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540. <95년전 세계 일주여행 나선 조선의 첫 여성, 나혜석.>

paxlee 2022. 6. 30. 00:22

나혜석, ‘단테의 도시’ 피렌체, 과학 냄새나는 베를린 등 예술도시 순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27년 6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에 도착한 나혜석은 1년8개월간 파리, 런던, 밀라노, 피렌체, 베니스, 베를린,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 세계 문화예술 도시를 순례했다. 남편 김우영의 구미 시찰을 기회삼아 둘러본 여행이었다.

 

‘여류 화가 나혜석(32)씨는 예술의 왕국 불란서를 중심으로 동서양 각국의 그림을 시찰코자 오는 22일 밤 10시50분차로 경성 역을 떠나 1년반 동안 세계를 일주할 예정으로 금일 오전 7시45분 경부선 열차로 동래 자택에서 입경하야 방금 조선호텔에 체제중인 바….’(조선일보 1927년6월21일 ‘나혜석여사 世界漫遊’)

 

95년 전,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 여성이 있었다. 서양화가 나혜석, 남편 김우영 변호사와 함께 떠난 길이었다. 김우영은 중국 안동현(縣) 부영사로 근무한 공로로 구미 시찰 기회를 얻었다. 나혜석은 호텔을 방문한 기자에게 ‘일년반이라는 짧은 세월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만 남편이 구미 시찰을 떠나는 길인고로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잠깐잠깐 각국의 예술품을 구경만 하는 것이라도 적지 않은 소득이 있을 줄 믿고 가는 것이올시다’라고 했다. 2년 가까운 세계여행이지만 성에 차지 않은 듯했다. ‘이왕 먼길을 가는 길에 여러해 동안 있어 착실한 공부를 하여가지고 돌아오고 싶지만 어린 아이를 셋씩이나 두고 가는 터임으로 모든 것이 뜻과 같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바이칼을 통과하는 중이다’

 

나혜석은 지구를 한바퀴 도는 일정을 짰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적색 로서아’를 거쳐, 영길리(英吉利·영국), 독일, 불란서, 백이의(白耳義·벨기에), 오지리(오스트리아), 화란, 서반아, 서서(瑞西·스위스), 서전(瑞典·스웨덴), 정말(丁抹·덴마크), 낙위(諾威·노르웨이), 토이기(土耳其·터키) 파사(波斯·페르시아) 첵크(체코) 섬라(暹羅·태국), 희랍, 미국 등을 방문하는 계획이었다.

 

나혜석은 여행 중 지인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후배 최은희에게도 엽서를 보냈다. ‘나는 지금 유명한 ‘빠루가이’(바이칼)호반을 통과하는 중이다. 듣던 바 이상의 절승지(絕勝地)다. 이곳은 경성 9,10월의 기후다. 오전 2시에 일출(日出)하고, 오후10시에 일모(日暮)한다. 낮에 잠을 자는 것 같아서 좀 이상한 감이 있다. 지평선이 창천과 합한 듯한 황무지에는 영란(鈴蘭)꽃이 반짝이고 양떼와 소떼가 한가히 거닐고 있다.’(‘나혜석씨 旅中소식’, 조선일보 1927년7월28일)

 

◇제네바에서 만난 영친왕, 그림 부탁

 

나혜석 부부는 1927년 7월19일 오전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며칠 머물다 스위스로 넘어갔다. 마침 제네바를 방문한 영친왕과 이틀 연속 만찬을 함께 했다. ‘식후 사담을 나누는 중에 전하께서 나에게 특별히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셔서 매우 황송스러웠다.’ 인터라켄에 들러 융프라우를 올랐다. 요즘 여행자들처럼, 등산열차를 타고 터널을 통과해 눈 덮인 봉우리를 만났다. 융프라우를 본 나혜석은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히 있다’며 조선을 떠올린다.

 

조선의 첫 여성화가이자 첫 세게일주 여행에 나선 나혜석

 

◇‘파리는 화가를 부른다’

 

나혜석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예술의 도시 파리였다. ‘시내에 있는 무수한 극장, 활동 사진관은 화려하고 노골적이요, 배경, 색채, 인물, 의상 모두 예술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는 바이다. 저명한 극장은 오페라, 오페라 코믹(희극장), 콤메 드 프랑세즈, 오데옹, 카지노 드 파리, 물랭루즈요, 활동사진관으로는 고몽파르나스가 제일 크다.’

