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백수의 일상 - 225. <인간은 왜 이렇게 욕심이 끊임없이 많을까? >

paxlee 2021. 7. 30. 07:12

인간은 왜 이렇게 욕심이 끊임없이 많을까? 

 

 

 욕구 또는 욕망은 생물이 어떠한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감정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느낌이

강하다. 시민 윤리에서는 적절한 정도의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이지만, 과도한 욕망은 주변인에

게 피해를 입히며, 자신 또한 망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는 바로 요구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채워주세요'는 무제약적 요구라고 할수있다.

 

요구는 지속되고 충족될수록 '결핍'이 생기게 된다. 욕구의 궁극적 목적은 무제약적 사랑이다. 욕구가 충족 후

에도 점점 커지는 욕구는 불일치와 결핍하게 되고, 인간이 언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욕망은 타자가 있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안에 주체의 욕망은 사라지

게된다. 우리가 존재의 의미들이 따로 남아 있지만 타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존재가 늘 살아있다.

 

인간이 항상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를 번역된 표현으로 하지 못할 때 결핍을 느끼는 상징계는 바로 인간이 불안해하는 이유이다. 현대 소비사

회에는 존재가 아닌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욕망을 갈망한다. 내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 바꾸고, 타자로

부터 인정받기 바라며 타자의 왜 욕망을 내 욕망으로 타자의 욕망을 쫓을수록 자신을 잃게 되어있다. 하지만

타자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될 수가 없다. 타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타자의 욕망은 소멸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원인은 욕망을 소외시키게 된다. 욕망의 윤리, 거짓 욕망을 조장하는 소비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오인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나치게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게 되면 자신의 욕망이라 착각하면서 죽음에 이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타자의 욕망이 지나치게 커졌을 때 인간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속박시키게 되고 소외시키고 파탄시키게 된다. 언어를 번역된 표현으로 하지 못할 때 결핍을 느끼는 상징계는 바로 인간이 불안해하는

이유이다.

 

욕심과 타자의 욕망과 존재에 회복에 대한 열정

욕망은 존재와 회복에 대한 열정이다. 욕망 본질을 제대로 이해해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욕망은 쾌락보다

좋은 타인의 인정과 순수 욕망과 타자 욕망이 공존한다. 그러나 인정은 욕망의 본질이 아니다. 라캉이 제시한

순수 욕망은 나의 존재란 것이 사회와 관계하겠지만 존재의 회복을 지향하는 욕망으로 사회를 버리고 존재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자의 욕망을 통해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심리와 숨겨져 있는 진짜 욕망의 본성이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소외되는 부분을 찾아나가는 노력과 개인의 회복과 연관된 존재의 회복이 반드시 필요

하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존중을 받는 개개인에 대한 욕망은 존중을 해줘야

한다. 인정의 욕망은 욕망의 절대적인 목표는 아니다. 존재의 회복, 나의 삶 자체를 회복해야 한다. 존재 상실의

시대에 욕망을 통한 존재 회복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욕망은 나의 존재의 표현이다. 타인과 언어가 없다면 욕

망은 존재할수 없다.

 

욕망의 세 영역

 

1. 상상계
 상상계는 자아가 형성되는 유아기를 말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은 완벽하게 다가오지만 현실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는 아이 정도이다. 아이는 현실의 불완전한 몸과 거울 속의 완벽

하고 이상적인 자기 몸 사이에서 분열 이미지를 처음 보게 된다. 현실과 거울 속 이미지의 간극에 당황하게 된

다. 욕망의 대상과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불완전한 정체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자아분열을 하게 되는 것이다.   [

 

* 나르시시즘 (자기도취): 거울 속에 비친 자기에서 오는 착각과 오인, 기만의 영역을 말한다.

2. 상징계
 상징계는 이미 구성된 세계이다. 언어 자체라기보다는 언어 구조에 기초해 구성된 모든 상징, 문화, 문명, 주체

가 태어나는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동성의 부모에게 적대심을 느끼고 이성의 부모를 사랑하는 이성

의 심리이다. 주체가 상징계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와 하나'라고 어린아이는 생각한다. 즉, 어머니의 욕망과 동일

화를 이루는 단계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등장으로 상상과 자아를 분리하게 된다. 아버지의 법과 언어로 대표되

는 사회적 질서나 규칙, 타자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의 주체를 일치시켜 나간다.

* 인정 욕망은 남의 인정을 구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 타자는 존재와 주체의 욕망을 인정해주는 사람이다.

존재(주체)와 의미(타자)는 타자에 의해 존재의 위치와 의미가 부여될 때 무의미에서 의미가 된다.
언어라는 것은 주체로서 구성하고 표현하고 욕망을 지속시키거나 소외시켜준다.
각각 역할이 주어진 '장기'의 말들처럼 언어 또한 정해진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아는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며, 주체는 타자의 규칙을 수용하고 객관적이다.
인간은 정해진 언어 규칙을 통해 타자와 소통한다. 언어의 우월성은 법적인 가치를 지닌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선택과 주체가 되어야 욕망이 시작하게 된다.


3. 실재계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이면서 둘 다 포괄하는 영역이다.
아래 예시로 사과는 똑같은 사과이지만 다 다르다.


- '아담과 하와'의 사과는 인간의 죄와 죽음 상징한다.
- 그리스 신화 '파리스의 심판'의 사과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는 불화, 질투 상징한다.
- 아이작 뉴턴의 사과는 만유인력 법칙. 과학과 이성을 상징한다.


실재계는 이처럼 전체를 다 담아낼 수 없는 원초적인 차원과 상징화를 요구하는 근거, '도'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덕경 1장>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이면서 둘 다 포괄하는 영역이라고 했었지만, 실재계는 우리의 영역에는

없다. 없는 이유는 언어가 존재를 표현할 때 언어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징계의 영역이다. 상징계에 의해서 배제

되지만 계속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욕망을 지속시키는 원인은 실재계이다. 실재계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계까지로의 욕망을 갈구하는 무한반복을 하면서 욕망을 계속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실재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욕망의 반복은 욕망의 불가능성 때문이다. 잃어버린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기호적, 언어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자연적, 생물학적인 욕망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고 인간의 본성이 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