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여행의 매력은 다앙성이다. [40]

paxlee 2019. 12. 17. 08:18

 

생(生)이 보일때까지 걷기 [38-3]

3부, AT(Appalachian Trail)


< 2008년 10월 24일 앨런 캡 : 테네시 >

트레일 매직이란, 트레일 엔젤들이 도보 여행자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깜짝 선물이다. 대부분 트레일 엔젤들은 음료수를 채운 아이스박스를 길가에 두거나 군것질 거리가든 자루를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AT처럼 인기있는 트레일에서는 성수기면 하루에도 몇번씩 콜라나 맥주를 즐길수 있다. 어떤 트레일 엔젤들은 길가에 며칠씩 야영을 하며 스루하이커 들에게 바베큐나 핫도그 같은 식사를 제공한다. 나는 이번 트레일 매직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화살표를 따라 500m 쯤 걸어가 봤다. 정문 앞에 '트레일 매직' 이락 적힌 마분지 판이 또 하나 세워져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트레일 매직의 유혹을 못이긴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이내 발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단정해 보이는 40세 가량의 부인이 내게 인사를 건네며 안내를 했다.


"이른 시간이라 실례가 된다면 그냥 돌아갈까요."  나는 공손히 말했지만 완벽한 옷차림에 진주 목걸이까지 한 부인은 남편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AT 여행자 한명이 왔어요, 아침식사 준비해 주세요!"  고급스럽게 꾸며진 집안에 들어 서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게는 깨끗이 몸을 씻고 오라고 했다. 고급스러운 욕실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거실과 주방이 함께있는 널찍한 공간으로 나오자 팬케이크를 듬뿍 곁들인 아침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와! 잘먹 겠습니다! 나는 기쁨에 넘쳐 인사를 한 뒤 커다란 식탁의 벽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 부부는 내 맞은 편에 앉았지만 식사는 하지 않았다. 팬케이크를 하나씩 입안에 욱여넣는 동안 두 사람은 예의바른 투로 잡담을 나누었다. 폴로서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남편쪽도 부인과 마찬 가지로 흠 잡을데 없이 단정해 보였다. 그는 미국 대형 항공사 조종사라고 자신을 소개 했는데, 그제야 집안이 다소 사치 스러워 보일 정도로 비싼 물건들로 꾸며진 이유를 알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 엔젤들은 '히피'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욕실에 대리석 바닥을 깔아 놓은 경우가 없었다. 그는 스루하이커들을 돕는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 했다. 부인이 내 컵에 오랜지 주스를 새로 따르고 황금빛으로 익은 팬케이크 여러장을 접시에 더 얹어 줬다. 그때 남편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죽은 뒤에 어떤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으십니까?"  방안에는 몇초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나는 메이폴 시럽이 든 플라스틱 통을 아주 천천히 식탁위에 내려 놓았다. 두 사람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남자는 나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주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선택 했나요?"  나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님께 이르는 일은 언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저희는 당신같은 여행자들이 하나님께 가는 올바른 길을 찾도록 돕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도 아마 흥미로울 겁니다."  남자가 말하며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의 팜플릿을 내 밀었다. "이건 어떤가요? '전향하고 회계'하라"  이후 10여분 동안 그는 팜플릿을 하나씩 내 눈앞에 들이밀며 선교에 열중했다. 식욕이 싹 가신 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끝내려고 애썼다.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체 트레일 엔젤을 가장한 이 독실한 기독교도들의 집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났다. 팜프렛 세개만 받아들고 그 집을 나오는데 성공했으니, 그나마 다행 이었다.