 

루브르 박물관에 대한 묘사는 요즘 여행에세이를 읽듯 생생하다. ‘거울과 같이 비치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걸어가노라니 좌우에 조각을 나열해 놓았다. 그 중 저명한 것은 ‘밀로의 비너스’ ‘옥타비아누스 흉상’ ‘칼리굴라 황제 흉상’이 있다. 계단 위 정면에서 첫 인사를 받는 동체(胴體) 모습의 그리스 여신은 미적 자태의 절정을 보여준다.’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루브르 궁전 정원 주위의 화단을 돌아 여신상 분수에 발을 멈추고, 역대 인물 조각을 쳐다보며 좌우 우거진 삼림 사이를 거닐면, 이야말로 인간 세계가 아닌 별천지다.’ 노틀담 성당, 뤽상부르 미술관, 개선문, 콩코르드 광장, 팡테옹, 에펠탑... 파리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낯선 이국 풍경을 떠올렸을 독자들에게 나혜석은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방대한 예술 작품을 단기간에 맞닥뜨린 나혜석도 기가 눌렸던 것같다. ‘처음 파리에 와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 그림을 보고 나면, 너무 엄청나고 자기라는 존재는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일시적으로는 낙망하게 된다.’ 하지만 ‘미술계의 사정과 흐름을 깨달아 연구에 매진하려면 여간 방황하고 고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각오를 다졌다. ‘연극, 오페라, 활동사진을 가보면 어느 하나라도 그림의 소재 아닌 것이 없다. 화가가 있어야만 할 파리요, 파리는 화가를 불러온다.’

 

◇ ‘베를린에선 과학 냄새가 난다’

 

그 해 12월21일 남편이 세 달 먼저 가있던 베를린 역에 도착했다. 베를린은 과학과 음악, 문학과 예술의 도시였다. ‘과학과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도 프랑스와 앞을 다투며, 독일 사람들은 검소하고 참을성이 많다고 한다. 베를린은 전차, 버스, 택시, 지하철이 쉼 없이 왕래해 대도시의 기운이 농후했다.’ 나혜석은 ‘매우 합리적이고 바라보기에도 경쾌하였다. 모든 것이 과학 냄새가 난다’고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베를린은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도시였다. 히틀러 집권 직전, 마지막 만찬을 즐기는 중이라고나 할까. 나혜석은 교향악 콘서트에도 갔다. ‘독일에서 유명한 음악회를 구경 갔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곡 연주회인데, 수백명의 단원이 나와 관현악을 합주하니 관객의 마음은 서늘해지고 몸은 중천으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라 스칼라 극장, 음악, 연기, 무대 빈틈 없어

 

‘이탈리아는 미술의 나라다. 그 미술은 고대 로마시대로부터 17세기에 이르도록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1928년 3월23일 이탈리아로 향했다. 밀라노에서는 두오모 성당,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을 감상했다. ‘과분한 기대와 긴장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과연 그림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나혜석은 ‘실내에 꽉찬 각국 관광객들은 작품의 참맛을 알려고 망원경으로 혹은 종이를 말아대고 보느라고 야단들이다’고 썼다. 밀라노 명물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공연도 봤다. ‘외관은 평범하지만 무대 배경이며 출연하는 수백명 배우의 의상, 연기, 노래, 음악이 빈틈이 없었다. 나로서는 파리에서나 베를린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 거기 앉아 관람하는 나는 무한히 행복스러웠다.’

 

1927년 6월 세계일주에 나선 나혜석, 김우영 부부

 

◇'단테가 밟은 땅 피렌체에 오니 이상한 환희’

 

베네치아에선 틴토레토와 티치아노, 베로네제의 그림이 걸린 두칼레 궁, 산 마르코 성당,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소장한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소개된다. 단테,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같은 천재들을 만난 피렌체는 나혜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피롄체는 예술의 도시라서 시가지를 걷는 것이 마치 미술관을 걷는 것같다.

 

어느 건물, 어느 사원, 어느 문, 어느 창, 어느 조각이 예술품 아닌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이 맛을 보러 왔겠지만, 저 아르노 강물이 키워낸 단테, 미켈란젤로, 조토, 마사치오, 보티첼리, 도나텔로 등 천재들의 자취를 보러 온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밟았겠지 하는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반갑고도 슬픈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파리를 떠나 미국 뉴욕에서는 김마리아, 서재필 등을 만났고, 워싱턴에서는 주미공사관,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백악관 등도 둘러보았다. 나혜석은 워싱턴의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을 지나치며 이렇게 썼다. ‘조그마한 양옥 정문 위에는 태극 국표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상히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미국 대륙을 횡단해 나이아가라 폭포, 시카고, 그랜드캐니언, 로스앤젤레스, 요세미티 공원을 여행했다. 1927년 6월19일 부산을 출발한 나혜석의 세계 일주는 1929년 3월12일 부산 도착으로 마무리됐다.

 

◇상처 남긴 세계여행

 

나혜석의 세계일주는 그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가 당시 신문, 잡지에 남긴 여행기는 지금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다. 생동감 있는 묘사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세계여행은 나혜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파리에 체류하던 당시 3.1운동 33인 대표중 하나이자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과 염문에 빠진 것이다. 귀국 후 결혼 생활도 엉망이 됐다.

 

나혜석은 1930년 11월 김우영과 이혼하고 네 아이를 남겨둔 채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김우영은 곧 재혼했다. 나혜석은 얼마후 ‘이혼공개장’(‘삼천리’, 1934년8월호)을 발표하면서 1930년대 최고의 스캔들 주인공이 됐다. 나혜석은 세계 일주 후 불안한 미래를 어느 정도 예감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행기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아, 아, 동경하던 구미 만유도 지나간 과거가 되고,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돌아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앞길은 어떻게 전개되려는고.’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