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백수의 일상 - 128. <내가 본 희망과 절망>

paxlee 2021. 3. 18. 06:37

셰익스피어와 사냥꾼, 그리고 노루.

 

봄이다. 들판이 눈을 비비며 깨어난다. 내 안에서 고개 드는 무수한 질문이 일제히 풀처럼 일어선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행동을 보면 대체로 둘로 나뉜다. 어떤 일을 할 때, 너무 신중하게

이리저리 재다 중요한 시기 다 놓치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거다!’

하고 목표를 정하면 화살촉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듯, 무작정 덤벼 다된 일을

눈앞에서 그르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같이 극단적 우유부단함을 갖고

살거나, 극단적 저돌성을 갖고 살아간다. 인간의 이런 특징을 아주

잘 비유한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는 인간을 대표적으로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흥미롭게 나누었다.

 

햄릿형 인간은 생각이 너무 많아 탈이다. 신속히 선택해야 하는 지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돈다. 생각만 하다 날 새는 것이다. [사진 pixabay]

 

둘 다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 중에서도 '햄릿형' 인간은 생각이 너무 많아 탈이다.

신속히 선택해야 하는 지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돈다. 생각만 하다

날 새는 것이다.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면서 세상 고민 혼자 떠안은 듯 고뇌에 빠진다. 자신의 내면이 하는 말을

들어보려 애쓰지만 진짜 필요한 실행은 그 후로도 오래 걸렸다.

나의 엄마는 무학이지만 맛깔난 이야기꾼이고 달변가다. 몇 년 전, 엄마가 들려주셨던 노루와 사냥꾼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나의 아들은, 잊을 만하면 그때 우리 기억 속으로 뛰어든

노루와 사냥꾼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 주변을 웃게 한다.

옛날 어느 깊은 산중에 나무를 베어 장에 내다 파는 나무꾼이 있었다. 어느 날 등짐을 지고 손에는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산에서 내려가다 낮잠 자는 노루를 발견해 몹시 기뻐했다. 기분이 한껏 들뜬 사냥꾼은

다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 나무 뒤에 숨어 쭈그리고 앉았다. 이때 사냥꾼은 커다란

노루를 보며 온갖 상상을 했다.

“가만있자, 내 오늘 저 커다란 노루 놈을 딱 잡으면 지게에 싣고 곧바로 저잣거리에 나가 저 고기를 다 팔아

돈을 벌어야지. 저 노루 고기를 팔아 큰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널따란 기와집 한 채를 지어야지. 넓은

집을 다 짓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하지? 옳거니! 참한 색시 하나 구해 장가를 들자…. 허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삼삼하군 그려. 그런데 가만있자. 암만 생각해도 집이 너무 넓은데 이것을

어찌한다? 그렇지! 그러면 양귀비처럼 아주 예쁜 첩을 하나 더 들여야지. 그리고… 음, 옳거니!

저 노루 놈의 멋진 등가죽도 벗겨 팔아 돈을 만들자. 그리고 가죽을 조금 남겨 내 조강지처와 보기만 해도

애교 넘치는 첩실에게 예쁘고 고운 쌈지를 만들어주면 아주 좋아하겠지?”

 

새해가 시작되고 어느새 3월 중순이다. 연초에 세운 계획이나 꿈 또는 어떤 목표는 지금 잘 진행되고 있는가.

설마, 노루는 잡지 않고 쌈지부터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 unsplash]


사냥꾼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커다란 노루는 몇 걸음 밖 사냥꾼의 속마음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잘도 잔다.

그러다 갑자기 나무 뒤에 숨었던 사냥꾼 표정이 몹시 심각해진다.

“가만있자, 그런데 만약 한집에서 두 마누라들이 서로 머리 잡고 시샘하고 싸우면? 이 일을 어쩐다지? 에라,

어쩌긴 뭘 어째. 아주 서로 싸움질만 해봐라! 내가 이 지게작대기로 그냥! 콱!”

하면서 사냥꾼은 있는 힘껏 지게작대기로 땅 바닥을 탁!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라 잠이 깬 커다란 노루는

그만 사냥꾼 코앞에서 겅중겅중 산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사냥꾼은, 눈앞에 잠든 노루는 잡을

생각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다. 노루를 잡기도 전에 그 고기를 벌써 다 팔아

기와집 짓고, 장가들고, 두 부인을 얻는 상상까지 한다. 결국 첩과 본처가

서로 다투는 상상까지 한 나무꾼. 본인이 흥분해 내려친 지게

작대기 소리에 놀란 노루 잡을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내겐 아들이 하나 있다. 녀석은 한창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속담 하나를 즐겨 쓴다. 그것은 바로

‘노루는 잡지 않고 쌈지부터 짓는다’라는 말이다. 녀석은, 이 속담이 딱 들어맞을 상황을 어찌

그리 잘 포착하는지. 우리는 가끔 녀석이 쏟아놓는 속담에 모두가 시원하게 웃는다.

새해가 시작되고 어느새 3월 중순이다. 연초에 그대가 세운 계획이나 꿈 또는 어떤 목표는 지금 잘

진행되고 있는가. 설마, 노루는 잡지 않고 쌈지부터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 달 늦었

지만 어떤가. 이제라도 다시 그 멈췄던 계획을 하루하루 실천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 글 : 김명희 시인·소설가 중앙일보 2021.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