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백수의 일상 - 188. <노독(路毒)>

paxlee 2021. 5. 30. 17:39

노독(路毒). - 이문재 -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부리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로독(路毒)이니, 쉬어라.

 

노독(路毒). 옛날에는 짚신 신고 한양에 과거 보러갈 때엔

노독을 풀 수가 있었다. 문경 새재 주막에서 하룻밤 자면서 여독을 풀었다.

 

내가 살아 온 길을 뒤돌아 본다. 정신없이 걸어 왔다.

이 길이 과연 내 길이었는가? 지금 분명히 내 몸과 마음에

노독은 생겨 있는데, 풀 시간도 없고 풀 길도 마땅치 않다.

가는 길이 아득할뿐이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희미하나마 뭔가 노독을 풀 길이 보인다.

 

먼저, 가던 길 어두워 그만 내려서야 할 그 때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안다 해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점이다.

그건 내 인생의 운명이다.

 

다음, 앞으로도 이 시의 방아쇠인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를 아주 교과서적으로 받아 들여서

“앞으로는 마음 속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 장석주 시인의 감상문

 

오래 전 읽은 시인데,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릿해진다.

여수(旅愁)의 멜랑콜리가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 때문이겠죠.

길 위에 있는 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제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요.

 

더러는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더 올리기도 하겠죠. 하지만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에는

감형(減刑)이 없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여독(旅毒) 품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니까요!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한때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