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본존불의 미소는 근엄하고 자비롭다
석굴암 본존불은 국보 제24호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석굴암 마당에서 올려다 본 석굴암 건물의 모습이다.
석굴암 본존불상의 입구 문쪽이다.
이곳은 석굴암 본존불을 배알하고 나오는 출구문이다.
석가탄신일에 등을 밝힌 연등이다. 아름답게 달려있는 모습니다.
불국대종각의 건물 모습이 특이하다.
점심식사를 하려고 감포읍에 도착하여 식당앞 바닷가에 찍은 동해바다의 모습이다.
여기는 작은 바위섬이 있는 곳에도 파도는 찾아온다.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힘차게 밀려오든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혀 사라지면 이렇게 조용한 바다가 된다.
점심식사후에 감포읍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문무대왕의 수중릉(水中陵)이 있다는 돌섬이 보였다.
문무대왕릉에서도 파도는 찾아와 주어 반갑다고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로 이다. 석굴암 본존여래상은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 한가운데에 높이 약 3.5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은 불상 전체에 생동감
을 주고,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
운 표정은 신라 미술의 수준과 더불어 신라 왕실의 신앙심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불교 예술의 역작이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이다.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
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석굴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왜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잡
게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함산은 신라오악(新羅五岳)의 하나로서 신라인들에게는 영악(靈岳)으로 존숭
받았던 산이다. 토함산은 동악(東岳)으로서, 그 이름과 방위로 보아 일찍부터 용(龍)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영악에 석굴암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대의 내외정세와 경덕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석굴암 창건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
다. 경덕왕대는 정치·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신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였던
시기였다.
당시의 신라는 통일 초기의 수습과정을 벗어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이러한 안정은 신라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
던 평화를 누리던 시기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불교문화는 국민총화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화엄(華嚴)의 도리
를 바탕으로 이룩되었고, 그 정신은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독특한 성과를 이루게 하였다. 인공적인 석굴의 경영
은 온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찬연한 예술적 기품은 이러한 거족적인 호흡의 일치에 의
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석굴의 건축적 구조가 신라인의 창의와 전통에서 이루어졌고, 수려하고 품위 있는 불상은 그들이 연마한 정성
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승화된 생활미학의 결정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본존불이 안좌하고 있는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더욱 신비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본존의 모든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없이 부드럽게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한 간다라식의 어깨 선, 두 팔과 두 손, 가부좌(跏趺坐)를 한 두 다리와 무릎, 그 모든 선들이 어느 한 부분
도 허점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없다. 본존불의 손은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印相: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며
땅을 짚어 부처의 영광을 증명하게 하는 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가 이루어져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때에 생기는 불가사의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몸에 걸쳐진 옷,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로 자연스럽게 늘어진 엷은 옷자락은 역시
탁월한 기교뿐만 아니라, 숭고한 종교성을 드러내고 있다. 본존불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소박성·순수성·자연성
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신라문화의 꽃으로 피어난 불국사와 석굴암을 관광하고 12시가 다 되어 친구가 여기까지 왔으니
회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서 감포읍으로 향하였다. 불국사 입구에서 7.7km의 거리를 달렸다.
6월의 산 길에는 녹음이 짙은 숲속을 지나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도로도 있구나 하는 감미로움을 느끼
면서 자연의 힐링이 자연히 느껴지고 감지되었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앞이 훤하게 트이면서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넓은 바다, 수평선이 높게만 보이는 것은 착시현상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율동은 힘이있는 활동력을 자랑하듯이 파도가 부스지면 다시 밀려오고 하는 바다의
율동은 아마도 바다를 찾아와 준 고마움에 대한 바다의 손짓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문무대왕이 있는 곳에 들렸다가 가자고 하여 점심식사 후에 감포읍 쪽으로 조금 내려갔드니
벌써 그곳에는 많은 관광객이 바닷가에 모여 있었다. 멀지 않는 바다쪽에 돌섬이 있는데, 그 돌섬에 문무대왕
릉이 묻혀있다고 한다. 돌섬은 갈매기들의 쉼터가 되어 많은 갈매기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돌섬의 단조로움을 비켜가게 하였다. 약200m도 안되는 거리에 대왕의 수중릉(水中陵)이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확인하지않은 듯 하다. 내 생각은 경주시에서 문무대왕릉을 좀더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게 능
까지는 연결하지 말고, 바로 그 앞까지 다리를 건설하여 전망대를 하나 설치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닷가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대왕을 향하는 숭고한 순례가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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