<2008년 11월 4일 낸터할라 아웃도어 센터 : 노스케롤라이나 >

AT 스루하이커들 중 대다수는 서른살 이하의 남자들이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 다시 말해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가족을 이루기 전에 도보여행을 떠난다. 두번째로 많은 연령대는 50대 이상이다. 이들은 생업을 일찌감치 마감해도 괜찮을 정도로 재정상태가 좋은 조기 퇴직자다. 여성의 비율은 네명중 한명꼴로 남성에 비해 적은 편이다. 마흔살 전후의 나이에 혼자 여행하는 여성인 나는 그중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였다. 내 나이 정도의 평균적인 미국 여성은 대부분의 독일 여성과 마찬가지로 직업이나 가족을 보살피는 데 집중한다. 오로지 걸어서 완주 하기 보다는 일정 구간을 히치하이크로 건너 뛰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 '노란 표시 따라가기'라고 부른다. '하얀 표시' 나무에 흰색으로 새견진 AT 표시를 따라 가는게 아니라, 노란색 차선을 따라 간다는 의미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스루하이커라고 불렀다.


그러나 마침내 나도 뜻이 맞는 여행자 들을 만나게 되었다. 크레커와 실버 포테이토는 조지아주 출신의 30대 중반쯤된 부부였다. 몇번이고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주인공 들이다. 우리는 벌써 눈이 내린 그레이트 스모커 산맥을 함깨 걸으며 정치토론에서 트레일 잡담에 이르기 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특이 하게도 아내인 크래커가 민주당 지지자 인데 반해 남편인 실버포테이토는 보수적인 공화당 지지자 였다. 그럼에도 염소수염을 기른 이 다부진 남자는 한겨울 같은 추운 날 아내와 커플록을 맞추기 위해 꺼리낌없이 랩스키트를 두르고 걸었다. "내일도 계속 걸을 거에요?"  크래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안걸어요. 내일은 제로 데이 거든요"  "하지만 두 사람은 조지아 주에 살잖아요. 집이 바로 코앞인데 빨리 종주를 끝내고 싶지 않아요?"  "천만에요, 성급하게 종주를 마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종주가 끝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요. 세집을 구하고 재취업 준비를 해야 하고, 돈을 벌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 해요."


실버 포테이토의 대답은 PCT를 마칠즈음 내가 누리던 기분과 똑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나는 독일로 돌아가 집과 일자리를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스프링어 산에 도착하면 트레일 종주는 끝나지만, 꿈을 찾는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AT를 완주한 뒤에는 곧장 오스트레일리아로 날아갈 예정 이었다. 나는 현재의 내 상황에 기뻐하며 잠시 침묵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는 내일 다시 출발할 거에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든 상관 없어요"  몇분 뒤 잠자리에 누운 나는 이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 옳은 생각 이었다고 확신 했다. 독일을 떠난 이래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 2008년 11월 13일 ~ 14일, 스프링어 산 : 조지아 >

트레일의 마지막 밤을 쥐가 득실거리는 스프링어 산의 커다란 산장에서 보냈다. 주요 출발시기인 연초가 되면 남쪽에서 출발하는 스루하이커들이 밀려들어 산장은 누울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빈다. 그러나 11월 중간인 지금 이곳에 묵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산장 앞에는 배낭걸이 장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 장대는 곰뿐 아니라 쥐들로 부터도 식량을 보호해 준다. 내 배낭이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쇠줄에 매달려 있는 동안 나는 산장안에서 태국식 깨국수로 AT 종주를 끝맺는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후식으로는 케러맬이 든 초코릿 한판이 준비 되어 있었다. 토에크의 선물이었다. 몇 주전에 그는 단것이 가득든 5kg 짜리 소포를 네덜랜드에서 이곳 트레일 까지 보내줬다. 식사를 마치고 침낭 속으로 들러간 뒤에도 나는 한참이나 깨어 있었다. 오늘 밤은 트레일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보통의 아침처럼 나는 동이 트기 한시간 전에 잠에서 깼다. 기온은 겨우 영상 5도였고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 특별한 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아껴뒀던 카시사 유기농 시리얼로 아침식사를 한 뒤 흠뻑 젓은 배낭을 밧줄에서 내려 짐을 챙겼다. 해가 뜰 무렵인 7시쯤에 나는 해발 1,150m의 스프링어 산 정상에 서 있었다. 바위에 박힌 금속판 하나가 이곳이 애팔레치아 트레일의 남쪽 종착점 임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늦가을의 황량한 풍경속에서 홀로서서 트레일을 마칠때 으례하는 의식을 시작했다. 신발만 제외하고 옷을 모두 벗어 버리자 차가운 부슬비에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사진 찍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휴대폰을 바위위에 세우고 타이머를 사용해 완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안개 때문에 부옇게 흐린 사진을 들여다 보고 닜으려니 PCT와 CDT가 떠올라 약간 침울해 졌다. 깃털 장식을 두르고 단체 사진을 찍은 PCT 완주 기념식이나 진지해서 더 우스광스러웠던 CDT에서의 대관식에서 처럼 여유로운 즐거움은 찾아볼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눈빛과 차분한 표정을 한 헝클어진 머리칼의 여자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배경의 안개가 우수에 젖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진을 30장 가량 찍고 나서야 옷을 입었다. 그리고 트레일의 방명록에 마지막 흔적을 남겼다.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일은 없었다. 열다섯 달에 걸친 12,700km의 종주를 끝맺는 순간이었다. 스루하이커로서의 삶에 정점을 찍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것이다. 기쁨의 환호성을 질러야 할 순간이 었으나 나는 느꼈던 감정 그대로였다. 걷고, 먹고, 자는 일, 이것이 이제 내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 Epilogur >

