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614. <첫사랑의 맛>

paxlee 2022. 7. 28. 08:51

첫사랑의 맛

 

 만남이 신비하다. 그리고 사랑도.
우린 누군가 만남을 시작으로 나의 역사를 쓴다.


수필가 박혜영



모 화장품 공장 견학 중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길을 따라 시설을 살펴보았다. 나목 한그루의 얇은 나뭇잎이 끄덕 살랑댔다. 상큼한 바람을 얼굴에 받으며 몇 걸음 떼다가 구름 부스러기도 없는 형언하기 어려운 빛깔의 하늘에 탄성이 나왔다. 그것들에게도 ‘마음’이라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해 보며 자연이 반겨주는 기쁨이 더 크다. 깨끗한 시설, 정돈된 자연, 모두가 좋았다. 이동 중 함께 한 엄 선생님이 길옆 화단으로 뛰어들었다. 알 수 없는 나뭇잎을 따와 선생님에게 내민다.



“선생님 이 잎 먹어봐! 첫사랑 맛이야!”


잎을 받아 드는 순간 여러 상념이 스쳤다. ‘첫사랑 맛이라, 정말 자신의 첫사랑처럼 맛보는 사람에 따라 맛의 느낌이 다른 걸까?’


분명 엄 선생님 의도로 보면 쓴맛일 거라는 생각이 미쳤다. 한입 베어 물고 씹을수록 쓴맛이 지독히 입안 가득히고였다.


“어! 나, 첫사랑 쓰지 않았는데…”



인절미의 쫄깃쫄깃한 맛,


레몬이란 말만으로도 충분한 상큼한 맛,


비빔밥의 고추장 양념처럼 매콤한 맛,


얼음이 동동 뜬 식혜처럼 시원한 맛,


냉면에 푼 겨자의 눈물 나는 맛,


사랑에도 맛이 있고, 그리고 그 사연 속엔 감동의 색깔이 있을 것이다.


엄 선생님의 화제 제공은 오늘의 목적과 달리 우린, 첫사랑이 화제였다. 작은 조각 잎을 떼어 주며 사람들의 첫사랑을 실험했다. 혹자는 억지로 쓴맛을 삼키며 무표정하기도 하고, 그 즉각 빼어버리는 이도 있었다. 지독히 쓴맛에 이건 첫사랑 맛이 아니라 고3맛이라 하는 이도 있었다.


그 입의 정체는 라일락 잎이다. 처음 꽃봉오리가맺힐 때는 진보라 색을 띠다가 봉우리가 열리면서 옅은 라벤더색으로 바뀌게 된다. 꽃이 활짝 피면 강렬한 향기를 내며 백옥같이 하얀색으로 변하는 라일락. 가수 현인 씨가 의역한 베사메무초 노래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라일락의 꽃향기는 첫사랑의 첫 키스만큼이나 달콤하고 감미롭다. 그런데 고고한 꽃과 달콤한 향기를 간직한 라일락이 이처럼 쌉싸름한쓴맛의 속마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첫사랑 맛이라 했을까?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으며 그게 왜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던 시절. 나에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다.


남녀공학에서 처음 남녀가 한 반을 하며 의미 없는 누구와 누구랑 짝을 지어 놀리기를 즐기던 시절이다.


그렇게 짝지어진 짝꿍에게 특별한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세월이 흘러 동창 모임에서였다. 그 시절 첫사랑을 고백받았다. 별안간 포장이 뜯긴 선물 앞에서 당황했다. 그 긴장감을 어찌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언제가 첫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철모른 시절 애틋했던 기억, 어느 정도 사람의 관계를 알고 맛본 정말 씁쓰레했던 추억, 그러나 분명 첫사랑의 기억은 나에겐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지금도 가끔 동창회에 나가면 첫사랑의 추억을 재미 삼아 화제로 떠올리며 즐기니 말이다.

당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소녀와 소년은 이제 소풍 삼아 마음의 여백을 즐긴다. 첫사랑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과거가 아름답다. 빛바래지 않고 원색과 원형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마도 첫사랑일 것이다. 따뜻하고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지금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가녀린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 속에 청순한 소녀 소년의 순수한 마음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나를 향해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싫지 않았던 그때, 세월이 흘러 들여다보니 첫사랑이었던 것을.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나의 행동들, 어떤 선생님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나보다 더 자세히 아는 소년의 기억. 그 추억은 당시 느끼지 못한 첫사랑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내 가슴의 방 하나를 내주었다.


사람들은 첫사랑이 이루지 못한 첫 번째 사랑이라 애틋함을 갖는다. 모든 이가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남게 되는 사랑이 아닐지. 처음이라 제대로 가꿀 수 없었던 시절.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 아마도 쓴맛 아픔 상처가 먼저 생각난다. 그래서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던가! 꽃의 향기가 아름다운 이면에 쓴맛을 간직한 잎을 보고 아마도 선생님은 첫사랑 생각했을 것이리라. 라일락의 겉모습과 속내가 간직한 모습은 정말 첫사랑처럼 절묘했다. 세월의 무게가 더할수록 마음 한쪽에 작은 모닥불처럼 남는 단어 첫사랑!


고요했던 가슴에 돌이 던져져 과거가 소용돌이쳤다.


편안하고 부드럽게 누군가를 그리움으로 떠올릴 수 있는 추억! 그건 첫사랑에 대한 아름다움이었다. 사랑의 모습은 큰 것에서 비롯되기보다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때의 정은 각각 가슴에 저축되어 있다.

- 출처 : 첫사랑의 맛 : 수필가 박혜영. 화성 투데이 -