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의 최고봉은 백운봉(836.5m)이다.
오늘(1/18)은 삼각산 백운봉을 올라갔다. 해가 바뀌었으니 최고봉을 한 번 다녀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우이동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늘이 일요일임에도 삼각산 산행인은 많지 않았다. 백운봉제2지킴터에서 능선으로 올라가는 산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겨울날씨라 바람은 차고 햇볕마저 구름속에 가려 을씨년서러운 날씨였다. 모자를 눌러써고 옷깃을 세우고 얼마동안 오르막길을 걸었드니 몸에서 땀히 흐르기 시작하였다. 능선길은 그래도 올라갈만 하였다. 도선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부터는 돌로 이어지는 계단길이 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하루재까지는 계속 오름길이 이어진다.
하루재를 넘어서니 음지여서 얼음길이 전개되었다. 산길은 눈이 쌓여있고 얼어붙어 산행은 힘들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눈 길을 응시하며 발을 옮겨놓은 곳을 확인하느라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걸어야 하였다. 우이동쪽에서 삼각산을 오르면 인수봉이 앞쪽에 있어서 인수봉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백운봉은 인수봉 뒤에 있어 백운봉의 모습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백운봉을 왜 백운대라 하였을까? 산의 정상을 우리는 봉우리라 하고 봉우리의 이름을 붙어 삼각산 정상을 백운봉이라 불러야 하는데, 왜, 누가. 언제부터, 백운봉을 백운대라고 불렀을까? 봉(峰)과 대(臺)는 어떻게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것이 왜 궁금한 것인가?
백운봉이라는 이름은 누가 언제부터 백운봉이라 불러게 되었을까? 기록이 없으면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 위에는 항상 흰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백운봉(白雲峰)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와 문화는 기록으로 말하는 것인데,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문화도 없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는 비슷하게 전개되어왔고, 같은 시기에 같은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중국에는 고대 정치와 역사의 기록물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고조선에서부터 통일신라까지의 기록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다.
역사는 기록이다라고 정의 할수 있느데, 우리에게는 중국과 달리 그때 우리의 문자가 없어서 기록을 못한 것인가?. 아니면 기록의 중요성을 깨닭지 못한 것인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항상 궁금하였다. 백운봉에 관한 궁금증을 토로하다가 이야기가 엉뚱하게 흐르고 말았습니다. 서울의 산, 산각산의 최고봉, 백운봉을 올라가 인수봉 넘으로 멀리 자리하고 있는 도봉산은 힘차게 뻗어나간 주봉능선에 정상봉, 자운봉과 만장봉, 선인봉의 자태는 언제, 어디서 보아도 늠늠하고, 우아하며, 도도하다. 도봉산 건너편에 수락산, 삼각산 건너편에 수락산과 당고개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불암산이 서울의 산이고,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인수봉은 그 어느 산보다 아름다운 산이다. 아니 암산이다. 백운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인수봉은 손에 잡힐듯이 가까워 더 친근감이 느껴지며, 조각 예술가의 솜씨로 빚어놓은 것 보다 암벽미의 아름다움을 산행인들에게 선사해 준다. 인수봉에서 뻗어내린 설교능의 암릉은 인수봉이 넘어지지않게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느낌이다. 숨은벽의 암릉과 대조되는 설교능은 좌우에 쌍벽을 이루고 있다. 백운봉에서 바라보는 만경대와 인수봉을 비교해 보면 인수봉의 수려한 자태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멀리 비봉을 지나 보현봉과 문수봉은 백운봉에서 힘차게 뻗어내린 능선이며, 문수봉에서 다시 뻗어내린 의상능선의 7개의 웅장한 봉우리의 모습은 장쾌한 능선을 이루고 있다.
능선길에서 보이는 인수봉
인수봉 안내판과 인수봉
아름다운 인수봉
인수봉을 지지하고 있는 설교능
숨은벽 능선
백운봉 앞에서 본 인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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