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99.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paxlee 2021. 2. 8. 12:23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먼저 서구 문화와 근대사상을 익힌

인물이었다. 모스크바대학과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어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독일로 건너가

서구 문물을 접했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내무성 관리로 일하다 전업작가로 변신한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는 물론 서유럽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중편소설 '첫사랑'에

대해 "소설이라기보다는 내 자신의 과거"라고고백한 적이 있었다. 고백처럼 그에게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이 실제로 있었다.

 

이 소설은 이반 투르게네프가 조금의 윤색도 가하지 않은 실제 이야기라고 말한 자서전적 소설

이다. 주인공 페트로비치는 투르게네프라고 믿어도 될듯하다. 그런데 그의 어릴 적 어머니는 아들

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연인 간의 사랑(eros)은 아니더라도 본래 남자아이는 태어나서 어머니와 첫사랑을 하고 아버지와

연적이 된다.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빼앗기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어머니가 일직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선망의 대상이며 동시에 연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빼앗을 여성이 없으며, 아버지로부터 지킬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열렬히 사랑을 갈망한다. 그의 피는 애당초 받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늘

사랑의 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첫사랑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은 옆집으로 이사 온 '지나이다'이다. 그는 당연히 준비된 만큼 빠르게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와의 사랑의 연적이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페트로비치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 일은 1833년 여름에 일어났다.(중략)

나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되었다. 내 고통은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소년 블라지미르의 옆집에 스물한 살 먹은 매혹적인 여인 지나이다가 이사를 왔다.

블라지미르는 난생 처음 강렬한 사랑을 느낀다. 적극적인 기질을 지닌 지나이다는주변의

뭇 남성들을 휘어잡는 대가 센 여인이다. 블라지미르는 지나이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국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어느 날 밤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블라지미르는 복수를 위해 칼을 차고 연적을

기다린다. 그날 밤 나타난 연적은 뜻밖에도 블라지미르의 아버지였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블라지미르는 서서히 첫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난다.

 

"그녀 앞에 서면 나는 뜨거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불태우며 녹여버리는 그 불이

도대체 어떤 불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나로서는 불타며 녹아버리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짜리 19세기 소년에게 사랑에 대한 사전 지식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나 드라마를 통해, 혹은 흘러다니는 정보를 통해 어린 나이에도 사랑에 관한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이 소년에게 찾아온 변화는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대사건이었다. 소설은 그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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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 보고 느낀 사실을 성장과정에 사랑에

대한 감수성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19세기 러시아 중년의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평범

하지 않았던 자신의 소년시절을 회상하며 들려주는 <첫사랑>은 당혹스럽울 만큼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고결하게 느겨진다.

 

이 소설은 자정을 넘긴 시각,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서로의 첫사랑에 대해 물어보며 시작한다.

그들 중,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첫사랑은 평범하지 않아 그것을 노트에 적어서

읽어주겠다고 한다. 두 주일 후, 페트로비치가 읽어주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아니라 어지럽고 복잡한 어른의 사랑이다.

 

21살의 지나이다는 예쁘다. 내 친구는 농담 삼아 술만 마시면 여자는 고시 3개 패스한 것보다 얼굴

예쁜 게 낫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남자건 여자건 외모가 출중한 건 타고난 복이자 불운일 수도 있다.

소설 속의 지나이다는 예쁘지만, 몰락한 집안의 딸이다. 당시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이 경제적

으로 자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남성을 고를 권리와 의무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어린 패트로비치 보다 어른 남자의 사랑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나이다에 접근한

남성들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보다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접근 하였다.

 

몇몇의 남성과 지나이다의 사랑놀음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소년에게 좋지 못한 경험이 된다. 또한

그녀의 사랑 역시 소년에게 좋지 못하다. 소년 자신도 자신에게 충고를 해주는 남성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진 소년은 지나이다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을 둘어싸고 있는

감정의 노예가 된다.

 

사랑을 돈으로 사려는 남자들,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는 여자, 사랑을 동반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사랑을 느끼는 남자, 아버지의 외도를 편지로 어머니께 고발한 남자를 보며 페트로비치는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순수하고 깨끗했는지 모르나 그가 깨닫게 된 첫사랑의

본질은 폭력과 소음, 무질서, 쾌락, 기만, 질투와 소유욕 등의 미묘한 감정들이었다.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외도는 사랑의 본질을 더 여과 없이 보여준다.

 

아버지가 코트의 앞깃에서 먼지를 털어내던 채찍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팔꿈치까지 소매가 올라간

지나이다 팔을 날카롭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지나이다는 몸을 떨고는 말없이 나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입술로 가져가

붉어진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p. 145

 

페트로비치는 아버지의 외도를, 아버지가 지나이다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그녀는 그것에 분개하기

보다는 입술로 받아들이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소년은 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를 때리고,

그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지나이다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자신만의 폭력을 가했던 것이다. 사랑에는 가학성이 존재한다. 그것이 겉으로 구분되지는

않지만, 사랑은 가학적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것 역시 사랑의 오묘한 성질이다. 소년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의식하며 성인들의 사랑에 대해 알아간다. 시간이 흘러 지나이다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게 된다.

 

첫사랑은 특별하다. 가장 바보같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우연히 지나이다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이야기를 듣는다. 다시는 그때로 돌라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사랑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페트로비치에게 첫사랑은 강한 뇌우처럼 금세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첫사랑에 대한 환상에

젖어 여전히 첫사랑을 갈구하는 것보다는 그 첫사랑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젠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는 첫사랑. 나는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고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가? 고민해 보아야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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