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산행기

경복궁의 진산 북악산의 서울성곽 둘레길

paxlee 2015. 3. 10. 09:26

 

경복궁의 진산 북악산의 서울성곽 둘레길

 

성북동에서 오르는 서울성곽 석축

 

석축 넘으로 보이는 성북동 모습

 

서울성곽 안내문

 

한가한 서울성곽 성북동에서 오르는 길

 

말바위안내소로 이어지는 성곽 외부로 연결된 길

 

서울성곽의 석축이 몇번인가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숲속의 별장같은 삼청각

 

서울 성곽길의 북문 숙정문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이 '예를 숭상한다'는 뜻에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졌다. 태조 5년(1306년) 처음 서울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 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 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 대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 16년(1416)에 기우절목(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災厄)을 면할수 있다"는 풍속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람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두게 했다'는 정반대의 속설을 전하고 있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월단(月團: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성곽 안쪽에서 본 숙정문

 

와룡공원에서 말바위 안내소를 오르는 성곽길

 

백악산(북악산) 정상석 342m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소나무 한그루가 애처롭다.

 

창의문으로 하산하는 급경사의 계단길

 

하산길에 바라본 인왕산, 시내서 올려다보는 인왕산과는 다른 산이다.

 

오늘의 성과둘레길의 종점인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서울성곽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사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옳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불려 왔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랗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향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 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굴궐 보수 작업때 석재의 운반을 위하여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성곽의 문로로서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당시 훈련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 이라고 건의 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로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淚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맨 위에는 봉황 한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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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일요일 혼자서 길상사를 들려서 길상사와 법정스님과 길상화님의 연의 고리도 확인해 보고

그 많은 재산을 스님에게 헌납한 길상화님의 삶의 무게가 나의 어깨의 무겁게 하였다.

나는 전철 4호선 한성대역(삼선교)에서 내려 6번출구로 나와서 안내표를 따라 걸어서

길상사를 찾아갔다. 천천히 걸어도 15~20분이면 길상사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길사사에는 곳곳에 법정스님의 삶을 일깨우는 글이 걸려있어 그 한마디 한마디 읽을 때마다

한번 더 스님을 생각하게 하였다. 길상사를 한바퀴 둘러보고 가장 뒤쪽에 자리잡은

법정스님의 진영각[眞影閣]-법정스님의 유물과 소품이 전시된 공간에서 스님의 참 모습을 볼수 있었다.

 

길상사에서 100분여의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다가 서울성곽이 보여 그곳으로 올라갔다.

여기까지 왔고 시간도 있어서 북악산 둘레길을 걸었다. 말바위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번호표를 목에 걸고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언제쯤이나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안내소에서 곡장을 향해 오르는 길 옆에 소나무 숲이 아름다워 사진을 몇 장 찍었드니 그곳의

길 가에 늘어선 지킴이 들이 사진기에서 사진을 확인하고는 성곽 내부 사진은 찍으면 않된다고 하면서

보는데서 삭제하라고 하여 그렇게 하고는 다시 걸었다. 시설물을 찍는 것도 금하고 있다고 한다.

 

곡장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이 일품인데, 오늘은 구름이 가려 사진이 선명하게 나오지않아

올리지 못했다. 와룡공원에서 숙정문을 지나 곡장에 들렸다가 청운대에 올라 서울 도성 구경을 하고

북악산 정상 백악마루에서 시야속에 들어오는 서울의 모습은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과 북한산에서 조망되는

서울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올려다 볼때는 보여지는 시야가 한계가 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시야가 펼쳐지는 전면이 넓어서 한번에 많은 것을 살펴볼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동서남북 사방을 한 번 둘러보는 그 흥미로움이 오늘도 산을 오르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