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암벽에세이 3

paxlee 2013. 9. 16. 08:31

[암벽에세이] 아름다운 시절 3
 

       내 가슴속의 레니 리펜슈탈을 만난 후

 

결심


대학시절에 맛만 봤고 제대로 해보지 못한 암벽산행을 내 인생이 다하기 전에 꼭 다시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열망 앞에 나는 곤혹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수로 암벽산행을 하며, 그걸 가족에게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모두들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결심은 안으로 굳어졌고, 그걸 나도 어찌하는 수 없었다.


와중에도 나는 쓰고 있던 장편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다른 무엇을 도모할 겨를이 없었다. 소설가는 하루하루 일정 분량의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섯 시간이면 여섯 시간, 여덟 시간이면 여덟 시간 줄기차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그 창작의 시간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들도 바쳐져야 한다.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누구와 깊이 얘기하는 것도, 운동하러 체육관에 가는 것도 방해가 된다.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나는 기를 쓰고 소설을 완성했다. 일단 완성하고 어떻게든 해보자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허랑하게 생각에 잠겼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는 예순세 살이었다. 그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나이를 잊고 살아왔다지만 암벽등반은 웬만한 젊은이도 하기 어려운 익스트림 스포츠였다. 위험을 감내할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과연 내가 그 강한 운동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평생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고, 체력도 약골에 속했다. 최근 2년간 K 등과 함께 산에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대학시절 암벽을 구경했다지만 이미 수십 년이 흘렀고, 등반이 어떻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책상 앞에 앉는 것 외에는 어떤 노동도 해본 적이 없었다. 글이나 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를까, 느닷없이 암벽등반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장차 다가올 내 죽음 앞에서 후회할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처해 있는 조건이 어떻다 해도.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위축될 때마다 꺼내서 암송하는 주문이었다.


힘을 내라
용기를 가져라
무서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함께 진군하신다
너희를 포기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아니하신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평생 종교를 가져보려고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다. 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는 동안 신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좌뇌가 너무 발달해 있는 인간 같았다. 사주 명리학을 배운 적도 있는데, 적중률 97.55%, 오차범위 ±2 정도나 돼야 믿지, 안 맞는 것도 많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미션스쿨을 다녔기 때문인지 종교는 이와 조금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4학년 졸업학기 때인가, 기독교문학을 강의하던 교수가 눈 오는 날 종강을 하며 말했었다. 종교란 그 태생기의 일들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하는 게 아니라 현대과학을 배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고. 그는 당시 전 국민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던 대학 졸업자인 우리가 종교를 저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비로소 여러 해에 걸려 성경을 읽었다. 그 시절 내 안으로 들어와 무기가 된 구절이 신명기 31장 6절이었다. 그것은 내가 너무 심약한 탓에, 타인과의 대결구도에 턱없이 힘들어하는 탓에, 싸움이나 흥정 같은 것은 아예 흉내도 못 내는 형편이라 나도 모르게 내 안으로 들어와 무기가 된 구절이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기력이 쇠해 눈도 뜰 수 없을 때마다 그 구절을 꺼내 주문처럼 외웠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가슴에 화기가 돌며 스르르 일어나게 되었다. 언어 자체의 힘이었다. 힘을 내라, 용기를 가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그날도 그렇게 외며 산 밑으로 갔다.

백련사로 오르는 길은 한적했다. 평일 오후의 햇살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배드민턴장도, 웨이트 트레이닝장도 비어 있었다.


산 그림자 속 산사나무 아래에 앉았다.


조용함 속으로 공허와 서글픔이 지나갔다. 세잔의 ‘목맨 이의 집’이 떠올랐다. 내가 보고 또 보았던 그림. 화집의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또 돌아오고야 말던 고향 같은 그림. 목맨 이의 집 뜰과 그 앞길에 머물러 있던 오후의 적요, 그 안을 흐르던 공허와 서글픔, 애잔함…삶과 죽음.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해내야 할 일들….


