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112. <고향 친구 - 4.>

paxlee 2021. 2. 26. 06:13

부여 낙화암 아래 백마강 배를 타기 전에 함께한 친구들

 

인간은 하루 하루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 늙은이의 귀소 본능이 고향을 향한다.

고향은 그리움의 창고이고, 추억의 창고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며 함께 한 사람을 고향친구라 한다.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고향 친구이다.

고향 친구는 많지 않다. 벌써 이 세상이 싫다고 먼저간 친구가 있다.

하나, 둘, 셋 고향친구 세 사람이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내가 싫어서 먼저 가지는 않았겠지만, 지금도 그 친구가 그립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참으로 어렵게 힘들게 살았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어린시절 이지만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때는 몰랐는데, 요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친구는

그때 식량이 부족하여 굶고 살았노라고 말하는 친구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움울 전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보리밥은 죽어도 않먹는다고 말한다.

 

나의 친구들은 일제 강점기 막바지 해방 5년전 가까이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부모님들께서 가장 많이 굶주리고 핏박을 받으며 살던 시대이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닐때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포화가 굉음을 내면서 불꽃이 팅겨오르고 땅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피난을 갔는데, 미쳐 가는 길에 빨갱이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우리와 얼굴이 같고 같은 말을 사용했다. 군복이 다를 뿐이었다.

 

그때는 전쟁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왜 총칼로 싸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북한군이 지배하는 세상도 별로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와 같은 어린이에는 별다른 제재가 없었고 못 느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데, 어느날 미군들이 들이 닥쳤다.

땡크를 앞세우고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던저주고는 하였다. 그게 무엇인가 맛도 모르고 받아 먹었다.

 

하루는 미군 몇명이 동네에 들어 왔다. 동네 사람들이 닭을 잡아 대접을 하였다.

그런데 무엇을 달라고 하는데, 무슨말을 하는지 몰라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면서

열심히 말하고 듣기는 하였는데, 영어를 할수 있는 사람이 없어 소통이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미군 하나가 일본말로 소금을 요구하여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이 소금을 가져다 주면서 언어의 소통이 이렇게 절실한 것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그 미군이 제2차대전 후 일본에 주둔해 있다가 한국에 파견되어서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겪으며 일본 말을 쓰고 배우는 과정을 거쳤다.

3년간의 전쟁은 삶을 페허로 만들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다음 그런대로

삶이 안정이 되어갔다. 그후 공화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은 또 한번 뒤죽박죽이 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다 보니 농사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힘들어만 갔다.

 

그후 세상이 조금 안정 되어가는 것 같았는데, 정치의 회오리는 끝내

군사혁명을 불러오고 말았다. 혁명은 언제나 어느 나라에나 일어나지만,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궁극적인 목적이 불러오는 사회현상의 한 부분이다.

군사혁명이 우리들의 삶을 더 많은 제한과 금지, 그리고 기본권 마져 금지하였다.

군사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이 불같이 일어났지만, 군인들의 총칼앞에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군이 장악한 국가의 앞날이 그때는 암담하게 느껴졌다. 통금을 실시하고, 장발을 단속하고,

미니 스커트를 금지하고, 군에 가지않은 기피자를 색출하여 군대에 보냈다.

군사 혁명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해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군사혁명은 혁명공약을 발표하여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면 군인은

군의 본연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혁명의 지도자 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을 일으킨 본연의 의무를 다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가 경제계획 5개년 계혁을 세워 먼저 경부고속도로를 뚫는 일을 시작하였다.

유사이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의 결과가

경제5개년 계획이 끝나고, 그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여 두번째 경제 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계혁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 하였다. 한국전쟁 후 가난에 찌들린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게

되면서 우리의 삶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 되어 갔다. 오늘의 우리삶이 이 만큼 향상되고

나라의 기틀이 튼튼해 진 것은 박정희 장군의 철학에서 탄생한 결과이다.

