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289.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 고전 10選 (1)>

paxlee 2021. 11. 29. 03:57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 고전 10選 (1~5)

 

01 일리아스
    상상력의 원천이 된 최초의 문학작품

   

기원전 12세기에 트로이전쟁이 벌어졌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송시(口誦詩)로 전승 되다가, 기원전 8세기 중엽 호메로스(Homeros)에 의해 문자로 옮겨졌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인 대서사시 ‘일리아스(Ilias)’이다. ‘일리아스’는 본래 ‘일리온(트로이의 또 다른 이름)에 관한’이란 형용사가 그대로 제목으로 굳어진 것이다.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됐지만, 이 작품은 마지막 해의 얼마 동안, 특히 단 나흘 동안의 전투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그리스 명장 아킬레우스는 한 포로 여인에 대한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부당한 처사에 격분하여 전장을 떠난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 고전 10選 (1~5)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여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손상된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었다.
   
그가 없는 그리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참다 못한 그의 친구 파트로클레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추고 출전하지만,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헥토르를 죽이고 친구의 원혼을 달랜다. 당시에 우정은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비밀리에 그를 찾아온 헥토르의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시신을 인도한다. 적에 대한 존중도 명예의 소중한 덕목이었다.
   
이 전쟁에는 신들도 편이 나뉘어 복잡하게 개입한다. 하지만 신은 불멸하고 인간은 필멸한다. 인간이 신처럼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멸의 명예를 남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영웅들은 명예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아킬레우스가 분노하여 전장을 이탈한 것도, 분노하여 전장으로 복귀한 것도 한결같이 명예 때문이었다.
   
‘일리아스’에는 불멸을 갈망하는 영웅들의 분투와 좌절이 숨가쁘게 교차한다. 또한 신과 인간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끝없이 펼쳐진다. 이로 인해 ‘일리아스’는 고대 비극작가들은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전쟁 후 10년간의 귀향 이야기인 ‘오디세이아’가 ‘일리아스’의 뒤를 잇고 있다.
      

02 소크라테스의 변명
    눈물로 채집한 철학의 씨앗

   

기원전 399년 어느 날, 노(老)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BC 399)가 아테네 법정에 피고의 신분으로 소환된다. 재판은 피고에 대한 사형선고로 막을 내린다. 이때 20대 후반의 젊은 제자 플라톤(BC 427~BC 347)이 비통하게 이 과정을 지켜본다. 그는 법정에서 스승이 스스로를 변호한 발언을 고스란히 기록으로 옮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 Sokratous)’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부르짖은 선각자였다. 그에게 젊은 이들이 모여들어 그의 철학을 배웠고 다시 흩어져 그것을 전파하였다. 어느 사회든 이런 폭로적 철학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건전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당시 아테네는 이미 찬란한 기상을 잃고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급기야 아테네는 그를 법정에 세운 것이다.
   
그는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애매한 죄목과 더불어 ‘젊은 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그는 교육은 자신과 같은 전문가의 몫이지, 일반 시민은 청년들을 교육할 자격이 없다고 일갈한다. 이는 쇠락해가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피고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부조리한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는 재판 과정이나 수감 과정에서 해외추방 또는 탈옥 등 구명의 기회를 일절 거부한다. 그는 불의한 사회에 타협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저항을 각오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인 것이다. 결국 그는 타락한 민주주의가 건네는 독배를 마시고 의연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깊은 묵상으로 이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철학을 선명하게 남겼다. 이로 말미암아 플라톤은 평생 동안 스승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화체 저작을 통해 철학의 기초를 닦았다. 아마 그가 구차하게 목숨이나 건졌더라면 그의 철학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플라톤 철학도 결코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이야말로 눈물로 채집한 철학의 씨앗이 아닐 수 없다.

 

 03 국가
     마르지 않는 지적(知的) 저수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脚註)’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플라톤은 지난 2000여년 동안 서양의 철학과 사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30여권의 저작을 남겼는데 그중에 단연 최고봉은 ‘국가(Politeia)’이다. ‘국가’는 방대한 분야를 두루 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국가’를 구석구석 정확히 독해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 제법 유용한 편법이 있다. 세밀한 부분은 건너뛰더라도 큰 줄기만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국가’의 큰 줄기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제목은 본래 ‘국가 또는 올바름에 대해’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책의 주제가 ‘올바름의 구현을 통한 행복한 공동체(국가) 만들기’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행복한 공동체’야 말로 유사 이래 인류의 공통된 염원이다. 플라톤은 그 비결이 ‘올바름’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욕망), 도덕적 인정의 욕구(기개), 배움과 진리의 욕구(이성)를 가지고 있다. 이 상충적 요소들이 내면적으로 ‘각기 제 역할을 잘 하는 것’이 곧 개인의 올바름이다. 국가도 개인의 내면적 요소에 상응하는 계급들(생산자·전사·수호자)로 구성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각기 제 역할을 잘 하는 것’이 곧 국가의 올바름이다.
   