참새가 포르르 날아왔다. 반가웠다. 두세 마리가 더 날아와 내 발밑에서 콕콕 무언가를 쪼아 먹었다. 아이들이 흘리고 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새들이 휘이익 날아갔다. 아쉬움이 내 손 끝에 남았다.


라디오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 소리가 내 옆에서 머물렀다. 카우보이모자처럼 생긴 등산모를 쓴 남자였다. 그는 배낭을 돌 위에 내려놓고 점퍼를 꺼내 걸쳤다. 산행이 끝나고 걸음이 느려지자 등허리가 선듯해진 모양이었다. 배낭에 들어 있는 라디오에서 사설이 흘러나왔다.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레니 리펜슈탈은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나치영화를 찍었고, 우리가 흔히 보는 히틀러 사진이나 무섭게 행진하는 나치군대의 모습은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리펜슈탈을 소개했다. 그녀는 애초 무용수였는데, <푸른 빛>이라는 산악영화에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우연치 않게 배우가 되었다고 했다. 진행자의 분위기로 보아 오후의 음악프로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배낭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꺼내 다시 정리해 넣었다. 엄청난 분량이었다. 산에 한 번 갔다 오는데 저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할까 새삼 의아스러웠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015B의 ‘슬픈 인연’이었다. 낮은 음색의 노래가 산사나무 작은 잎새들을 흔들며 퍼져나갔다.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하는 부분에서 남자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굉장한 노래실력이었다. 라디오 속 가수는 ‘견딜’에서 거의 쉰 목소리로 변하며 절실함을 표현했는데 라디오 밖 남자도 아주 유사하게 흉내를 냈다. 그 남자는 노래 하나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자신 있는 것 같았고, 그걸 내 앞에서도 자랑하고 싶은가 보았다. 나는 말을 섞는 것이 싫어 반응하지 않았다. 후반부의 시원스런 열창을 거쳐 노래가 끝났다. 멜로디와는 다르게 사랑의 고통을 호소한 내용이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 사랑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겠느냐(자기 자신이) 하며 사랑했던 당시의 고통을 끔찍해하고 있었다. 흔히 말해 예쁘고 나쁜 여자와 연애를 했던 것 같았다.


내 가슴속의 레니 리펜슈탈을 만난 후

 

후주가 끝나고 레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푸른 빛>에서 강건한 신체와 아름다운 미모를 보여준 그녀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고,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상을 받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제창하던 히틀러의 눈에 띄게 되었다. 히틀러는 그녀를 자기 휘하로 불러들여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영화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35년의 나치전당대회를 다룬 <의지의 승리>와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을 담은 <올림피아>라고. 그녀는 영화 기술적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재였는데, 특히 연출과 촬영 면에서의 혁신은 지금까지도 영화인들에게 전설처럼 구가된다고 했다. 히틀러를 신처럼 보이도록 파격적으로 카메라 구도를 잡았고,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을 박진감 넘치게 연출했으며, 살아 있는 환호성에 바그너의 음악을 효과적으로 조화시켜 너무나도 예술적인, 또 너무나도 정치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치의 광기를 정치선전화해 최고의 선동영화를 만들었지만 내용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재판을 받았고, 오랫동안 배척당했고, 숨어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말년에 스킨스쿠버를 배웠다. 무려 86세에 스킨스쿠버자격증을 따서, 87세부터 95세까지 물속의 모습을 촬영해 <해저의 인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완성했고, 그 필름을 100세 생일에 공개한 뒤 이듬해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통 큰 인생이었다.


나는 멍하게, 무엇에 얻어맞은 듯 앉아 있었다.
그래, 이거야, 하며 마음이 크게 열렸다. 레니 리펜슈탈은 여든여섯에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땄는데 나는 이제 예순셋이잖아. 예순셋에 암벽등반에 도전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어떻게든 할 수 있다니까. 당장 그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그 순간 우선 떠오른 것이 등산학교였다.


등산학교


무엇을 배운다 하면 학교밖에 더 있겠는가. 개인지도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중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학교였다.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도 역시 학교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등산학교’라고 쳤다.


