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부여, 백제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paxlee 2017. 6. 2. 22:24



부여, 백제의 역사문화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하였던 절터이다.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이다. 목탑으 한계를 극복한 높이 8.3m의

석탑이 남아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 강당지, 승발지 등이 확인 되어 불(佛), 법(法), 승(僧)의 불교의

3보를 모두 구비한 백제고유의 사찰건축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시대 석탑으로 탑의 원형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완벽한 군형미와 비례미를 부어주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높이가 8,3m의 결코 작지 않은 탑으로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배흘림

기법을 적용하여 상승감을 보여주는 등 장중하면서 부드럽고 육중하면서 단아하고 세련된 백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백제시대 석탑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탑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제를 선택하여 세부 구성형식이 세련

되고 완숙한미를 보여준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과 살짝 돌린 옥계석

기단부, 탁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그 의의가 크다고 한다.   

정림사지 정면으로 들어가는 중앙로 좌우에  있는 연지에 연꽃이 피어나고 있다.


연지의 연꽃이 피고 연잎의 그 싱싱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여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가다.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모습이다.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불좌상으로 5층석탑과 남북축선상에 놓여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후대에 다시 만들어 올린 것이다. 신체의 극심한 파괴와 파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모습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아쥔 지권인(智卷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손모양으로

불법으로 모든것을 감싼다는 것을 상징한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 대좌로 공

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정림사의 강당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박물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돌 항아리 모양이다.


부여 궁남지이다.

궁남지의 풍경이다.

궁남지 포용지로 진입하는 다리위에서

궁남지의 포용정이다.

궁남지 연꽃밭이 12만평이라고 한다.

궁남지 연꽃축제가 열리는 7월 7일부터 17일까지 연꽃을 피우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연꽃들이다.


지난 5월 22일부터 23일까지 공주, 부여 백제역사문화 투어를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몇 번에 걸처 올려보았지만, 미숙한 소개로 많은 도움을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이해를 구하면서 그 마지막 글을 올립니다.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 왕궁지를 확인하고,

공산성을 한 바퀴 돌면서 토성과 석축의 조화를 읽으며 금강을 사이에 두고 공주시의

남쪽의 구시지와 북쪽의 신 시가지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거대한 석축을 쌓아 묘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서 백제의 문화를 확인하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였고, 황새바위의 천주교 순교지에서 부활의 집 구성에 도자기에 그림을 그

색체를 입히고 구워서 벽과 바닥재를 설계 제작하여 놓은 모습에 놀랍도록 독특하게 설치한

그 곳을 보면서 놀라고 신기한 벡제의 옛 도읍지 공주의 백제문화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부여에서 1박하고 백제문화단지의 사비궁과 능사, 그리고 부소산성에서 사비궁의 흔적을 확인하고

산성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이렇게 아름다운 산책로가 부여 읍내 한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

부여 사람들은 문화의 혜택을 곱으로 받고 있구나 하는 감회를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낙화암의

백화정에서 백제의 혼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란사에 들렸다가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내려가 종점에서 내려 점심식사를 하고 백제시대의 정림사지를 둘아보았다. 그리고 백제부여박물관에 

서 백제의 유물을 확인하고 이번 공주, 부여 백제역사문화 투어를 마무리 하였다.  


이곳 공주, 부여 두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긍강을 공주사람들은 비단강이라 부르기도 하고, 부여 사람들은

백마강이라 부른다. 나는 부여에 가지 전에는 금강이 아닌 백마강이 부여에 있는 것으로 인식을 하였는데.

그곳에 가서 보니 금강을 백마강이라 불렀다. 백마강이란 이름을 갖게 된 사유가 따로 있다고 하였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소정방 장군이 금강을 건너려고 하면 장애물이 나타나 건널수 없어 

그곳 사람에게 물었드니 강에 용이 나타나 방해를 한다고 전했다. 어떻게 하면 건널수 있는지 문의를 하였드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 노인이 말 100두를 금강에 제사 지내면 건너갈 수 있다고 하여 말 백마리로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백마강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금강이 부여땅을 흐르는 동안은 백마강이 되어 지금까지 부여사람들에게는 금강이 아닌 백마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