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559.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과 종묘, 90년 만에 다시 만난다.>

paxlee 2022. 7. 9. 00:12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과 종묘, 90년 만에 다시 만난다.

 

일제때 단절됐던 조선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를 하나의 담장으로 묶었다. 

 

일제(日帝)가 종묘 관통 도로(현 율곡로)를 내며 갈라놓았던 창덕궁·창경궁과 종묘가 다시 만났다. 1932년 도로 개통 이후 90년 만이다. 율곡로를 지하에 넣고 그 위에 흙을 덮으면서 두 궁궐과 종묘를 하나의 숲으로 연결하는 녹지(8124㎡)가 들어섰다. 녹지는 서울 상암동 축구 경기장(7140㎡)보다 크다. 그 위로 옛 종묘 담장도 복원되며 두 궁궐과 종묘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던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돈화문 앞에서 창경궁 경내를 지나 원남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담장 산책로가 새로 조성됐다. 길이 320m인 담장 산책로는 덕수궁 돌담길 못지않은 서울의 걷기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터널이 된 율곡로는 6차로로 확장돼 시원하게 뚫렸다. 2010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 첫 삽을 뜨고 12년 만의 결실이다. 복원된 녹지와 종묘 담장, 담장 산책로는 오는 21일 일반에 개방된다. 장마가 잠시 멈춘 4일 오후, 막바지 시민맞이 준비로 바쁜 종묘 돌담길을 미리 가봤다.

 

창경궁과 종묘, 90년 만에 다시 만나다

 

◇총독부 “종묘 관통 도로 놓겠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원래 하나의 궁궐이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다 해서 동궐(東闕)로도 불렸다. 동궐은 북악산 응봉에서 뻗어나온 숲을 따라 종묘와도 연결됐다. 하지만 동궐과 종묘는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쪼개졌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11월 서울 도심에 바둑판 형태의 현대식 도로 29개를 놓는 경성시구개수안(案)을 발표했다. 그중 돈화문 앞에서 지금의 서울대병원까지 잇는 6호선은 동궐과 종묘 사이를 횡으로 통과하는 ‘종묘 관통선’이었다. 일제는 “경성을 서구식으로 문명화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추진 과정에서 옛 왕조의 여러 궁궐을 훼손했다. 종묘 관통선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열성조를 모신 종묘 훼손은 안 된다”는 순종의 반대에 막혀 진척되지 못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며 상황이 반전됐다. 왕조가 무너진 뒤 15년여가 흘렀고 종묘 동쪽(현 동숭동)에 제국대학과 병원이 들어서며 교통량도 늘었다. 이런 변화에 맞춰 관통 도로를 개설하라는 목소리가 컸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도로를 뚫기 위해 종묘를 이전하거나 공원화하자고까지 했다.

 

◇종묘, 섬이 되다

 

1931년 5월, 창경궁 쪽으로 조금 수정된 노선으로 도로가 착공되며 결국 종묘 담장이 헐렸다. 조선일보는 그해 8월 2일 자 ‘헐려진 종묘 담터’ 기사에서 총독부의 종묘 담장 훼손 소식을 비감한 어조로 전했다. ‘(종묘의) 뒷담이 여지없이 헐려 넓으나넓은 길이 뚫리게 되어 자동차 구루마가 거침없이 앞으로 뒤로 횡행 관통하게 되었고(중략) 오랜 터의 없어지는 것을 모조리 보는 우리가 어찌 상심루(淚)가 없을 수 있으랴!’ 폭 22m 신작로가 이듬해 4월 완공됐다. 현재의 율곡로다. 종묘는 동궐에서 분리돼 섬처럼 떨어져 나갔다. 총독부는 조선 왕실의 반발과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 도로 위에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하는 육교를 놓았다.

 

◇황톳길 산책로 걸으며 꽃과 나무 감상

 

서울시는 일제가 훼손한 동궐을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2010년 10월 시작했다. 이를 위한 율곡로 터널화 공사가 지난해 9월 완료됐다. 그사이 터널 위에선 궁궐 녹지와 담장 복원, 산책길 조성 공사가 진행됐다. 4일 오후 돈화문 옆 순라길을 걸어 산책로에 올라보니 탁 트인 전망대가 반긴다. 돈화문과 현대 계동 사옥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 맞은편으로 복원된 담장과 운치 있게 뻗어 있는 돌담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책로 초입 오른쪽엔 이곳이 유서 깊은 조선의 유적임을 알려주는 돌무더기가 눈길을 끈다.

