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292.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paxlee 2021. 12. 2. 08:26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황혼은 완성의 시간인가, 또 다른 사춘기인가?”

오늘날의 50대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생아와 닮았다. 300여 년 전에는 유럽인의 평균 수명이 30세 남짓이었으니, 둘 다 평균 수명이 30년 정도 남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1922년, 마르셀 프루스트가 공쿠르상을 받은 다음 날 신문에는 ‘나이 든 이에게 자리를!’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고작 48세였다. 요즘 누가 48세를 나이 든 사람으로 쳐줄까? 예전에는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들 했지만 요즘은 ‘50이면 오춘기’가 찾아온다.


이제껏 인류사에서 그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긴 수명을 훨씬 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나이’란 이전보다는 덜 절대적인 숫자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나이가 되면 이래야 한다’라며 구시대의 성장 서사를 스스로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인생 지침들이 점점 힘을 잃는 가운데, 케케묵은 성장소설 대신 탈 성장소설의 서사를 써보자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지성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를 제안한다.

 

20대 까지는 한해, 두해 나이를 먹는 것을 체감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30대부터는 숫자에 조금씩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서류에 나이를 기재할 일이 있거나, 누군가 나이를 묻는 상황이 생기면 꼭 나이를 세어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이 책에서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제안한다. 그는 50세 이후,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아직은 욕구가 들끓는 중간 시기에 대해 살펴본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실 50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로 짧아지기 시작한다. 생이 짧아지면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고, 남아 있는 나날 동안 후회되는 부분을 바로잡거나 잘한 부분을 오래 유지하려고 애쓰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삶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황혼은 완성의 시간인가, 또 다른 사춘기인가.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포기, 자리, 루틴, 시간, 욕망, 사랑, 기회, 한계, 죽음, 영원’이라는 10가지 주제를 통해 새로운 황혼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파스칼, 몽테뉴, 프로이트, 니체 등 풍부한 인용과 문학적인 이야기 솜씨로 유려한 사유를 보여준다. 그는 어떠한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기 능력을 시험하라고,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하게 마련이니 루틴으로 생활의 뼈대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지금을 누리라고, 헛된 희망에 흔들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라고, 일이 내 뜻대로 닥치기를 바라지 말고 늘 최악에 대비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1800년대에 30~35세였는데, 1900년대에는 45~50세가 되었고, 현재는 1년에 세 달 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껏 인류사에서 그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긴 수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래 살고 싶다기 보다,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어느 순간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현명하고, 충만하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와 설렘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30세까지 자기는 늙지도 않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느낀다. 그에게 생일은 재미있는 형식상의 절차, 무해한 표시일 뿐이다. 그다음부터는 10년 단위로 30대, 40대, 50대가 이어진다. 늙는다는 것은 달력 속으로 편입되는 것,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이는 세월을 공감하게 하지만 세월을 비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공통의 조건으로 한데 묶이고 그대로 휘둘리는 신세는 서글프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내가 꼭 그 나이인 것은 아니다. 서류상의 내 나이와 스스로 느끼는 내 나이 사이의 간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시대에는 이 간극이 너무 크다. - p14~15.

이제 원숙기와 노년기 사이에 새로운 인구층이 나타났다. 라틴어를 따서 ‘시니어(senior)라고 부를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나머지 인구보다 가진 것이 많은 세대다. 이 시기에는 애들도 다 키웠겠다, 부부의 의무를 마감하고 이혼이나 재혼을 택하는 사람이 특히 많다. 이러한 변화가 서양 사회에만 퍼진 것은 아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도 출산율 저하와 인구 고령화가 진행 중인데 이러한 상태의 물질적 조건들은 미처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고 있다. - p2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어느 연령층이 전부 일을 하지 않는 것, 즉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게 된 것은 최선의 의도가 빚어낸 재앙이다. 경험치와 통찰력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두터워진다. 노인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새로운 일을 찾으면, 관계를 되찾고 봉사활동을 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활동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노인들을 빨리 꺼져야 할 기생충처럼 바라보는 편견도 사라질 것이다. - p47.

인생은 작은 글씨로 쓰는 아주 긴 편지다. 생의 횡단은 때때로 위험하기 그지없으나 참으로 근사하다. 볼테르에 앞서 관용(tol?rance)을 사유했던 프랑스의 사상가 피에르 베일은 “의식이 방황할 권리”를 주장했다. 어떤 진리, 어떤 신앙을 강요당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수도 해보고 자기 판단을 돌아볼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모두 방황하는 영혼이며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자꾸 옆걸음질하고 경치 좋은 우회로로 빠지기도 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끝을 향해 나아간다. 인생의 내리막길은 오르막길처럼 가야 한다. - p123~124.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으로써 상대에게 매일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삶의 낙을 맛보고, 하루하루를 허무에서 건져내고, 일상의 지지부진한 모습을 바꿔 놓으려면 우선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지 않은 삶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하고 걸어온 삶에 대하여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대화의 시간이 줄어든다. 가족과 친구와 더 많은 대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이 들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쌓여간다. 건강한 삶은 꾸준히 걷기와 대화를 위한 친구가 필요하다.  

 

문학과 철학, 대중문화 등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유려한 문체로 사유를 풀어내는 저자의 농익은 필력 덕분에 읽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저자는 모파상, 프로스트, 사르트르, 몽테뉴, 세네카 등 다양한 레퍼런스를 직조하여 ‘나이듦’에 관한 빛나는 통찰을 숙성시킨다. 의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미래의 불확실성은 17세기보다 더 나아지지 않았고 매일매일의 덧없음조차 조금도 줄여주지 못했다. 인생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더 오래 불안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역설도 생겼다. 바로 이런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나침반이 되어주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저자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소설가이자 철학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지성으로 손꼽힌다.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르노도상과 메디치상을 수상했고, 몽테뉴상과 뒤메닐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하면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순진함의 유혹》 《아름다움을 훔치다》 《영원한 황홀》 등을 발표했고, 한국에서는 영화 〈비터문〉의 원작 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48년 프랑스 파리 출생. 파리 1대학, 파리 7대학, 고등연구실습원에서 공부했고 파리정치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그라쎄 출판사의 편집인으로 일하며 《누벨 옵세르바퇴르》 《르몽드》에서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역자 이세진은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 《해피크라시》 《선택》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기후정의선언》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