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법'
나는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다섯이고 내가 막내다.
막내니까 꽤 귀염 받고 자랐으려니, 생각할지 모르지만 웬걸,
좁게는 연년생, 멀찍이는 세 살 터울인 투박하고 거친 여섯 사내가
한 집안에서 지지고볶고 살아오면서, 나는 심하게 말하면
사지 육신 멀쩡하게 자란 것 자체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누가 우리 집에 대해 물으면, 나는 “우리 집 가훈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로 되묻는다. 상대가 멀뚱한 표정을 지으면,
“우리 집 가훈은 ‘까불면 맞는다’였단다.”로 대답해준다.
형제간에 엄격한 서열이 있었고, 그럼에도 다툼이 잦았으며,
서열 꼴찌인 나는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아직 어린 녀석’
취급을 받아 온 터로 다툼이 날 때마다 주인공이 되기는커녕
파편이 내 쪽으로 날아들지 않을까?
구석에 ‘처박혀’ 간이 콩알만 해진 채로 있어야 했다.
‘맞아터지지 않으려면’ 나는 조심조심 살아야 했다.
형들끼리 다툼의 조짐이 보이면, 재롱을 떨어서라도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일도 표 나게 해서는 곤란했다.
웃기는 얘기지만, 요즘도 사람 많은 회식 자리에서 누구보다
먼저 수저를 배치하는 내 버릇도 어릴 때부터 몸에 붙은 것이다.
또, 싱거운 소리로 좌중을 잘 웃기는 내 얄팍한 재능도 한 바탕
쟁투를 앞둔 집안의 험악한 분위기에 웃음을 퍼뜨려 내 숨 쉴 공간을
만들려 애쓴 오랜 습관 덕분에 얻어진 것이다.
부모님들은 부모님들대로 형제들을 힘겹게 키우시느라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셔서 막내인 나 차례에 와서는 “사고, 질병, 낙제만 아니면 된다”로 생각하셨다.
일류대, 출세, 고액 봉급, 이런 것들에 대한 부담을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었다.
키만 삐죽 크고 숫기가 없는 약골에 가깝긴 했으나, 사고뭉치는 아니었고,
낙제는 면하고 학교를 다녔으니 큰 근심은 안겨드리지 않았다 싶다.
형제가 많다보니 나보다 사고를 자주이거나, 대형으로 내는 형이 반드시 있었고,
또한 나보다 더 낙제에 가까운 형도 언제나 있었던 덕분이다.
대신, 나로서는 불만이 없지 않았다. 내가 부모의 관심밖,
사랑밖에 놓여 있다는 소외감이 그것이었다.
우리 세대 부모들은 벌어서 애들 공부시키기 바빠서 사실 자식들한테
애살스럽게 사랑이니 뭐니 하면서 키운 적이 없다. 요즘 사람들이 가족 간에,
부부 간에, 애인 간에, 친구 간에, 사제 간에 입에 달고 사는 그 ‘사랑’이란 것이
내게는 속 편한 음풍농월로밖에 안 보인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랑을 받을 줄도 줄 줄도 모른다! ......
나는 이렇게 마음 비뚤어진 채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왜 내가 사랑받지 못했을가, 어느날, 아마도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어느 해 겨울, 나는 넷째형을 따라 형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다.
혼자서 집을 찾아오겠다고 걸었는데, 하염없이 걸어도 허허벌판 이었다.
강 하구쯤인가에서 공사하던 인부들이 울면서 길을 헤매는 나를 붙들었다.
나는 주문처럼 우리 집 주소를 외었고, 인부 한 사람이 나를 업고 내가 말한 주소대로
묻고 물어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때 인부의 등에서 나던 공사판 철골 냄새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세 번이나 모퉁이를 도는
긴 골목길이었다. 인부는 그 골목길 끝에 있는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때 전에 없이 들뜨고 분주한 집안 분위기가 생각난다.
아버지 앞 작은 소반에는 포도주에 생강 절편, 가위로 꽃문양을 낸 구운 오징어,
잘 깎은 사과 들이 얹혔다. 나름대로는, 귀한 손님들에게만 내놓는 우리 집 접대용 주안상이었다.
그날의 귀한 손님은 바로 나를 업고 집에 데려온 인부였다.