미국 장거리 하이킹 협회는 세개의 트레일을 완주한 내게 트리플 크라운을 수여 했다. 트리플 크라운은 글씨가 새겨진 황동에 나무틀을 두른 단순한 액자였다. 2008년 에는 100여 명이 조금 안되는 도보 여행자들이 공식적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받았다.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완주한 직후 나는 또 다시 트레킹을 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날아갔다. 그리고 동남 아시아를 거쳐 1년 반이 지나서야 독일로 돌아왔다. 이후 곧바로 다음 여행 계획에 돌입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아웃 백이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황무지와 플로리다, 애리조나, 서유럽과 남유럽 전체를 도보로 여행했다.이때 걸은 거리는 총 33,000km 였다. 무릎 관절의 마모를 예방하기 위해 도보여행 사이에는 자전거  여행을 끼워 넣었다. 자전거로 달린 거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 한국, 미국, 북유럽을 포함해 총 30,000km에 이른다. 이후에는 카누 여행을 시작했다. 유콘강, 미시시피강, 플로리다의 늪지대, 미네소타의 호수 , 스웨덴의 운하 등에서 노를 저으며 누빈 거리는 6,000km가 넘는다. 8년동안 나는 쉼없이 여행을 다녔다. 그러는 동안 스물 다섯 컬레의 신발을 교체했고, 0,5t의 초코릿을 먹어 치웠으며 2,000일 이상의 밤을 텐트에서 보냈다. 이것이 내가 8년 동안 걷고, 먹고, 잔 기록이다. 그리고 나는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여행을 즐기고 있다. 


이책의 번역자 '이지헤'씨는 숭실대학교 정치외교 학과를 졸업하고 하이델배르크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현제 독일에 거주하며 도시기획자및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그의 번역서는 『트리오 크리거』, 『씽거스 : 20세기를 창조한 12명의 지식 정복자들』, 『행복의 연금술』, 『문학과 미술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신데렐러와 카니발』, 『종교는 왜 멸망하지 않는가』, 『내 아이 때문에 미칠것 같은 50가지 순간』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했다. 나는 이책을 읽으며 번역책을 이렇게 우리의 정서에 맞게 우리의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한 책을 접하기는 처음이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일의 성공을, 누구는 사랑의 결실을 행복으로 여길수도 있을 것이다. 이책의 저자 '크리스티네'는 트레일 위에서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우러러 보였다.

모든 여행이 각각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꼭 필요한 것들만 지닌체 떠나는 트레일은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가득찬 멋이 담겨있는지 이책을 읽으며 또 한번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하는 곳까지 행복하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 만큼만 넘치지 말도록 지니고 걸어야 한다. 짐은 넘치지 않도록, 우리안에 행복은 가득 남치도록 그렇게 오늘도 우리 함께 이길을 걸어 가자."  - 손미나 작가의 추천사에서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