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독(路毒). - 이문재 -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부리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노독(路毒). 옛날에는 짚신 신고 한양에 과거 보러갈 때엔
노독을 풀 수가 있었다. 문경 새재 주막에서 하룻밤 자면서 여독을 풀었다.
내가 살아 온 길을 뒤돌아 본다. 정신없이 걸어 왔다.
이 길이 과연 내 길이었는가? 지금 분명히 내 몸과 마음에
노독은 생겨 있는데, 풀 시간도 없고 풀 길도 마땅치 않다.
가는 길이 아득할뿐이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희미하나마 뭔가 노독을 풀 길이 보인다.
먼저, 가던 길 어두워 그만 내려서야 할 그 때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안다 해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점이다.
그건 내 인생의 운명이다.
다음, 앞으로도 이 시의 방아쇠인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를 아주 교과서적으로 받아 들여서
“앞으로는 마음 속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 장석주 시인의 감상문
오래 전 읽은 시인데,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릿해진다.
여수(旅愁)의 멜랑콜리가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 때문이겠죠.
길 위에 있는 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제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요.
더러는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더 올리기도 하겠죠. 하지만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에는
감형(減刑)이 없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여독(旅毒) 품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니까요!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한때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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