 

2011년 궁궐 복원을 위한 문화재 시굴 조사 중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옛 담장 기초석이었다. 본격적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궁궐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어울리도록 애쓴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담장은 조선 궁궐 담장에 쓰던 사괴석으로 쌓아 올렸고, 폭 3m인 산책로는 시멘트 대신 황토 원료의 흙콘크리트를 깔았다. 산책로 옆으로 동궐과 종묘의 주된 수종인 소나무 250여 그루, 가을에 낙엽을 즐길 수 있는 단풍나무 팥배나무 등 낙엽 활엽수 500여 그루가 줄지어 늘어섰다.

 

나무들 사이로 설치된 가로등은 성인 허벅지 높이로 일반 가로등보다 작았다. 동행한 문화재청 측은 “고궁의 예스러운 분위기를 즐기며 산책하는 시민의 시선을 고려한 높이”라고 설명했다. 봄에 피는 철쭉·진달래·옥매화, 여름에 꽃 피는 고광나무·황매화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한 꽃을 감상할 수도 있다. 종묘 담장 산책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여름철 기준) 통행할 수 있고 입장료는 없다.

 

◇육교 허물고 왕이 드나들던 北神門도 복원

 

산책로를 따라 200m쯤 가면 복원된 북신문(北神門)에 다다른다. 이 문을 통과해 창경궁과 종묘를 넘나들 수 있다. 동궐과 종묘가 도로에 의해 갈라지기 전엔 조선의 왕들이 이 문을 이용했다. 일제가 도로를 만들며 설치했던 육교는 철거됐다. 다만, 북신문을 통과해 창경궁과 종묘를 오가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다. 북신문 매표소가 설치됐지만, 자유 관람인 창경궁과 예약을 통한 시간제 관람인 종묘의 매표 시스템이 아직 통합되지 않았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이미 함양문으로 연결돼 있으니 북신문만 개방되면 동궐과 종묘의 연계 관람이 가능해진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복원 취지에 맞게 향후 북신문 개방에 필요한 조치를 협의하기로 했다.

 

◇일제의 조선 왕궁 훼손

 

일제는 덴노(天皇)의 궁궐 보존에 정성을 다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교토의 옛 궁궐인 어소(御所)가 폭격당하는 화를 피하려고 주요 전각을 해체해 보관했을 정도다. 총독부의 조선 궁궐 대우는 달랐다. 경복궁을 식민지 근대화의 선전장으로 동원하며 크게 망가뜨렸다. 온갖 박람회와 전시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궁궐을 훼손했다.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는 전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며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던 흥례문을 헐었고, 자선당과 비현각을 매각했다. 세자와 세자빈 숙소인 자선당은 일본인에게 팔려 도쿄에서 호텔로 쓰이다가 관동대지진 때 불탔다.

 

타고 남은 기단과 주춧돌만 해방 후 돌아왔다. 총독부는 1929년 조선박람회를 개최할 때도 도로를 확장한다며 경복궁 궁장(궁궐 담장)을 훼손했다. 이때 궁장과 연결된 동십자각이 궁에서 분리돼 도로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됐다. 서십자각은 전차 통행에 방해된다며 아예 허물었다. 고종 시절 500여 동이던 각종 건축물이 해방 당시엔 36동밖에 남지 않았다. 덕수궁의 선원전 일대엔 여러 학교가 들어섰고 돈덕전은 철거됐다가 최근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조선 궁궐을 공원화할 계획도 세웠다.

 

일제 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엔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 공원화 계획이 실려 있다.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해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으로 활용했다. 옛 전각을 허문 자리에 일본식 건물도 세웠다. 경희궁엔 일제의 조선 병탄 직후인 1910년 11월 통감부중학교가 들어섰다. 정문인 흥화문의 운명은 더욱 기구했다. 장충단으로 옮겨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의 정문으로 쓰였다. 해방 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논설실의 뉴스 읽기]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 / 2022.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