나의 별자리가 되잖아요. 한국처럼 역동적인 사회에서는 밝게 빛나는 별 하나로 사회가 움직이지는 않아요. 어둡더라도 주변의 별들과 네트워킹하면 충분히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별자리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세바시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뉴욕으로도 진출한다. 7월 19일 세바시 1주년을 맞아 ‘세바시 토크 인 뉴욕’ 강연회를 연다. 한국에서 섭외할 수 없었던 명사들이 대거 출연할 예정이란다. 
   
   지금까지 축적된 강연은 대략 160여개. 구범준 PD의 소망은 세바시가 거대한 ‘지식영상 데이터 베이스’가 되는 것이다. 삶을 통해 살아 있는 지식을 알려주는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푸석푸석하지 않은, 인간적인 얼굴을 한 지식 콘텐츠. 그때가 되면 세바시는 15분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바꾸지 않을까. 얼마 전, 세바시 청소년 특집에 왔던 고등학생은 종이비행기에 이런 글을 적어 무대 위로 날렸다.
   
   “저 정말 힘을 얻었어요. 요즘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제 목숨을 건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한번 해볼게요. 세바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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