인부는 그나마도 감지덕지했는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굽신거리며 아버지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애가 참 똑똑하다고, 주소를 또박또박 말해서 집을 잘 찾아올 수 있었다고 인부가 말했고,
아버지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다시 인부의 술잔을 채워주셨다. “--올시다” 하는
아버지의 독특한 어투도 여러 차례 발휘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탁월한 기억력’으로 집 주소를
기억해 ‘또렷한 발음’으로 말해서 살아서 집에 돌아온 나는 적어도 그날 하루만은
우리 집에서 참으로 귀하디 귀한 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집안 식구들이 모두 무관심해 하는 존재다.
이런 생각이 크게 도진 적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이었고, 휴일인가 그랬는데,
무슨 일인가로 심통이 난 나는 집에 점심식사가 차려지는 것을 보고 가출을 감행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내가 도망간 곳은, 이사 가서 살던 집에서 바로 이어진 학교 운동장이었다.
당시 야구부 명성이 높았는데, 야구부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나절을 버텨냈다.
결과는 빤했다. 여러 형들의 수색작전은 간단히 끝났고, 집으로 끌려온 나는 밤에 세면장에서
아버지한테 종아리를 늘씬하게 맞아야 했다. 그때 내 종아리가 좀 부어올랐겠기로서니
그걸 어찌 사랑의 매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세대는 대부분 ‘사랑하는 내 아들’이니 뭐니, 이런 말을 부모로부터 듣고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표현도 서툴뿐더러, 그런 말, 그런 표현을 할 겨를도 없었고, 그럴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리 있겠으며, 정상적인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리 있을까.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걸 빌미로 우리는 어쩌면 먹이에 굶주린 짐승들처럼 지나치게 ‘사랑하라’고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닐까.
이쯤해서 내 아버지의 사랑법을 또 하나 소개해 볼까 한다.
대학 입시 때 나는 요행히 예비고사(요즘의 수능시험)만 합격하면 바라던 대학에 본고사
무시험입학 장학생으로 내정돼 있었다. 예비고사 합격자 발표 날 낮,
밖에 계신 아버지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게 물으셨다. “어떻게 됐나?”
“됐습니다!” 합격했다는 내 대답도 그리 호들갑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응답은
더욱 그러하셨다. “알았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래도 누가 우리 아버지를 자식 사랑이 없었던 분이라 할 수 있으랴!
- '박덕규님의 수필'이다. -
이 수필 한편을 읽고 있으면, 나의 지난날의 그림자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6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나서 애지중지하는 사랑은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이야길 읽으며,
형제간에 애틋한 우애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도 없이 자랐다고 말 하고 있으나, 그의
어린 시절이 결코 매마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아가게
하는 진솔한 수필 이 한편에는 삶의 애환과 가족이라는 한 사람의 개체로 가정 속에서 일
어나는 감정과 공유의 삶 속에 서로가 느끼고 의지하는 가족애가 스며있음을 느끼게 한다.
수필은 이와 같이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하게 부분과 전체를 아우러며 부모와 형제
간에 관계와 거리감, 그리고 서로의 역할을 하면서 재미있었던 감정과 아픔의 이야기를 솔
직하게 들려 주므로 그 이야기에 공감을 이끌어 내어 들어내 놓고 좋았던 점과 나빳던 점,
그리고 서로의 역할에서 시행과 결과에 대한 잘 잘못을 들어내어 읽는 독자와 소통하는 그
사유의 과정과 결과에 공감을 이끄러 내어 삶의 애환을 나누는 한편의 수필은 시 보다는
길고 다른 장르의 글 보다는 짧은 가벼운 글이다. '아버지의 사랑 법'에서 부모와 형제간에
사소한 것들이 내가 성장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영양제가 되어주었다.
'지평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수의 일상 - 89. <겨울 공화국> (0) | 2021.01.26 |
---|---|
백수의 일상 - 88. <동백꽃이 아름다운 이유> (0) | 2021.01.25 |
백수의 일상 - 86.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0) | 2021.01.23 |
백수의 일상 - 85. <언어의 온도> (0) | 2021.01.22 |
백수의 일상 - 84. <말의 품격> (0) | 2021.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