 

혁명은 어느 시대에나 발생할수 있다. 우리와 세계 역사를 바라보면 혁명중에 혁명은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은 성공하면 혁명이 되지만,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세상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박정희장군도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이 그의 정치적 결과로 나타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민소득 몇 십불의 나라 경제를 국민소득 만불까지 끌러 올리는데 올인하면서 노력한

그의 저력의 결과다. 그가 잘못한 것은 질타를 하드라도 우리의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결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경제적인 노력의 결과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서독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숨통을 트게 하고, 월남전에 참전하는 댓가로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것은

어쩔수 없는 그때의 현실이기에 눈물겨운 일이 되었지만, 대가없는 풍요는 기대할수 없기에 주어진 현실을

극복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다. 고통과 시련없는 삶은 허상이 되듯이 삶은 언제나 정의로운 길을 가야 한다.

새종대왕도 두분 형님을 뛰어넘어 왕위에 오른 것이 늘 죄송하여 무엇인가 형님을 위로하고 보다 낳은 정치를

하기위한 노력이 언제나 살아잇었기 때문에 우리의 글 한글을 창제 하였으며, 국민에게 편안함을 누리도록

성군이 될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씨조선이 무능과 부패로 무너지고, 일본의 식민지로 강점이 되고,

세계제2차대전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남북이 갈려 두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전쟁의 발발. 4.19혁명, 5.16

혁명, 민주화 운동, 군사 정권의 연장, 민정이양이 이루어 지기까지 민주화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무딜대로 무디어 진 정신세계를 바로 잡기까지 숫한 우여곡절과 고통의 심연의 나락으로 빠지기도

하였고, 정권이 바귀고 바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고 자부를 하여 보지만, 오늘의 정치는 또 다시 암담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오늘의 정치는 미래를 위한 정치가 아니고, 과거에 파묻혀 허우적이는 미련하고 둔한

곰탱이들이 펼치는 이 정부는 국민을 위한다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쓰고 자기 집단 무리를 위한 정치에 빠져있다.

 

지금까지 민주주의 정치 형태가 가장 발전된 정치제도라고 배우고 알고 있는데, 민주주의의 허울을 쓰고 자행하는

오늘의 우리 정부의 지도자는 앞날의 정치 플랜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거의 잘못을 캐면서 자기들이 하는 행동과

말과 제도는 역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다는 가

면을 쓰고 자기들의 안위만 생각하고 진행하는 정치행태는 참으로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무리를 지어 반대하는 사

안은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자기자신들이 임명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쫓아내지 못하여 안달하는 형태

를 보여주고 있다. 선거결과로 탄생한 다수당 1당 독제는 자기에게 불리하면 법을 만들어 정당화 하는 것이 민주주

의를 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백수의 인생을 사는 우리는 이제 삶의 종점을 향해 가고 있으니 아무래도 괜찮다고 쉽게 말할수 있으나, 우리들의

아들 딸들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 심히 걱정이 되고 많이 불안하다. 우리들의 세대를 세상은 '초롱불

세대'라고 부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석유에 불을 붙어 사용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우물 세대'라고

부른다. 마을마다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다. '고무신 세대' 모두가 까만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나중에 흰 고무신이

나오기는 하였다. 또 '측간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장실을 집 밖에 한쪽에 있어 화장실을 측간이라 불렀다.

'가마솥 세대'라는 말도 있다. 지금같이 전기가 없어 가마솥에 나무를 태워 밥을 지어 먹었다. '보자기 세대'라는 말은

초등학교에 다닐때 책 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둘러매고 다닌세대를 말한다. 그리고 '주판 세대'가 있다.

계산하는 틀이 주판밖에 없어서 모든 계산은 주판이 담당을 하였다. 그때는 주판을 배우는 학원이 성행 하였다.

 

우리와 같은 백수의 세대는 이렇게 살았다. 그때는 가정마다 식구들이 지금 보다 많아서 방 하나에 많은 식구들이 함

께 이용을 하였다. 그때는 한집에 3대가 사는 것은 보통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형제들이

한집에서 삼촌과 고모가 같이 사는 형태였으니 어느 집이나 대가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나 아니면 둘인 자

식이 전부이고 집집마다 핵가족 세대를 이루고 있으며,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정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결혼

년령은 갈수록 높아지고,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 지면서 출생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출생율이

사망율보다 떨어져 인구 감소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들의 삶은 정말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지향하게 될것이라는 점이 백수의 삶을 위축 시키고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 시대가 끝이 나도 옛날같은 세상은 멀어질 것 이라는 예상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한다. 우리는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앞날이 어둡고 캄캄하다.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공주, 부여를 여행 하면서 나태주 시인과 함께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