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은 성종과 졍현왕후, 그리고 중종의 능이 있는 공원이다.
선릉 앞쪽에 있는 정자각이다.
성종의 선릉이다.
능 앞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12지상이 능 주위에 자리잡고 있다.
선릉에서 정자각을 내려다 본 사진이다.
성종의 선릉에서 장현왕후의 릉으로 가는 길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정현왕후의 릉이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성종의 정현왕후 능이다. 왕릉과 같은 크기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12지 신상이 서 있다.
선릉 공원의 숲 길이다. 약 7만2,000평이나 되는 숲이
도시 한 가운데 있어 산책로에 힐링코스가 다양하다.
먼곳에서 바라본 정릉이다.
정릉은 홍살문과 정자각과 봉분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정릉 중종의 릉이다.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정자각이 있는 곳에서 찍어서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재실 본관 건물이다.
재실의 안마당이다. 담장넘어 고목의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다.
재실 옆에는 약 500년의 수령을 나타내는 거목의 보호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수고가 약 24m, 둘레가 약 5.5m이다.
은행나무의 밑둥치의 둘레가 약5.5m나 되는 거목이다.
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1457~1494,재위1469~1494)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1462~1530)를
모신 동원이강릉이다. 서쪽 언덕에 성종의 능침이 있고, 동쪽 언덕에 정현왕후의 능침이 조성되어 있다.
성종의 봉분에는 12면으로 된 병풍석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새겼고, 봉분 주위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세조가 능에 벙풍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성종의 봉분에는 병풍석이 설치되어 있다.
정현왕후의 봉분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동원이강릉이란 왕과 왕비의 능이 장자각
뒤편 좌우의 서로 다른언덕 위에 조성된 형태를 말한다.
정릉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1488~1544,재위1506~1544)의 단릉이다. 중종의 능은 윈래 고양시
서삼릉 구역에 장경와후 윤씨(1491~1515)와 함께 동원이강릉으로 모셔졌으나,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1562년에 문정왕후의 주도로 이곳으로 옮겨졌다. 문정왕후는 이곳에 합장되기를 원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발생하자 인종은 어머니 문정황후를 이곳이 아닌 태릉에 모셨다. 봉분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을 세우고 난간석을 둘렀다. *단릉이란 왕이나 왕비가 단독으로 모셔진 형태를 말한다.
우리는 전철 2호선을 타고 다니면서 선릉역을 지날때, 왜 릉이 도시 한 폭판에 있는가 하면서 의아해
하기도 하면서 선릉이 어느 임금의 능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지나치곤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선릉 공원을 한번 찾아가 보았다.선릉역에서 약10분을 걸어서 정문을 찾아가는 데, 몇 번을 지나가는
분들에게 물어서 찾아갔다. 선릉은 전철 2호선 선릉역과 9호선과 분당선이 만나는 선정역 사이에 있다.
공원 넓이가 약7만 2,000평 쯤 된다고 한다. 강남의 도시 한 복판에 푸른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릉을 조성하던 시기는 광주군의 야산이었는데, 강남이 개발되면서 도시 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제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여 질산군이었던 성종이 장인 한명희와 할머니 인정희왕후(세조비) 의 노력과 합의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제9대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의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성종은 세자가
아니었으므로 제왕학 교육을 받지 않고 왕위에 오르게 되어 성인이 될때까지 제왕학 공부를 열심히 하였
다고 전한다. 성종은 재위 중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법 체제를 완성하고 , 조세재도는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을 설치하고, 국조오례의를 편찬
하여 유교예법을 확립하고,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밖으로는 윤필상 등을 보내 압록강, 두만강 건너의
야인들을 물리쳐 태평성대를 이루는 성군의 길을 걸었다.
성종의 왕비로는 원빈인 공혜왕후(1456~1474)는 후사 없이 승하하여 파주 순릉(順陵)에 모셔졌고, 연산
군의 모후인 윤씨(1455~1482)는 폐비가 되어 서삼릉의 회묘(懷墓)에 모셔졌고, 계비 정현왕후는 이곳
선릉의 동쪽 언덕에 모셔져 있다. 성종의 첫째 아들이며,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페위가 되어 방학
동 기슭에 묻혀있다. 북한산국립공원 둘레길을 걸으며 보고 느낀점은 중종반증으로 왕위에서 페위가 되
었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 존엄한 분의 묘가 가까이 있는 정의공주의 묘보다 빈약한 것을 볼때마다 보는
눈이 편치 않다. 후대에 영조와 정조가 많은 분들을 복권 시켜주었는데, 왜 연산군은 복권을 시켜주지 않
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 분이 왕으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에게 그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선릉조성과 연산군의 비밀」이란 글을 읽어보면, 조선 제9대 왕 성종은 세분의 비가 있는데, 첫번째 공혜왕후
는 어린나이에 일찍 돌아가시고, 두 번째 비는 운씨로 왕후가 되었지만, 곧 폐위되었으며, 세 번째 비 정현왕후
는 폐비 윤씨가 폐위된 후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 연산군은 조선 제10왕
으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가 선릉을 조성하던 중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
다. 조선왕릉을 만들 때에는 돌아가신 분의 생애를 비롯하여 혼인한 인물, 가계 등을 상세히 기술한 지문을 작
성하고 왕에게 최종 검토를 받은 후 땅에 묻는다. 성종 선릉의 지문에도 이 원칙에 따라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연산군이 성종의 지문을 마지막으로 검토하던 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종의 엄명으로 지켜내려온 폐비 윤씨의 사실을 연산군이 알게되므로 연산군은 그 때부터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엄마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한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분으로 세월을 보니다보니 정사에는
소흘히하게 되고 엄마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아들로서의 도리에 푹 빠져 중심을 잃고 허우적이다가
신하들에 의하여 중종반증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여 왕의 자리에서 쫓겨 나는 운명을 당하여 결국 연산군
으로 강등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을 자지우지 할 수 있으나, 아들은 부모의 삶을 추종할
뿐이다. 성종은 백성들이 성군이라고 하였으나, 연산군을 위하여 폐비 윤씨를 어떻게 던지 보호하고
아들의 어머니로써 살아갈수 있게 선도를 하지 못한 한의 책임을 죽은 후에 아들을 통해 그 업보를 안고
가야하는 운명이 되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연산군의 묘를 이곳 선릉의 그 넓은 공원 한쪽에 묘서 올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기대하여
보고 싶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그 때에 해결하지 못한 것을 지금은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현실이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니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훌륭한
교수는 제다들이 만들고, 성인 또한 훌륭한 제자들이 만들어 간다. 성군도 백성이 만들고, 훌륭한
아버지도 그 아들과 딸들이 만들어 가야 하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얽힌 한은
누가 풀어 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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