이러한 올바름은 오로지 ‘이성’을 통해 분별되고 구현된다. 하지만 누구나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의 담지자인 철인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이상적이다. 그의 이상국가론은 그 이후 서양 역사에서 시도된 다양한 역사적 기획들의 모델이 되었다. ‘국가’는 개인이 이성의 단련을 통해 완전함에 도달해 궁극적으로 행복한 공동체를 건설하기까지의 전(全) 과정을 다룬다. 따라서 거의 모든 분야의 철학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에도 우리는 거기로부터 실로 다양한 사유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국가’야말로 결코 마르지 않는 거대한 지적 저수지인 것이다.
   
04 논어
    중국 사상의 챔피언, 한국 사상의 수퍼 챔피언

   

기원전 5~4세기 무렵 동서양에서는 거의 동시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서양에 ‘국가’가 있다면, 동양에는 ‘논어’가 있다. ‘논어’는 공자(BC 551~BC 479)와 제자들의 문답을 후대에 누군가가

편집한 대화록이다. 이것이 동양사상, 나아가 한국 사상에 끼친 영향력은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공자는 자신의 조국 노(魯)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좌절하자 쉰여섯부터 자신의 뜻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중원을 두루 헤맸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석 달 동안 섬길 임금이 없으면 초조해 하고 국경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예물을 준비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공자의 모습을 보고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고도 조롱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정치적 기회를 얻고자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왕도정치만이 이런 비참한 현실을 구제할 수 있다고 외쳤다. 왕도정치란 엄격한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이룩한 군자(君子)가 펼치는 인의(仁義)의 정치이다.
   
그러나 패도의 세상에서 아무도 그의 유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나이 일흔에 유세를 단념하고 늙고 지친 몸으로 귀향했다. 그때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논어’는 주로 이 시기에 제자들과 나눈 문답이다. 그 주제는 ‘어떻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 행복한 공동체를 건설할까’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고민한 바이기도 하다.
   
유가는 백가(百家)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더구나 유세에 실패하여 당대에는 별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국가의 정통사상으로 꽃을 피웠다. 드디어 그것은 동양사상의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조선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상들이 이단으로 억압된 것은 동양사회의 크나큰 손실이었다.
   
05 한비자
    인간사를 꿰뚫어본 현실주의적 통찰력

   

흔히 “제왕은 남이 볼 때는 ‘논어’를 읽고, 혼자 있을 때는 ‘한비자’를 읽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두 대립적인 사상의 특징을 절묘하게 웅변해준다. 잘 알다시피 ‘한비자’는 한비(韓非·BC 280?~BC 233)의 저작이다. 그는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에 앞서 법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은 상앙(商鞅·BC 395~BC 338)이었다. 그는 과거의 제도나 법을 확 바꾸자는 변법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철저한 법치주의를 채택했다. 그는 진(秦)나라 효공을 도와 진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효공이 죽자 귀족을 비롯한 반대파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했다.
   
한비는 상앙보다 약 한 세기 뒤에 태어난 한(韓)나라 공자이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관계를 철저히 이해(利害)가 작용하는 관계로 파악했다. 그는 상앙의 변법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위에, 군주가 자신의 권세를 활용하여 통치술을 발휘하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정치란 세(勢)를 다투는 것이지 결코 의(義)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군주는 힘을 바탕으로 신하를 효과적으로 부려야 한다. 심지어 고의로 의혹을 일으키고 일을 시켜 사실 정황을 파악하고, 말을 거꾸로 하고 일을 반대로 함으로써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군주란 무릇 한 손에 법(法)을, 다른 한 손에 술(術)을 들어야 한다. 말더듬이인 그는 그의 생각을 ‘한비자(韓非子)’에 유려하게 담았다.
   
진나라의 위협을 받자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냈다. 진왕(나중에 진시황)이 그에 대해 호의를 보이자 이를 질시한 이사(李斯)가 첩자의 죄를 씌워 그를 살해했다. 비록 그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법가사상은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기본강령이 되었다. 이처럼 동양에는 일찍이 세상을 이해관계로 꿰뚫어본 현실주의적 탁견이 있었다. 유학의 정통화로 말미암아 이런 사상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노릇이다. ‘한비자’는 간혹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차가 무려 1800여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