그런데 모든 등산학교들이 이미 추계반을 시작한 뒤였다. 등산학교들은 1년에 두 번 정도 수강생들을 모집했고, 대개 주말에 산에서 실기 위주로 수업하는 것 같았다. 여름 휴가철에 합숙을 시키면서 일주일이나 열흘가량 스트레이트로 수업하는 곳도 있었다. 추계반들의 일정은 9월 초에 시작해서 5주가량 수업을 했는데, 벌써 3주나 지나 있었다. 정승권 등산학교만 10월 수업 일정이었고, 아직 마감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운명 같은 예감을 느꼈다. 정승권 등산학교도 개강은 9월 말이었다. 나는 마음이 바빴다.


인터넷 서식으로 급하게 원서를 썼다.


이름을 쓰자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칸이 나왔다. 모든 서식이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민등록번호를 죄수번호처럼 밝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모집요강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나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 제한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예순셋의 나이에 암벽반에 지원한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어불성설이었다. 아직 나와 같은 경우가 생기지 않아서 그렇지, 등산학교 측에서 꺼릴 게 뻔했다. 공연히 노인을 하나 받았다가 낙상해 다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나 고민할 것이었다. 직접 찾아가서 내 체력과 젊음을 과시하며 받아달라고 사정해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젊지도 강건하지도 않았으니까.


고민 끝에 나는 친구에게 의논을 했다. 인터넷에 정통한 그녀는 동생 이름으로 신청을 하라고 했다. 인터넷에서는 그런 일들이 흔하다고. 내 여동생은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이고 중학교 교감선생님이었다. 쉰여덟이니 결코 젊다고 할 수 없었지만 예순셋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그럼 거기 가서 동생 이름으로 사람들을 사귀고 계속 동생 이름으로 행세해? 나이도 다섯 살 아래인 사람으로? 그게 뭐 대수냐고 친구는 코웃음 쳤다. 요새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많다고 했다.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는 것이다. 그까짓 거 들통 난다 해도 사정을 말하면 오히려 동정받을 거라고, 배움엔 나이가 없지 않느냐고, 갸륵한 열정으로 상을 받고 교과서에 실릴지도 모른다고 깔깔깔 웃어 젖혔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우선 동생의 주민등록번호를 몰랐다. 이러저러하니 네 이름을 좀 도용하자고, 주민등록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전화하기 어려웠다. 우리 형제의 분위기가 그랬다. 우리는 자라는 내내 모든 것을 원칙 위주로 하도록 종용받았고, 그래서 융통성이 없는 편이었다. 게다가 내 동생은 국가공무원이었다. 자기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가 이상하게 쓰이는 것을 께름칙해할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내 이력사항을 썼다. 주민등록 번호를 쓰는 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맨 앞의 두 자리 수를 다섯 살 아래로 바꿔 썼다. 공문서 위조가 된 셈이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위법을 행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등산학교 암벽반에 지원한 것이다. 통과되는 지 안 되는지 보자고. 안 되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써보자고. 


그러나 생각해 보니 쉰여덟도 너무 많았다. 쉰여덟이라 해도 환갑에 육박하는 나이가 아닌가.


나는 궁여지책으로 등산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암벽반에 지원한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몇 살인데 그러시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나는 떠듬떠듬 쉰여덟이라고 밝혔다. 한참의 공백이 지나갔다. 그가, 정승권 선생이 당황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을 만들었다.


“…그, 그 정도면 충분하십니다….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요…. 수요일 예비모임에 나오십시오.” 


사람을 포용하는 품성이, 점잖은 인격이 전화선을 통해 푹 전해져 왔다.  <계속>


필자 약력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중편 ‘강’으로 KBS 방송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세계의 문학>에 단편 ‘빗소리’로, <문학사상>에 단편 ‘하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초록빛 아침>, <아비뇽의 여자들>, <체리브라썸>, <오로라의 환상>(전 2권), <그물>, <막다른 골목에서 솟아오르다>가 있으며, 소설집 <빗소리>, <숭어>, <플라타너스 꽃>, <악보 넘기는 남자>, <장미회 제명사건>이 있다.

 

- 글·이청해님 / 월간 산 20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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